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일 (토)
(홍)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강론자료

2015-0329.....주님의 수난성지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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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5-03-28 ㅣ No.1737

수난 성지주일 (나해)

마르코 11,1-10

2015. 3. 28~29. (-주일). 이태원

예루살렘 입성 기념식 후

예수님은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셨습니다. 예루살렘성이 우리가 들어와 있는 이태원성당에서 가깝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러한 전례를 거행하는 의미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구원을 간절히 기다렸던 사람들이 정신적인 지주로 생각했던 장소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구원을 실현하는 사람으로서 들어가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이 기대하던 구원자의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차이는 사람이 하느님을 대하는 자세와 하느님께서 사람을 대하는 자세가 다르다는 데서 발견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해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환호하는 데 사용할 나뭇가지를 준비하고, 마음이 담겼을 자세로 호산나 다윗의 자손, 히브리아이들이 올리브가지를 손에 들고 불렀다는 노래를 부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같은 노래를 부르면서도 예수님을 진정한 구원자로 대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사람마다 다른 입장을 얘기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인정하고, 어떤 분으로 받아들이면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을 사용합니까? 오늘 전례를 거행하면서, 그 옛날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했던 사람들의 공동체에 함께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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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가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를 읽고.

이사 50,4-7 필리피 2,6-11 마르코 14,1-15,47

2015. 3. 28~29. (-주일). 이태원

주제 : 수난기를 읽고 들으면서....

오늘은 꽤나 긴 말씀을 복음을 읽는 이 시간에 읽었습니다. 그 말씀의 성격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오늘 읽은 내용을 복음(福音)’이라고 부르는 대신에 주님의 수난기(受難記)라고 부릅니다.


인류에 구원의 빛이 되신 것을 전하는 수난기는 복음서에 4개가 있습니다. 전례력에 따라 마태오, 마르코, 루카의 수난기를 순서대로 읽고, 성주간에 있는 수난성금요일에는 해마다 요한복음사가가 전하는 수난기를 읽습니다. 오늘 읽고 들은 수난기말씀의 특징은 사제가 읽고서 복음말씀으로 선포한 것이 아니라, 몇몇 사람과 역할을 나누어 함께 읽었고, 그 내용도 삶에 희망과 지혜를 주는 것이 아니며, 예수님의 신체에 직접적으로 다가온 고통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전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해마다 맞이하는 전례이지만, 그 전례를 대하는 자세에 따라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느낌은 해마다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제가 하는 이 말을 들으면서, 지난해와 다르게 느끼는 것이 있어야 합니까? 저는 지난해와 별로 다르지 않은데요....하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는 때에, 신앙인이 가져야 할 올바른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그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은 수난기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내용에 관심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인류에게 구원의 빛이 되신 예수님을 해마다 진정으로 만나지 못해 안타깝다는 소리가 앞설 것입니다. 앞서 상상한 표현처럼, 신앙인으로서 수난성지주일에 읽는 수난기를 대하면서도 특별한 느낌을 느낄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신앙인으로 가져야 할 올바른 길에서 멀어져 있는 사람이라거나, 진정으로 자기 입으로 읽고 귀로 듣는 그 말씀을 들은 그대로 받아들이기 싫어서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좋은 의미는 아니지요?


사람이 드러낸 삶의 결과가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럴 때 말하는 좋은 결과라는 표현은 세상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명예나 권력이나 돈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입니다. 신앙을 말하는 입장에서, 우리에게 좋은 것이 생긴다는 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복음서에 나오는 수난기의 내용을 한 눈에 바라보면서, 복음서들마다 달리 전하는 그 수난기들의 내용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를 찾아내는 것은 이 시간에 할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학문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성경의 기록을 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시간에 가져야 할 자세는 연구의 자세가 아니라, 신앙의 자세이어야 합니다.


특정한 사람, 내 맘에 들지 않는 특징을 드러낸 사람을 향하여 시기심을 갖거나 그가 내 삶에서 사라져야 내가 누릴 세상의 삶이 편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갖는 자세이겠습니까? 그렇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들은 내 곁에서 얼마나 떨어져 지식으로 알아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수난을 전하는 내용을 듣고서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감정상의 변화가 있을 이유가 없는 그저 무덤덤한 상황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세상에 오셔서 그리도 힘든 길을 갔는지 이해하려는 입장일까요? 처음의 자세는 신앙인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마음에서 당연히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니, 권장할 만한 것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갖는 마음자세가 두 번째에 일치하거나 두 번째 가깝다면, 이 예수님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수난성지주일에 미리 생각할 요소는 아닙니다만, 예수님께서 보이신 이러한 행위를 하느님은 부활(復活)이라는 기상천외한 일로서 돌려주셨습니다. 우리가 부활하기 위해서 신앙인으로 사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보이신 일의 결과가 하느님께는 특별한 자세를 봉헌하는 것이었다고 깨닫고, 신앙인으로서 올바른 삶의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당신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보시고, 저희가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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