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6일 (일)
(녹) 연중 제11주일 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

강론자료

2015-0315.....사순 제4주일 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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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5-03-14 ㅣ No.1725

사순 제4주일 (나해)   

2역대 36,14-16.19-23       에페 2,4-10      요한 3,14-21

2015. 3. 15. 이태원.  

주제 : 내가 높여야 하는 것?

세상에서 우리가 높이고 싶은 것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높이고 싶어 할 것을 다른 표현으로 하면 더 많이 갖고 싶다는 것으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이러한 것들은 누군가가 알려주지 않아도 또 누군가에게서 배우지 않아도 그것을 얻을 방법을 우리는 잘 찾습니다. 그 일을 나쁘게 말하거나 나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아니지만, 세상의 삶이라는 것이 온통 남을 지배하고 남을 다스리겠다는 목표를 향해서 뛰어가고 있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게 달려가다가 삶에서 내가 소홀힌 한 것을 문제로 만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라고 느낀 것은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순간을 지나친 다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현실을 적절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대처하지 못해서, 작은 일들을 크게 만든 다음, 그것을 문제로 생각하고 그 다음에는 그것을 해결하는 일로 고생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올해 사순절의 네 번째 주일입니다. 주일의 개수를 세는 것이 중요한 일도 아니지만, 사순절은 6주일까지 있고 그 6주간 토요일의 저녁시간에 만나는 것이 부활대축일이라고 정해져있으니, 올해 사순절의 기간도 절반을 넘긴 시간입니다. 사순1주일이 되기 전에 이미 나흘을 지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나름대로 올해 사순절에는 실천할 목표를 세웠을 것이고, 그 목표에 얼마나 다가섰는지 돌이켜볼 때도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신앙인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각 개인이 만날 세상 삶의 끝 날에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고 영원한 생명과 더불어 살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예수님은 니코데모에게 하신 말씀에서 그 내용을 알려주십니다. 이 말이 들리던 순간에 사도요한이 바로 옆에서 받아쓴 것은 아니지만, 교회가 받아들인 삶의 정신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언젠가부터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개인의 생각이 더 옳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목표대신에 자신이 만든 것을 영원한 생명(?)에 버금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살이에 한계가 있는 존재가 영원한 생명(!)을 만들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였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을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문제라고 느낀 사람들이 적었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에서 들은 것과 같은 대화를 예수님과 한다면, 우리는 어떤 지혜를 발휘할 수 있을까요? 뛰어난 율법학자였고 산헤드린 의회의 의원이었던 니코데모처럼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차원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힐 사람으로 남을까요? 아니면 예수님에게 뭔가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이렇게 두 가지로 말할 때, 내 삶은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살던 많은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는 것이, 예수님께서 바라보신 현실에 대한 인식이었고 판단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다고 보신 예수님의 판단에 잘못은 없을까요? 2015, 현실에 사는 우리들의 삶을 보고 예수님께서 판단하신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실망하여 판단하신 그런 모습이 우리들의 삶에도 있는지, 어디에 잘 숨어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물론 시간의 차이로는 2000년이 넘으니 우리의 세상이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실 때보다 사람들이 더 현명해졌고 더 좋아진 것이 있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정말로 그런지 생각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어둠을 좋아했다고 판단될 행동을 했을 사람들이, 지금은 어둠이 아니라 빛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었다고 말하는 일은 생각처럼 갑자기 시작되거나 갑작스레 완성되는 일은 아닙니다. 현실이 이러하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과 그 안에 산다는 사람들, 또 신앙인들만이라도 어둠보다 빛을 더 사랑하게 만들 방법으로는 어떤 것이 있고 나는 그것을 내 삶에서 얼마나 드러내고 그것을 얼마나 가까이 대하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속이 시원하게 대답해주겠습니까?

사람은 세상에서 여러 가지 자세를 갖고 삽니다. 내가 세상에서 잘못된 자세를 드러내도 내 삶에는 좋은 일이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내가 범하는 잘못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나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깨끗한 사람과 똑같다고 우길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사람들의 눈에는 무사통과될지는 몰라도, 하느님의 눈에도 과연 똑같을까요?

역대기하권의 말씀은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난 다음, 조상들의 삶을 돌아본 역사가의 판단을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보다 먼저 살았을 과거의 사람들이 어땠을 거라고 보십니까? 내가 과거의 사람들을 생각하고 판단하는 모습은 훗날의 내 삶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입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은 키루스황제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히브리백성들에게 구원을 돌려주셨다고 했습니다. 놀랍고도 기쁜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그런 일을 하느님께 억지로 요구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요구한다고 해서 우리의 뜻대로 움직이실 하느님도 아닐 것입니다.

죄와 잘못을 완벽하게 우리의 삶에서 치워내지 못하면, 결국 그것은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옵니다. 우리를 하느님의 은총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구원에서 멀어지는 길이 마치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우리를 그곳으로 이끌고 그 안에 빠져 질식하도록 유혹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향하여 돌아서는 일에 늦지 않도록 우리들 각자는 자기의 삶을 정확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순4주일을 지내면서 우리가 하느님께 청할 은총은 무엇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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