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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새로운 복자: 강완숙 골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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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1-18 ㅣ No.1404

[새로운 복자] 강완숙 골룸바 (1) 여회장 중의 여회장



성직자 영입에 중추적 역할을 했던 삼총사(윤유일, 최인길, 지황) 와 더불어 어농성지에서 현양하는 여성회장이 있었으니, 바로 복자 강완숙(골룸바)입니다.

강 골룸바는 1760년 충청도 내포 지방에서 양반의 서녀(庶女)로 태어납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지혜롭고 정직하여 옳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장한 강 골룸바는 덕산 지방에 사는 홍지영과 혼인(후처)하고, 얼마 안 되어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됩니다. 그녀는 처음에 불교에 귀의해 인생의 의미를 깨달으려 했으나, 그 가르침에 허무를 느끼던 중 ‘천주실의’를 읽게 됩니다. 이를 통해 신앙의 위대함을 깨닫게 된 강 골룸바는 “천주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고, 그 종교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올바르니 그 도리가 반드시 참될 것이다.”라고 믿으며 참 신앙인이 되어갑니다. 그녀는 세례를 받기 전에 이미 천주교 신앙에 대한 열정과 극기를 바탕으로 교리를 실천했으며, 그런 그녀의 행동은 누구나 감탄하게 됩니다. 특히 1791년 신해박해 때에는 세례를 받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신자들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자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등 정성을 다해 돌봅니다. 그러다 발각되어 도리어 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강 골룸바는 곧 풀려났지만, 평소 그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입교를 거부하던 남편 홍지영이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 강 골룸바를 쫓아냅니다. 두터운 신앙을 가졌던 강완숙은 시어머니와 아들 홍필주(필립보, 2014년 시복)와 의논한 뒤, 교리가 밝다는 한양으로 함께 이사합니다. 쫓겨나는 며느리와 함께 아들 집을 떠나는 시어머니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녀의 인격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서울로 이주한 그녀는 신자들과 왕래하면서 전교에 힘썼으며, 특별히 성직자 영입 운동이 시작되자 이를 위해 노력하는 교우들에게 경제적으로 뒷받침이 되어 줍니다.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그녀는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그를 도와 활동합니다. 이때 주문모 신부는 그녀의 인품을 알아차리고 여회장으로 임명하여 신자들을 돌보도록 합니다.

그녀는 행실이 정숙하고 마음이 바르고 굳었으며, 자신이 배우고 익힌 교리를 엄중하게 실천하면서 여성회장의 직무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쳤습니다. 또한,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때에 그들의 마음을 신앙의 기쁨으로 가득 채웠으며,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를 정확히 알려주었습니다. 여성 교우뿐만 아니라, 남성 교우도 강 골룸바 회장의 교화에 감동을 받고 신앙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믿는 신앙의 가치를 세상에 알리고 그 가치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남녀노소,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전교에 전념하였습니다. 순교자 황사영은 ‘조선교회를 위해 노력한 사람 중 남녀를 통틀어 강 골룸바를 당할 사람이 없다’라고 <백서>에 서술할 정도였습니다. 한마디로 그녀는 한국천주교회 ‘여회장 중의 여회장, 여장부 중의 여장부’로서 우리에게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며 참 신앙인의 향기를 전해줍니다. [2014년 11월 16일 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 수원주보 4면, 최인각 바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새로운 복자] 강완숙 골룸바 (2) 여장부 중의 여장부



신앙인으로서, 여성회장으로서 참 모범을 보여주던 강완숙(골룸바)는 박해를 마주하자 그의 여장부다운 모습을 확실히 보여줍니다. 1795년 을묘박해(주문모 신부를 체포하려다 놓친 사건을 계기로 야기된 박해)가 일어났으며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도 박해의 두려움에 떨던 그 시기에, 강 골룸바 회장은 두려움 없이 자신의 집에 주문모 신부를 정성껏 모십니다. 처음에는 함께 사는 시어머니와 아들도 모르게 자신의 집 광에 신부님을 모시다가, 얼마 후 시어머니와 아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무려 6년간을 모십니다.

주문모 신부에 대한 수배령이 내려져 있는 중에도, 강 골룸바 회장은 신부님께서 신자들도 만나고 성사도 집전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합니다. 또한, 신앙 공동체가 성장하도록 활력을 불어넣어 주며, 교회 공동체와 성직자를 지켜냅니다. 그녀는 공동체와 신부님의 안전을 위해 자주 이사를 하는데, 여성이 주인으로 있는 양반 집은 관헌이 들어가 수색할 수 없던 당시 조선 사회의 풍습을 활용합니다. 이때 강 골룸바 회장은 불행한 여성들, 미혼 여성들, 특히 동정을 추구하며 천주님께 봉헌된 삶을 원하는 이들을 자기 집에 모아 함께 기도하며 지냅니다. 그 대표적인 동정녀가 윤점혜(아가타, 2014년 시복)입니다.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한국 최초 수도원의 원형을 보여줍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강 골룸바는 주문모 신부를 다른 곳으로 피신시킨 후 집을 지키다가 함께 있던 교우들과 함께 체포됩니다. 박해자들은 강 골룸바로부터 주문모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3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강 골룸바는 신심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함께 갇혀 있는 동료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며 순교의 길로 나아갑니다. 그녀는 온갖 고문을 받으면서도 포졸들이 지칠 때까지 교리를 설명하였고, 그녀의 이러한 모습을 본 형리들조차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 “유일무이(唯一無二)의 여인이다”라며 감탄했다고 합니다.

1811년 조선 신자들이 북경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 강 골룸바의 순교 상황이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강완숙은 형장으로 끌려가는 수레 위에서 기쁨에 넘친 얼굴을 하고는 흥겨운 목소리로 기도하였고, 사형을 당하는 순간이 오자 사형 집행관을 향하여 고개를 돌리고 ‘법대로 하자면 마땅히 옷을 벗고 형을 받아야 하겠지만, 저희는 부녀자들이니 부디 당관께 속히 아뢰어 저희가 옷을 입고 죽을 수 있게 해주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허락을 받고 동료들과 서로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는,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 목을 내밀어 형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삶과 신앙과 순교 앞에서 제 삶을 돌아보며 옷깃을 여며봅니다. [2014년 12월 7일 대림 제2주일(인권주일) 수원주보 4면, 최인각 바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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