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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마리아 프룩투오사 게르스트마이어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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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4-25 ㅣ No.1023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마리아 프룩투오사 게르스트마이어 수녀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원산 수녀원 소속, 1898년 2월 4일 생, 독일 로텐부르크 교구 출신
세례명 : 마리아
첫서원 : 1923년 2월 2일
한국 파견 : 1926년 9월 4일
소임 : 원산 ‘마리아의 도움’ 시약소 책임 간호사
체포 일자 및 장소 : 1949년 5월 11일, 원산 수녀원
순교 일자 및 장소 : 1952년 9월 16일, 옥사덕 수용소


마리아 프룩투오사 게르스트마이어(Maria Fructuosa Gerstmayer, 1898-1952) 수녀는 1898년 2월 4일 독일 로텐부르크(Rottenburg) 교구 바인가르텐(Weingarten)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막스 게르스트마이어(Max Gerstmayer)와 율리아나 게르스트마이어(Juliana Gerstmayer)의 넷째 딸로 태어나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의 부모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며, 슬하에 10명이 넘는 자녀를 두었다. 그는 충실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형제간에 화목하고 평화로운 가정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성격이 밝고 마음씨가 고왔다. 이미 8살 때 앞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모르는 어린이들에게 선교하러 가고 싶다는 희망을 밝힐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다.

1921년 3월 1일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에 입회하여 마리아 프룩투오사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마리아 프룩투오사 수녀는 순수했고 언제든지 남을 도와줄 준비가 된 사람이었으며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1923년 2월 2일 툿찡 모원에서 첫서원을 발했고 1926년 9월 4일 원산 수녀원으로 선교 파견되었다. 원산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리아의 도움’ 시약소의 책임 간호사로 임명되었다.

마리아의 도움 시약소에서는 매일 60명에서 80명의 환자들이 치료를 받았다. 마리아 프룩투오사 수녀는 시약소로 찾아오는 환자들뿐 아니라 가난한 동네에 있는 환자들을 찾아다니며 치료하였으므로, 원산 인근에서 그의 이름을 모른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죽어가는 어린이나 병자들에게 열성을 다해 대세를 베풀었는데, 그 수는 적어도 5,000여 명에 이르렀다.

마리아 프룩투오사 수녀는 언어에 소질이 없어서 환자들을 상대할 때도 말이 별로 없었지만, 언제나 평화로운 미소를 잃지 않고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기도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해나갔다. 주일에는 성체 앞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비신자들 그리고 무신론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도 위급한 환자가 생겼다는 연락을 받으면 망설임이나 불평없이 달려가 최선을 다해 환자들을 돌보았다.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면서 두 번이나 티푸스를 앓았고 그로 인해 청각에 손상을 입었으나, 23년 동안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위해 묵묵히 봉사했다.

8.15 광복 후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이 북한에서 득세했다. 곧이어 공산정권이 들어섰으나 원산 수녀원 수녀들은 삼엄한 통제와 갖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선교활동을 계속했다. 마리아 프룩투오사 수녀의 활동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눈엣가시였으나 원산에서 워낙 알려진 인물이라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1949년 5월 10일 원산 수녀원을 들이닥친 정치보위부원들은 그를 비롯한 12명의 독일인 수녀들을 체포하여 평양 인민교화소로 이송했다. 그 후 각 분원에서 체포된 독일인 수녀들과 함께 교화소에 갇혀 있다가 8월 5일 자강도(慈江道) 전천군(前川郡)에 위치한 옥사덕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마리아 프룩투오사 수녀는 처음에 수용소 주방에 배치되었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18시간동안 주방에서 무를 씻어 잘랐으며 맷돌에 옥수수를 갈거나 수용소 동료들이 작업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부족한 음식을 보충하려고 가져온 산나물, 달래, 버섯을 다듬었다. 평양 인민교화소에서 이미 설사와 수종을 앓았으며 수용소 생활을 하는 동안에 한 번도 완전히 건강을 회복한 적이 없었다. 1951년 심하지 않은 뇌일혈을 일으켜 병자성사를 받은 후에 점차로 회복되고 있었지만 어려운 일을 할 수 없어서 바느질 방으로 옮겼다. 푸른 군복을 입고 부은 다리를 뻗고 앉아 바느질을 했으며, 무릎 위에는 열린 안경집이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는 예수 성심 상본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밤늦게까지 관솔불을 켜놓고
동료 수도형제들의 떨어진 옷가지들을 수선하면서 과다한 작업을 했다. 병은 차도가 없었고 동료들이 그를 방바닥에 눕히고 임종을 준비시키자 그는 다시 뇌일혈을 일으켰으며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마리아 푸룩투오사 수녀는 1952년 9월 15일 밤에 매우 평화롭게 사망했으며 옥사덕 수용소 묘지에 묻혔다.

* 자료출처 -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원산수녀원사(포교 성베네딕도 수녀회, 1988년), 북한에서의 시련(분도출판사, 1997년), 芬道通史(분도출판 사, 2010년)

[분도, 2012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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