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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김강이 시몬: 강원도 원주의 첫 증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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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77

김강이 시몬 - 강원도 원주의 첫 증거자

 

 

태백산맥이 용틀임하는 강원도는 산세가 깊고 험해서 무수한 박해로 고초를 겪었더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좋은 피신처가 되었다. 1801년 최초의 전국적인 박해가 있은 뒤 많은 신자들이 강원도로 이주했다. 그러던 1815년, 경상도에서 일어난 박해 때 잡혀간 신자들 가운데 몇 명이 모진 매를 견디지 못하여 강원도로 피신한 신자들을 밀고하는 일이 생겼다. 이로 인해 박해의 손길이 강원도까지 미치게 되었고, 강원도의 으뜸 고을인 원주에서도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드러낸 이가 나타났다. 바로 김강이(金綱伊, 1755-1815년) 시몬이다.

 

김강이는 '여생'이라 하기도하고 '여성'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충청도 서산지방의 중인 출신이었다. 그느 어려서부터 성격이 고상하고 용맹하였으며 가세도 넉넉하였다. 김강이가 어떻게 천주교를 알고 신자가 되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신부가 입국하기 전에 영세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도 초대교회의 신앙 선조들처럼 책으로 교리를 배우고 신앙 동지들과 함께 신앙을 실천함으로써 입교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신자가된 뒤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날, 시몬은 집안에서 거느리던 종들을 모두 모아 자립할 수 있을 정도의 재물을 나누어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너희는 종이 아니라 자유인이다." 그리고 나머지 재산은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주고 고향을 떠났다. 그는 신앙적 삶에 전념하려도 친지와 친척을 더나 동생 김창귀 타데오와 함께 전라도 고산으로 이사하였다. 영적 목마름으로 주님의 길만 찾으려는 시몬에게 자비로운 섭리의 손길이 뻗쳐 그곳에서 주문모 신부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리 나라의 사목을 위해 최초로 입국했던 주문모 신부는 1795년 4월 고신에 살았던 당대 한국교회 최고 지도자 가운데 한분이었던 이존창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때 김강이는 신부님을 뵙게 되었고, 그 감격과 기쁨으로 몇 차례 신부님의 처소를 머물면서 온갖 영적 목마름을 다 풀었다. 그리고 뜨거운 열정으로 봉사하며 신자들한테 모범을 보였다.

 

이러한 열성 때문에 18101년 박해가 일어났을 때 관아에서는 김 시몬을 유력한 천주교 지도자로 지목하고 그의 인상과 특징을 적은 것을 포졸들에게 나누어주어 사방을 두루 다니며 그를 잡아들이라고 했다. 박해 때 포졸들한테 인상과 특징을 적어 체포하게 한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었는데, 이 때문에 시몬은 1년 이상 숨어 살아야 하는 곤경에 처했고, 그가 숨어사는 동안 아내가 체포되어 1년동안 옥고를 치르고 석방되기도 했다.

 

김강이는 좀더 안전하게 몸을 숨겨야 했고 또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그래서 궁리 끝에 등짐장수로 변신하기로 결심하고, 등짐장수꾼들 틈에 끼여 외교인인 것처럼 행세하며 자신의 모습을 숨겼다. 치열한 박해를 피해 등짐장수로 변신하면서도 은밀하고 용감하게 복음을 전파하였고 몇 명의 등짐장수를 입교시키기도 하였다.

 

영세한 뒤 오직 영적인 삶을 갈구하여 종들과 재산을 버리고 고향을 떠났던 그가 포졸의 추적을 피해 등짐장수로 변신했지만 그 생활로 신앙생활을 할 시간도 자유를 가질 수 없었다. 고심하던 가운데 박해의 고삐가 주춤해진 틈을 타 그는 이 생업을 버리고 경상도 머루산으로 피해 농사를 지었다. 이때 김시몬이 권유하여 입교한 신자 몇 사람이 그를 따라 가족을 데리고 함께 들어와 조그마한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다. 그 이웃의 몇 집이 또 영세하여 교우촌을 더 넓혔으나, 포졸들의 추적이 계속되자 교우촌 사람들은 이사를 거듭하며 울진까지 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곳은 그들이 마지막으로 머문 곳이 되었다. 김강이의 마지막 정착지도 이곳이다. 울진에서 경상도 박해 때 잡혀간 시몬의 하인의 마지막 정착지도 이곳이다. 울진에서 경상도 박해때 잡혀간 시몬의 하인이 밀고하여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만 것이다. 포졸들이 들이닥쳐 그를 묶고 그가 가진 재산을 탐욕스럽게 휩쓸어갔다. 그리고 안동관아로 압송된 때가 1815년 4월이었다.

 

김 시몬이 안동관아 옥에 이르렀을 즈음 이미 갇혀있던 많은 교우들을 만났는데 모두 굶주림에 지친 참혹한 모습이었다. 얼마나 굶었는지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으로 행동마저 느리고 둔탁해서 눈물겹기만 했다. 이런 처참한 광경을 본 그는 포졸들이 약탈해간 자신의 가산을 돌려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며 관장에게 가산을 돌려줄 것을 청했다.

 

굶주림은 가장 견디기 어려운 엄숙한 진실이다. 먹어야 함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의 욕구이기도 하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증거자들은 이 절박한 원초적 본능의 욕구도 하느님 사람의 질서 안에서만 용납했다. 이 준엄한 순교자들의 모범이 있는 한 주님 사랑의 지서를 위반한 우리의 잘못을 합리화할 수 있는 어떠한 변명도 용납되지 못할 것이다. 다만 겸허한 자세의 회개가 있어야 할뿐이다.

 

관장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포졸들을 꾸짖고 가져간 물건들을 모두 가져오게 했다. 그는 돌려 받은 가산을 모두 갇혀있는 교우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그래서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옥에 갇혔던 교우들은 참혹한 처지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이 일이 있은 뒤 그는 포졸들에게 원망과 분노를 사 문초를 다할 때마다 더욱 가혹한 홀대를 받아야 했다. 가혹한 문초에도 굴하지 않은 김강이의 모습을 더욱 얄밉게 생각한 포졸들은 온갖 방법으로 괴롭혔지만 그는 의연히 이겨냈다.

 

5월에 시몬은 동생 타데오와 함께 살았던 강원도로 이송되어 원주감영으로 옮겨졌다. 여기서 몇몇 교우들을 만났는데 이들도 그와 함께 이웃하며 은밀히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이다. 원주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옥에 갇히게 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이들은 바로 강원도의 첫 증거자들이요 원주감영에 투옥된 최초의 신자들이다.

 

시몬은 이곳에서 자랑스러운 원주의 첫 증자로서 결연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원주감영의 형리들은 말로만 듣던 천주교 신자들의 의연한 자세와 부드러우면서도 강철보다 더 강한 의지를 직접 보고 놀라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공명심에 불타 모질고 거친 형벌로 신자들을 위협하며 심문하였다. 형리들의 심문이 모질수록 그는 더욱 굳건하고 결연한 태도를 보이며 모든 형벌과 유혹을 이겨냈다. 그러나 통탄스럽게도 고난을 함께 했던 타데오가 형벌을 이기지 못하고 변절하자, 형이 아우의 변절을 대신 갚기라도 하듯 더욱 준열함 신앙심관 인내를 보여 관장과 형리들을 감동시켰다.

 

이러한 김강이 시몬의 불굴의 의지를 보고 더 이상 회유할 필요가 없음을 깨닭은 관장은 그에게 사형선고가 내리도록 처리했다. 조정의 회시가 내려와 사형을 집행하려 할 때 그는 중병을 앓고 있었다. 관장은 중병을 앓고 있는 이를 사형시킬 수 없다며 집행을 연기했다. 그는 그토록 원하던 참수순교를 하지 모하고 다만 주님 섭리에 겸허하게 의탁하여 1815년 11월 5일 숨을 거두었다. 그는 60세를 넘긴 나이에, 옥에 갇힌 지 8개월만에 원주의 첫 증거자가 되었다.

 

[경향잡지, 1998년 5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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