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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현대세계 안에서 봉헌생활의 의미와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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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1-06 ㅣ No.21

현대세계 안에서 봉헌생활의 의미와 영성

 

 

들어가는 글

 

지난 20세기 중반에 교회는 현대사회에서 인류에 대한 교회의 역할과 정체성을 추구하고자 공의회를 열어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고 현대세계와 보조를 맞추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이다. 당시 교회가 세상과 더불어 순례의 길을 걷고자 했던 공의회의 정신은 교회 자신과 세상에 새로운 활력을 주면서 현대사회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런데 삼천년기를 맞는 현대세계는 인터넷과 정보화 시대로 불리면서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그러나 기술의 혁신과 과학, 공학, 의학 등의 놀라운 발전으로 문명적인 이기는 앞서가는 데 반해 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철학이나 신학, 윤리, 그리고 정신문화는 거의 제자리에 머물며 정신세계와 물질세계의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하게 되었다. 

 

한편 냉전체제의 종식 이후, 새로운 세계질서 안에서 평화에 대한 기대를 걸었던 인류는 경찰국가를 자처하는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에 저항하는 세력에 의해 9?11테러라는 끔찍한 사건을 경험했다. 이후 지금 세계는 다시 전쟁과 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우리는 미래의 전망에 대한 심각한 불안을 느끼고 있다. 이런 현대세계에서 과연 교회는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며, 교회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봉헌생활은 어떻게 새로운 세계에 대처하면서 현대사회에 기여할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교회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성찰로 내어놓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권고 「봉헌생활」과 교황청 수도회성 훈령 「그리스도에게서 새롭게 출발 : 제삼천년기 봉헌생활의 새로운 투신」(아래에서는 「그리스도에게서 새롭게 출발」로 약칭)을 중심으로 현대사회 안에서 봉헌생활의 의미와 영성, 그리고 앞으로의 전망을 살펴보고자 한다.

 

 

봉헌생활의 의미와 다양성

 

봉헌생활이란 궁극적으로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자신을 그분께 바치는 사람들의 삶을 일컫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의 봉헌생활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밑바탕을 이루는 공통적인 원동력은 특별한 삶으로 부르시는 그분께 대한 사랑이다. 봉헌생활에 불림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이 사랑으로 그 고유하고 독특한 삶으로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자신을 내어맡긴다. 

 

성자께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이래, 어느 시대에나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자신을 사랑이신 하느님께 봉헌하려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어왔으며, 교회는 다양한 은사와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단체와 개인들을 통해 풍성한 은총을 누려왔다. 

 

세계 주교대의원회의는 봉헌생활이 교회의 생활과 성덕과 사명의 내밀한 부분이며, 지난 교회의 역사 안에서 그랬듯이 현재와 미래의 하느님 백성에게 필수적이고 귀중한 은혜라는 것을 강조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봉헌생활」에서 봉헌생활이란 단순히 수도생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가 존재하고 각기 그 고유성이 있음을 언급하였다. 「봉헌생활」은 다양한 형태의 봉헌생활을 다음과 같이 나누어 각기 고유한 은사와 삶의 형태를 존중하고 있다. 

 

1) 동방과 서방 교회의 수도생활

 

동방 가톨릭 교회의 시노드 교부들과 동방의 다른 교회 대표자들은 그리스도교 초기에 대두된 수도생활의 복음적 가치를 강조했다. 하느님께 대한 열망과 세상과 삶 자체를 변모시키려는 열망에서, 동방의 수도생활은 회개, 자기 부정, 참회, 내적 평화의 추구, 기도와 단식, 자기 자신과 소유의 봉헌 등을 통해 수도원의 친교 안에서 또는 은수자의 고독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었다.

 

서방교회 또한 첫 세기부터 공동생활과 은수생활 등 매우 다양한 표현의 수도생활을 체험했다. 특히 베네딕토 성인의 영향을 받아 현재의 형태를 갖춘 서방의 수도생활은 세속의 삶을 버리고 하느님을 추구하며 그분께 자신을 봉헌하였던 수많은 수도자들의 유산이다. 

 

2) 동정녀회, 은수자들과 과부들

 

고대로부터 이어온 동정녀회가 우리 시대에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교구장 주교에 의해 봉헌된 이 여성들은 교회와 특별한 유대를 가지며, 세상에 머물며 교회 봉사에 헌신한다.

 

수도회에 소속되어 있거나 주교에게 직접 예속되어 있는 남녀 은수자들은 내외적으로 세상과 격리됨으로써 덧없이 지나가는 현세의 본질을 증언하고 있다.

 

사도 시대부터 알려져온 과부들의 봉헌도 오늘날까지 실천되고 있다. 이들은 종신서원을 통해 교회 봉사와 기도에 자신을 봉헌한다. 

 

3) 관상에 전념하는 수도단체들

 

오로지 관상에 전념하는 수도단체들은 교회의 자랑이자 천상 은총의 근원이다. 그들은 고독과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개인의 수덕, 기도, 극기, 형제애의 친교 안에서 삶 전체와 모든 활동을 하느님께 대한 관상으로 향하게 한다. 관상생활은 그리스도교의 수덕생활과 신비주의 전통의 유효성에 대한 증거를 보여줄 수 있고 또 종교 간의 대화에도 기여할 것이다. 

 

4) 사도적 수도생활

 

각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각각의 은사에 따라 공동생활 안에서 사도적 봉사를 하고자 서원을 통해 자신들을 하느님께 봉헌하고자 했다. 이리하여 율수수도회, 탁발수도회, 성직수도회의 여러 수족들이 생겨났으며, 남녀 수도회들(religious congregations)이 사도직과 선교활동에 그리고 그리스도교적 사랑에 따른 수많은 활동에 헌신해 왔다.

 

5) 재속회

 

재속회(secular institutes) 회원들은 세속의 현실 한가운데서 복음 권고의 선서를 통하여 세상에서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세상 안에서 그들 고유의 조화로운 현존과 봉헌을 통하여 사회 안에 그리스도 왕국의 새로움과 그 힘을 현존하게 한다.

 

성직 재속회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들은 그들이 속한 재속회의 영성적 부요 안에서 사제직 고유의 영성을 더욱 깊이 생활화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발견하게 되고 동료 성직자들 사이에서 사도적 헌신과 친교의 누룩이 될 수 있다.

 

6) 사도생활단

 

사도생활단(societies of apostolic life) 또는 공동생활 단체들은 저마다 특유한 방식으로 특수한 사도적 목적이나 선교 목적을 추구한다. 이 단체들에서는 교회가 인정하는 거룩한 유대를 통해 복음 권고에 대한 명시적 서약이 이루어진다. 그들 봉헌의 특수한 성격은 수도회나 재속회와 구별된다. 

 

「봉헌생활」은 위와 같이 다양한 형태의 봉헌생활이 있어왔고 또한 새롭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언급하면서 현대세계에서도 주님께 자신을 바치는 봉헌, 그리고 사도적 공동체의 이상과 창립의 은사들은 매력적인 소명임을 알려준다.

 

이렇게 다양한 봉헌생활을 일치시켜 주는 끈은 바로 봉헌생활로 부르시는 그분께 대한 사랑이고, 그 사랑 안에서 정결, 청빈, 순명의 주님을 따르라는 부르심이다. 그 부르심은 각 단체나 개인의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봉헌생활의 영성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봉헌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삶은 그 삶 자체를 그리스도께 봉헌하는 더 근원적인 투신의 삶이기에 늘 새롭게 성장시켜 나가야 한다. 봉헌생활은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삶의 양식에서 각 봉헌생활의 설립자들의 고유하고 독특한 체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은사를 통해 보편적인 그리스도교 영성 안에서도 각기 고유하고 특별한 영성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봉헌생활자들은 그들이 따르는 설립자들이 체험한 성령 체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영성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발전시키고 시대의 징표를 읽으면서 새롭게 쇄신하고 적용시켜 나가야 한다. 성령께서는 구체적인 시대와 장소 안에서 늘 새로운 창조활동을 계속해 나가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게서 새롭게 출발」은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을 새롭게 발견하고 하느님과 인류에 대한 사랑을 불태우며 우리가 받은 은사를 새롭게 이해하도록 이끄시는 성령께 우리 자신을 맡겨드려야 한다.”라고 언급하면서 봉헌의 영성적 의미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데 도움을 줄 영적 쇄신을 강조하고 있다. 「봉헌생활」과 「그리스도에게서 출발」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영성생활의 핵심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

 

모든 봉헌생활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있다. 「그리스도에게서 새롭게 출발」에서는 각각의 봉헌생활이 설립자들의 영성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며, 새롭게 쇄신하고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고 적용시켜 나가는 데, 새롭게 시작하여야 하는 출발점은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천명하고 있다. 역사상 모든 신분과 문화의 사람들도 부르심을 입어 성령으로 봉헌된 삶을 살 때 바로 그리스도에게서 출발하였다. 오늘날도 예외일 수 없다. 

 

그리스도에게서 새롭게 출발한다는 의미는 처음에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성령에 의해 이끄심을 받은 그 감동의 불꽃을 새롭게 발견하면서 그분의 사랑에 응답해 나간다는 뜻이다. 그분의 사랑을 감지할 때 우리는 봉헌생활을 쇄신하고 사도직 활동을 새롭게 개척해 나갈 수 있는 능력과 창의력을 지니게 된다. 

 

「새천년기」는 우리에게 봉헌생활이 부르심을 받은 길로 나아가려면 그 어느 때보다도 그리스도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분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얼굴을 구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성사 안에, 특별히 성찬례 안에 현존하신다. 한편, 우리는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보잘것없고 가난한 사람들, 병자들, 고통받는 사람들 안에 그분께서 계신다. 

 

오늘날에는 특히 현대사회가 낳은 새로운 물질적 도덕적 영성적 가난과 같이 새로운 모습의 가난과 고통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한 모습 속에서 우리는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고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 봉헌생활자들은 언제나 십자가 위에서 죄를 짊어지신 그리스도와 같은 소명을 지니고 그분처럼 세상의 고통과 죄를 짊어지고 그것들을 사랑으로 없애야 한다. 

 

2) 친교와 일치의 영성

 

「봉헌생활」에서는 “봉헌된 사람들은 하느님 계획 안에서 인류 역사의 정점인 일치의 증거자들과 설계자로서 친교의 참 전문가들이 되어 친교의 영성을 실천하여야 한다.”라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일치와 친교를 위한 봉헌생활자들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봉헌생활」은 오늘날 봉헌생활자들의 임무 가운데 하나가 “특히 인종 간의 증오와 무분별한 폭력으로 찢겨진 오늘의 세계에서 마음을 터놓고 사랑의 대화를 계속함으로써 먼저 그들의 내적 생활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밖으로까지 친교의 영성을 전파하는 것”임을 일깨워준다.

 

친교의 영성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새천년기」를 통해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친교의 영성은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한 마음의 관상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우리 주위의 형제자매들의 얼굴에서 빛나는 삼위일체의 빛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현대세계는 점점 더 하나의 지구촌을 이루어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어 봉헌생활자들은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향한 노력을 경주하여야 한다. 민족들, 인종들, 문화들 가운데 친교의식을 증언하도록 부름받고 있는 다문화 국제 공동체를 이루는 봉헌생활자들은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보편성과 고유성을 증언하는 동시에 통합과 토착화의 과제를 안고 더욱 깊은 친교의 장을 마련하여야 할 것이다.

 

봉헌생활자들은 그들의 단체 안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수도회나 다른 형태의 봉헌생활과 친교를 맺는 데에 마음을 열고 서로 은사를 교환하고 대화를 나눔으로써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교회로서의 친교와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봉헌생활자들 사이의 친교와 일치의 경험은 교회의 다른 구성원, 구체적으로 교계제도 안에 있는 주교들과 성직자들, 그리고 평신도들과도 협력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더욱 풍성하게 할 수 있다.

 

3) 나눔과 섬김의 영성

 

「새천년기」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제 막 시작한 이 세계와 천년기는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까지 사랑을 베풀 수 있는지 더욱 분명히 알아야 한다.”라고 말함으로써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교회에 요구하고 구체적인 나눔과 섬김의 영성을 제시하였다. 봉헌생활자들도 이러한 우선적 선택을 통하여 하느님 사랑의 본질과 그분의 섭리와 자비를 증언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연대의 정신으로 평화와 비폭력을 위해 투신하여야 하며, 구체적으로 현대의 비인간화로 고통받고 있는 가난한 이들, 노인들, 약물 중독자들, 에이즈 환자들, 외국인 노동자들과 하나가 되어 그들의 처지에서 이해하고, 상황에 알맞은 구체적인 사랑의 봉사를 하여야 한다.

 

「봉헌생활」은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것은 복음화 활동인 동시에 복음의 진정성에 대한 확인이며, 봉헌생활에서 항구한 회심을 일으키는 촉매제”라고 한다. 또한 「봉헌생활」은 병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배려를 지닐 것을 촉구하며 많은 봉헌된 사람들이 그들 수도회의 은사에 따라 보건 분야에서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고, 지난 수세기에 걸쳐 봉헌된 많은 사람들이 전염병 희생자들을 돌보는 데 생명을 바쳤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이런 헌신이 바로 봉헌생활의 예언자적 특성이라고 하면서, 특히 병자들과 고통받는 자들에 대한 봉사를 특별한 은사로 받은 봉헌생활자들은 병자들에 대한 사랑의 증거를 계속하되, 병자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 곧 노인들, 장애인들, 소외된 이들, 임종자들, 마약 중독자들, 에이즈 등의 새로운 전염병의 희생자들을 위해 헌신할 것을 촉구했다.

 

 

현대세계 안에서 봉헌생활의 의의와 전망

 

「봉헌생활」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봉헌생활에 대한 서약을 하지 않더라도 사랑과 복음화의 영역에서 할 수 있는 시급한 일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하필이면 왜 이러한 생활을 해야 하는가?”라는 많은 사람들의 물음에 대해 분명한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교황은 요한 복음 12장의 ‘베다니아의 향유 이야기’에서 “이 여자 일에 참견하지 마라!(7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봉헌생활의 타당성을 묻는 질문에 유효한 답변이라고 말한다. 순수한 사랑의 행위로 쏟아부은 마리아의 향유는 가없는 헌신과 봉헌의 표징이다. 

 

교황은 “수도자가 없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는 물음을 던지면서 봉헌생활은 바로 그 가없는 헌신과 사랑 때문에 유용성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봉헌생활과 같은 구체적인 표징이 없을 때 교회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는 사랑은 식고, 세상에서 신앙의 ‘소금’은 맛을 잃게 된다. 봉헌생활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증언하는 삶의 형태로서 형제적 사랑과 일치를 통해 교회 안에서 눈에 보이는 하느님 백성의 표징이 된다. 

 

그런데 과연 이와 같은 봉헌생활이 오늘날 급격한 사회변화와 개인주의와 물질만능주의의 사조에서 아무 어려움 없이 교회 안에 일치의 표징으로 존속해 나갈 수 있는지 의문을 표명하는 사람들이 많다.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는 봉헌생활자들의 수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미래에 대한 어두운 전망을 내놓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일부 지역교회에서는 수도회들의 사도직 활동과 그 현존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사도직의 재평가가 필요한 수도회들도 있고, 본래의 은사를 현대 상황에 어떻게 적용시키고 쇄신시킬 수 있는지 연구와 식별이 필요한 봉헌생활 단체가 많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성소자와 사도직의 감퇴에서 오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결코 봉헌생활의 복음적 생명력에 대한 신뢰의 상실로 이어져서는 안 되고, 또 그렇게 평가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가 분명히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개인, 수도회, 민족들의 역사와 운명이 궁극적으로 주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이다. 봉헌생활도 인간의 역사 안에서 생성되고 성장하고 변화해 온 것이 사실이고 그렇기 때문에 늘 새로운 시대의 요구와 징표에 열려있고 새로움에 대해 적응과 쇄신을 해야 하지만 인간 역사의 궁극적인 주인이신 주님에 대한 신뢰를 잊어서는 안 된다. 

 

봉헌생활은 성령 안에 사는 삶이고 봉헌 생활자들은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그들 고유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된다.

 

 

나오는 글

 

도덕과 인륜의 타락과 무신론, 물질만능, 개인주의, 그리고 정보화 시대로 대변되는 현대세계에서 자신을 봉헌하고 그리스도께 투신하는 봉헌생활이 과연 가능하고 현실성이 있는가? 어떻게 하면 어두운 전망을 이겨내고 밝은 빛으로 향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면서 우리는 겸손하게 그분께 신뢰를 두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서 새롭게 출발」이 그렇게 했듯이, 이 글에서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새천년기」를 통해 한 말로 결론을 대신하겠다.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새로운 세계, 새로운 천년기가 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 빛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이 빛의 ‘반영’이 되어야 할 놀랍고 막중한 임무가 있습니다. 우리를 불투명하고 그림자에 휩싸인 존재로 만드는 우리의 인간적 약점을 생각할 때 이것은 두려운 임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빛에 의지하고 우리를 새사람으로 만드시는 그분의 은총에 마음을 연다면 이루어낼 수 있는 임무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봉헌생활자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교회 역사 안에서 선포해 온 희망이다.

 

[사목, 2004년 3월호, 류해욱(가톨릭대학교 성 빈센트 병원 원목, 예수회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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