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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문헌ㅣ메시지

요한 바오로 2세의 교황교서: 구원에 이르는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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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27 ㅣ No.344

[문헌 풀어 읽기] 요한 바오로 2세의 교황교서 “구원에 이르는 고통”

 

 

사람은 누구나 고통 없이 살기를 바란다. 하지만 누구도 고통을 피하지 못한다. 기쁨과 행복은 더러 노력하는 이들에게 주어지기도 하지만 고통은 의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까닭이다. 인간이 유일하게 평등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고통이다.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요즘도 이 사실 하나만은 변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인간이 이 지구상에 살아남아 있는 한 영원히 변치 않을 진리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러면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극복할 수 있을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서 “구원에 이르는 고통”(1984년)의 가르침을 통해 고통의 의미와 해결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자.

 

 

고통의 형태는 달라도

 

고통은 받아들이는 이들의 태도에 따라 저주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구원의 통로가 되기도 한다. 두 가지 예를 들어보려고 한다. 먼저 지난 연말에 본 성탄특집 다큐멘터리이다. 이 프로에는 ‘살인을 저지른 자식’을 둔 부모와 ‘자녀가 살해를 당한’ 부모들이 일 년에 한 번씩 모여 서로 격려하는 모임의 과정이 담겨있다.

 

이 다큐에는 두 가지 유형의 부모와 가족이 나온다. 먼저 자식을 죽인 살인자를 증오하면서 자신을 학대하거나 끝내 고통 속에서 목숨을 끊은 이들이다. 다른 한편에는 살인자에 대한 증오, 자식에 대한 회한, 상실감을 신앙으로 이겨내고 용서에 이른 이들도 있다. 나도 자식을 키우는 부모이다 보니 쉽게 용서를 택할 것이라 장담하지 못한다. 그런 나에게 고통의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용서’를 선택한 부모들의 모습은 감동적이다 못해 거룩해 보였다.

 

또 하나, 요즘은 이십대와 삼십대가 참 살기 어려운 시대이다.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고, 설사 일자리를 잡아도 저임금이라 미래를 기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보사회의 기술적 혁신과 자본의 포악한 이기심이 빚어낸 이러한 현실은 당분간 해결되기 어려울 전망이다. 이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어떤 젊은이들은 범죄의 유혹에 빠지거나 자살을 선택한다. 그러나 어떤 젊은이들은 밝고 긍정적인 사고로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 낸다.

 

이 외에도 해양오염으로 순식간에 삶의 자리를 잃어버린 태안 어민들의 고통, 타국에서 자식과 가족을 잃은 이천 화재참사 희생자들의 고통, 여전히 정치 불안과 폭력으로 고통당하는 수많은 나라 수많은 이들의 고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고통 가운데서 고귀함을 잃지 않는 모습들도 발견할 수 있다. 고통의 형태는 달라졌을지 몰라도 고통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는 시대, 민족, 문화의 차이를 넘어 같은 것이다.

 


고통의 여러 가지 유형

 

이러한 고통에 대하여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음과 같은 지혜를 주고 있다. 먼저 우리가 겪는 고통에는 ‘회개를 촉구하는 부르심’, 곧 ‘하느님의 자비’를 일깨워주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12항). 이 고통에는 “회개시켜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내포되어 있고, … 인간 안에 갖가지 형태로 존재하는 악을 극복하게 하려는 목적”(12항)이 있다는 것이다. 부모님의 회초리와 같은 고통인 셈이다. 이러한 고통은 탓하기보다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깊이 통회할 때 극복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덕행의 소명’ 이른바 ‘인내의 덕’을 키워주려는 고통이다(23항). 요즘 많은 젊은이들에게 유용한 가르침이다. 고통은 인내를 가르쳐주고 고통을 통해 배운 인내는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 고통을 어떤 자세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누구는 찌들고, 누구는 자신을 보석으로 만들기도 한다.

 

세 번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특히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나’라는 몰아적인 선물을 내어주고자 존재” 하는 고통이다. 고통 덕분에 인간은 마음과 행동의 자극을 받아 자신을 초월하는 사랑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29항).

 

결혼하기 전 다니던 성당에서 같이 청년활동을 하던 자매가 거의 누워 지내는 장애우와 결혼하겠다고 결심하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태안으로 달려가 봉사하는 만 명 이상의 자원봉사자들도 이런 고통에 응답한 분들일 것이다.

 

네 번째는, 순교자들과 그리스도의 증거자,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서도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고통을 겪고 목숨을 바치는 이들이 겪는 고통이다(22항). 이른바 남을 위해 대신 겪는 고통이다. 이 고통은 인간이 정신적으로 위대하고, 영적 깊이를 가진 고귀한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준다. 우리 역사 안에서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 민족을 위해 살신성인하였던 많은 조상들이 바로 그런 분들이다. 이 가르침에는 속하지 않지만 인간을 넘어 다른 피조물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삼았던 지율 스님 같은 분들의 고통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섯 번째는 욥의 고통처럼 ‘시험’(11항)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자녀들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홀로 설 수 있도록 안타까운 마음으로 고통을 겪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유를 알 까닭이 없는 당사자는 부모와 사랑하는 사람을 원망하게 마련이다. 긴 시간이 지나야 자신보다 더 고통스러웠을 그분 또는 그/그녀의 사랑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통의 정점에 있는 구세주의 ‘구속적 고통’, 곧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에게 베풀어진 하느님 구원 능력의 역사하심에 특별히 민감해지는 것, 특별히 거기에 마음을 열어놓는 것이다(23항).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는 고통이다”(24항). 신앙인으로 살면서 겪게 되는 모든 어려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고통을 통해 발견하는 기쁨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고통을 열거하면서이 고통의 본질을 통찰하고 그에 대한 인간의 고귀한 선택을 요청하고 있다. 사실 많은 이들은 고통이 무의미하고 쓸데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불편하고,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악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웃 심지어 하느님에게까지 저주를 퍼붓는다.

 

흥미 있는 사실은 고통을 그렇게 저주하는 이들은 모두 예외 없이 고통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반면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으로 그 고통을 받아들여 심연까지 내려간 이들은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하느님이신 구세주께서 몸소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이셔서 궁극에 부활의 기쁨을 누리신 것처럼 말이다.

 

해방을 넘어 구원에까지 이르려면 반드시 그리스도와 결합되어야 한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이 고통을 이겨낼 수 없는 까닭이다. 이것이 모든 고통에 필연적으로 구원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와의 결합에서 고통의 구원적 의미를 발견하게 되면(고통에 대한) 우울한 느낌이 변형된다.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고 있다는 믿음과 더불어 고통 중의 인간 자신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고 있다.’는 확신이 생겨난다”(27항).

 

* 박문수 프란치스코 - 평신도 신학자.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경향잡지, 2008년 2월호, 박문수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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