2024년 6월 26일 (수)
(녹)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김대권 베드로: 내 신앙은 내 살과 뼈에 사무쳐있어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80

김대권 베드로 : 내 신앙은 내 살과 뼈에 사무쳐있어

 

 

한국 초대교회의 탁월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순교자 신태보(申太甫) 베드로는 참수 순교하기 전까지 십삼 년동안 옥고를 치렀다. 그가 가옥에서 쓴 "옥중수기"를 보자, "내 다리의 살은 헤어져서 뼈가 드러나 앉지도 못하였다. 날마다 물만 두세 탕기 먹을 뿐이었다. 상처는 곪아서 견딜 수 없는 악취를 풍겼으며, 감옥은 벌레와 이투성이라서 아무도 내게 접근하지 못하였다. 다행히 건강한 몇몇 교우들이 부축하면 움직일 수 있었고, 이들이 가끔 내 골방을 치워주기도 하였다. 이 애덕의 행위를 어떻게 넉넉히 감사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버려진 채 길고도 지루한 옥고를 견뎌냈다. 극한 상황에서도 사랑을 나누며 감사하는 삶을 갈아간 이 신앙의 영웅들을 지방 관리들은 옥에 내버려둔 채 시간을 끌어 지치고 무기력해지게 하는 술책을 썼다. 끝없는 고통만이 이어지는 옥중에서도 신앙 선조들은 더욱 굳건한 신앙을 고백하고 십삼년의 옥고를 견뎌내며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그 가운데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정태봉 바오로, 이태권 베드로, 이일언 욥, 김대권 베드로 등이다. 이들은 모두 십삼년의 옥고를 치르고 신태보와 함께 참수 순교한 증거자들이며, 모두 초대교회의 요람이며 중심지인 충청도 내포(內浦) 출신이었다.

 

이들 가운데 신태보와 이일언은 칠십을 넘긴 늙은 나이에 극악한 옥고에도 신앙의 지도자다운 모습을 보였다. 특히 이일언(李日彦)은 형장으로 끌려갈 때 울며 따라오는 가족들을 향해 "내 여러 해 동안 옥에서 고생하다가 이제야 천국으로 가게되니 슬퍼하지 말고 나의 행운을 기뻐하라. 그리고 너희들도 훌륭한 신자다 되도록 노력하여라!"고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이태권(李太權)은 심약하여 두 번이나 배교하고 풀려난 지난 날의 잘못을 되갚기라도 하듯 굳은 신앙을 증거하여 관헌을 경악하게 한 쉰 여덟 살의 장년이었다. 정태봉(鄭太奉)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평소 도마를 턱에 대고 순교하는 모습을 연습했던 그는 혹독한 형벌을 견디어 마흔세 사의 한창 나이로 순교의 피를 영광스럽게 봉헌하였다. 그런데 이들과 함께 옥고를 치르고 순교한 김대권은 체포된 경위, 장소 그리고 나이고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그가 남신 옥중 생활과 생애의 한 대목이 소중히 전해질 뿐이다.

 

김대권(金大權)은 충청도 청양(靑陽)의 수단리에서 태어나 보령의 청라동에서 살았던 신자로서 1816년에 순교한 김화준 야고보의 형이다. 그는 어려서 교리를 배우고 영세 입교하였으나 계명을 지키지 않아 신자생활을 하지 못한 채 살아갔다. 그러다가 양친이 죽은 뒤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는 생계를 위해 공주로 이주하여 옹기점에서 일하며 끼니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아내와 불화로 부부싸움을 자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이 한바탕 언쟁을 벌인 뒤 베드로는 안방에서 자고 아내는 부엌에서 밤을 지새게 되었다. 그가 막 첫잠이 들어다가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지내던 하느님, 어린 시절에 동생과 함께 그토록 열심히 기도 드렸던 그 하느님의 음성이 자신을 부르는 듯하여 벌떡 일어났다. 바로 그 순간 호랑이 한 마리가 부엌에서 잠자던 아내를 물고 달아나는 참이었다. 김대권은 황급히 소리를 지르며 호랑이를 쫓아가 겨우 아내를 구해냈으나 아내는 다리에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다음날 베드로는 아내에게 조용하고 정중하게 말하였다. "이번 일은 우리가 너무 불화해서 생긴 일인데 하느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건질 수 있도록 해주셨으니 우선 감사를 올려야 하겠소. 또 이 지엄하신 하느님의 교훈을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잘 받아들여서 이제부터는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고 착한 일을 하면서 죽을 때가지 화목하게 살아가야 하겠오." 부부은 이렇게 다짐을 하고 하느님께 회개의 기도와 보속의 눈물을 흘리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였다.

 

특히 김대권의 삶은 회개의 새로운 삶이었다. 그는 주일마다 집안은 물론 마을 사람들에게 권면하고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탄축일이 되면 언제나 산으로 올라가 성서와 신심서적을 읽고 묵상을 하며 기도로 밤을 세웠다. 사순 시기가 되면 베드로는 더욱 열성을 다해 기도와 묵상을 하고 하루에 한 끼만 먹었는데, 그것도 밥 한 사발을 맹물에 말아 반찬도 없이 소금을 찍어먹으며 고신극기로 절제하였지만 그의 체력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마음속 깊이 순교를 열망하다가 1816년 동생이 순교할 때 사용하였던 나무토막을 찾아 가금 거기에 턱을 괴고 죽음과 순교를 묵상하며 깊은 침묵에 잠기곤 했다고 한다.

 

1827년 전라도에서 박해가 일어나고 김대권도 다른 신자들과 함께 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의 체포 경위를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그는 동네 신자들에게 먼저 피신하도록 권유했고, 포졸들에게 잡힐 때는 마치 잔치 집에라도 가는 듯이 기쁨에 찬 얼굴이었다고 한다, 그는 호랑이를 무서워하지 않았듯이 관원과 관장을 또한 무서워하지 않고 기쁨과 열의에 찬 모습으로 교리를 거듭 설명하며 신앙을 굳건히 증거했다.

 

"네가 그 사교를 믿는다는 말이냐?" 하고 관장이 준엄하게 꾸짖었다. "나는 절대로 사교를 믿지 않고 다만 하늘과 땅의 참 천주를 공경할 뿐입니다"라고 베드로는 대답했다. 관장은 김대권의 옷을 벗기고 혹독하게 매질하였다, 다는 온몸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예수님과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만을 부르며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이러한 형벌에도 아랑곳없이 그가 "칠극"의 교리 내용을 거듭 설명하자 관원들은 쇠꼬챙이로 온몸을 마구 찌르는 형벌을 가했고, 결국 베드로는 혼절하여 의식을 잃고 민신창이가 되어 옥에 던져졌다. 그가 옥중에서 겨우 정신이 들었을 때 상처투성이의 몸을 바라보고는 "이것으로 천주의 은혜를 만 분의 일이라고 갚을 수 있겠는가?" 하며 회개와 감사의 눈물을 흘려 옥중의 모든 신자들과 포졸까지도 감동케 하였다.

 

관장은 최후의 수단을 사용했다. 그의 아들을 데려다가 목에 칼을 겨누고 배교하지 않으면 못을 자르겠다고 위협했다. 김대권은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내 아들이 이 일로 목이 잘린다면 이 아이에게나 나에게는 큰 영광이 될 것인데 어찌 사사로운 목숨에 연연하여 하느님을 배반하겠소!" 관장은 더욱 화를 내며 이제 배교하지 않으면 네 아들뿐 아니라 너도 함께 사형에 처해 도륙하겠다고 최후의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김대권은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매를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하느님을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나의 생각은 내 살과 뼈에 사무쳐 있어서 사지를 자르면 그 하나하나에 이 생각이 배어있고, 뼈를 부수면 그 조각에 그대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나의 생각은 추호도 변함이 없습니다. 만 번을 바꾸어 생각을 해도 하느님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관장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를 십삼 년 동안 옥에 버려두었다. 그는 옥에서 신앙동지들과 함께 고난 중에 있는 교우들을 격려하며 살다가 1839년 5월 29일 내 명의 교우와 함께 그토록 갈망하던 참수 순교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얻었다. 그의 마지막 증언은 수많은 옥중 순교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경향잡지, 1998년 8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323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