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2일 (토)
(녹)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강론자료

연중 2 주일-나해-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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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3-03-02 ㅣ No.387

연중 2 주일 (나해)

 

        1사무엘 3,3ㄱ.4-10.19        1고린 6,13ㄷ-15ㄱ.17-20    요한 1,35-42

 

    2003. 1. 19.

 

주제 :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소리

 

우리는 세상에서 귀를 울리는 많은 소리와 함께 삽니다. 대부분의 소리에 대해서 우리 귀를 울리는 귀찮은 소음으로 생각하고 말지만, 정말 소음으로 여겨도 좋은 소리에 대해서 가끔씩은 흥분하기도 하고 그 말 몇 마디에 내 온 목숨이 걸려있는 것처럼 행동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내 귀에 들려오는 소리에 대해서 묵상하고 거기에서 옳은 것을 골라내어 내 삶에 도움이 될 것들에만 관심을 가질 것을 다짐할 연중 제 두 번째 주일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했을 올 2003년의 첫 번째 달도 벌써 반을 넘기고 있습니다. 이 때가 되면 새로운 한 해 동안 실천할 계획을 제대로 세우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도 필요합니다. 특별히 세운 계획이 없어 그저 되는대로 살아가겠노라고 결심한 사람들은 별 차이 없을 일입니다.  사람이 세운 계획대로 모든 것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흐른 다음 내가 얼마나 흘러와 있는지 알고 싶다면 계획을 세우는 일은 필요합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습니다만, 사람은 질문을 하는 존재라고 합니다. 질문을 하고 답을 듣는 일을 반복함으로써 우리는 지식을 넓히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얼마나 제대로 하느냐에 따라서 올바로 성장한 사람이라든지 아니면 아직 더 배워야 할 사람인지를 구별하기도 합니다. 학생들에게 해당되는 말로 공부할 줄 아는 사람이 질문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적당한 표현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상황은 어른들에게도 같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질문을 하고 응답하는 내용을 듣습니다.  스승 세례자 요한의 말에 따라 예수님을 뒤따라갔던 제자가 하는 질문은 ‘선생님은 어디 사십니까?’하는 것이었고, 그 질문에 자세한 설명대신 ‘와서 보라’는 선문답(禪問答.?불교?참선하는 사람들끼리 진리를 찾기 위하여 주고받는 대화)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대답의 특징은 말로 설명하기는 구차하므로 직접 경험해보라는 초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낯 선 사람을 찾아간 두 명의 제자는 자기들과 하룻밤을 지낸 그 사람이 그리스도이며 메시아라는 것을 말하게 됩니다.

 

우리가 알아듣는 말의 의미와는 차이가 있습니다만,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했던 메시아요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뜻을 선언하며 로마제국으로부터 자기들을 구원할 힘을 가진 정치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두 명의 제자가 예수님에게서 무슨 특별한 것을 보고 무엇을 느꼈기에 그렇게 말을 했는지 우리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질문을 하고 응답을 하는 과정을 거치는 일 대신, 아무런 소리 없어도 대답이 충분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말로 한다면, 사람의 귀로 듣는 것이 만사의 최고는 아니라는 소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본보기가 첫 번째 독서에서 들은 것처럼 사무엘을 부르는 하느님의 말씀에 나옵니다.

 

어머니 한나의 특별한 봉헌으로 성전에서 하느님을 모시며 사는 소년으로 자라난 어린 사무엘에게, 어느 날 하느님께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그분의 소리에 대해서 알지 못했던 사무엘은 모시던 사제 엘리에게 뛰어갑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한 다음, 사제 엘리는 그 소리가 하느님이 부르시는 소리라는 것을 깨닫고 사무엘에게 알려줍니다.  연중시기를 지내는 우리,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할 일도 그 특별한 사실을 알려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 누구나 하느님의 소리를 처음부터 알아듣고 구별해서 나선 것도 아니었고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적당한 계기를 통해서 내 삶에 들어오신 하느님이 나를 부르신 것이고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그 소리가 하느님의 소리라는 것을 깨달은 다음 삶이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의 삶을 통해서 하느님을 아는 사람이 되고, 그 하느님을 이웃에게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여기에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녀가 태어나고 그 자녀가 부모의 사랑을 받고 제대로 된 사람으로 성장하는 데는 사랑도 필요하고 때로는 따끔한 가르침도 있어야 합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잘못된 표현으로 미래에 생길 수도 있는 모든 일을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게 하는 자세를 갖게 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은 어떤 말이 하느님의 소리인지 구별해서 듣게 해주는 일도 세상을 먼저 산 사람들이 가진 의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듣고 움직일 사람으로 보여야 할 한 가지 모범을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인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길을 벗어난 모습이 워낙 컸기에 그렇게라도 해서 사람들이 올바른 길로 가도록 바꿔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같은 입장에 처해있지 않은 우리라면 그 알아듣는 내용이 달라져야 할 일입니다. 성서는 오래전에 쓰인 옛날 말이 아니라 2003년을 지내는 우리에게도 똑같은 힘을 갖는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누군가가 도움을 줘야 할 일이고, 끊임없이 자기 마음을 살피는 일로써 수련을 쌓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한 사람의 하나로 살았던 사무엘의 삶에 대해서 ‘하느님은 사무엘이 한 말은 모두 그대로 이루어지게 해 주셨다’고 성서는 전합니다. 세상에서 잘 살려는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물론이고,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갖춰야 할 자세가 무엇이겠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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