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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기도] 기도 배움터: 본향으로 돌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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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26 ㅣ No.648

[기도 배움터] 본향으로 돌아가는 길



수도원에 입회하여 기도를 배울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그냥 그대로 계십시오”였다. 예전부터 “기도는 하느님께 마음을 들어 올리는 것”이라 배웠으므로, 노력하여 하느님께 도달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컸다. 그냥 있으라니 이 말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지 막막했는데, 기도시간에 뭉근하게 앉아 그냥 있는 시간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니, 그것이 무슨 뜻인지 나중에 알게 됐다. 처음에는 고요함의 맛을 알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내 영혼이 진실이 아닌 거짓과 환상에 얼마나 시달리는지를 알았다. 궁극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음을 알아챌 때, 하느님은 저 멀리 높이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계심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기도는 뭔가를 얻기 위해 많은 것을 참으며 삶을 억척스럽게 살아내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기도는 힘 들이지 않고,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충만감에 푹 젖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신다는 것을 의식할 필요가 있다. 베네딕도 수도회에서 전해지는 이야기 가운데 이런 교훈이 있다. “물의 본성은 유연하고 돌의 본성은 딱딱하다. 그럼에도 병에 물을 채워 돌 위에 걸어놓고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게 해두면 물은 돌에 구멍을 뚫는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말씀은 온유하고 우리 마음은 완고하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자주 들을 때 그들의 마음이 열려 하느님을 경외하게 된다”(조안 키티스터, 『내 가슴에 문을 열다』, 119쪽).

기도는 확실히 우리가 주관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 기도에 진입해 보면,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이 어지럽혀진 채 헤매지 않도록 우리를 불러, 당신 성령으로 영혼을 다시 하나로 모아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기도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우리는 하느님과 만나는 우리 안의 그 본향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조용히 머물 곳을 찾아 거기에 있기만 하면 된다. 아주 잠깐 활동을 멈추고 천천히 호흡을 하며 침잠해 가노라면, 뭔가 어수선했고 중심이 잡히지 않던 우리 영혼이 서서히 본래대로 돌아오는 것을 경험할 수가 있다.

우리 삶이 참 신비로워서, 어느 때는 순조롭다가도 어느 때는 하루 중에만 돌풍과 눈보라와 같은 사건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다. 미국 대평원의 농부들은 눈보라가 불어 닥칠 것 같은 조짐이 보이면, 당장 뛰어나가 얼마 되지 않는 거리임에도 자기 집 뒷문에서 헛간까지 밧줄을 맨다고 한다. 눈보라 때문에 뒷마당에서 집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잃고 헤매다가 얼어 죽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마다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한다. 우리의 일상도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기억해보라. 근심과 걱정으로 어수선해진 일상 또는 사고와 질병과 이별 등이 우리로 하여금 본래 가던 길에서 벗어나게 하거나 길에서 생명을 잃을 만큼 위험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우리는 앞이 캄캄하여 마음이 무너져도 본래의 길을 찾도록 인도되었기에, 결국 영혼의 본향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던 일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와 관련한 예로 구약성경에 나오는 욥의 기도를 들 수 있다. 욥은 신심이 깊고 가정과 사회생활에 충실하였으나, 아무 죄도 없이 고통을 겪는다. 그럼에도 욥은 순탄하던 때와 똑같이 성실하게 기도를 한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욥 1,21; 2,10 참조). 그런데 병문안을 온 친구들과 함께 7일간 침묵 속에 지내던 욥의 기도가 돌변한다. 이를 테면 그의 기도는 이렇게 요약된다. “주님, 저는 지금 너무 아픕니다. 저에게 낯선 이런 상황이 몹시 견디기 어렵고 싫습니다. 주님, 제 생명의 주인이며 영의 인도자시라면 저를 어떻게 좀 해주십시오. 무엇보다 제가 불행의 나락에 떨어지고 보니 당신이 전과 달리 너무 이상하게만 보입니다. 주님, 당신께서 처음에 보여주신 그 모습으로 다시 정체를 나타내 보여 주십시오!” 예기치 않은 불행한 여정을 걷는 동안 욥의 기도가 변화한 것인데, 이전까지와는 사뭇 다른 기도가 그의 뱃속에서 올라온 것이다. 곧 삶의 역풍을 만나 재산과 가족을 모두 잃고, 설상가상 불치의 병까지 얻은 가난한 순간에 드리는 그의 기도는 길을 포기하지 않고 본향으로 돌아가는 진정성 있는 기도였다. 궁극적으로 욥은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욥 19,26) 하며 하느님을 한 번도 떠나지 않는다.

우리가 기도하는 동안 자신의 내면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을 여러 번 하다보면 기도는 점점 더 즐거워지기 마련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듣게 되면 손에 쥐려고만 하는 일상의 삶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피정 때 조용히 침잠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니, 세상 모든 것이 다 하찮게 여겨지지 않았는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 안에서 비로소 손에 꼭 쥐고 있던 것을 스르르 놓게 되지 않았는가? 이때가 바로 기도의 중심을 찾은 때이다. 이 중심에 이를 때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습관적으로 ‘결핍감’이라는 환상, 곧 항상 부족하다는 망상에 시달렸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일상생활 가운데 잠시 고요함을 찾고 거기서 하느님과 함께 지냄으로써, 우리가 할 일은 ‘내려놓음’밖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명확해지는지! 그러므로 기도를 할 때면 세상의 상업주의가 떠들어대는 풍요로움은 대부분 망상과 현혹으로 보이는 반면, 풍요를 약속하시는 하느님의 약속은 장차 일어날 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 이루어지는 현실로서 누리게 된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미태 6,5-6).

* 이명기 수녀는 1986년 성심수녀회 입회, 첫서원 후 성심여고에서 교육사도직 수행, 종신서원 후 가톨릭대학교 종교학과대학원에서 문학박사 취득, 2006년부터 현재까지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에서 기초교양필수과목인 ‘인간학’과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외침, 2014년 12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글 이명기 수녀(성심회, 가톨릭대 성심교정 ELP학부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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