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2일 (토)
(녹)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강론자료

주님 세례축일-나해-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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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3-03-02 ㅣ No.386

주님의 세례 축일 ( 나해 )

 

        이사 42,1-4.6-7   사도 10,34-38   마르코 1,7-11

 

    2003. 1. 12. (주일)

 

주제 : 진정한 세례는 어떤 것인가?

 

한 주간 안녕하셨습니까?

겨울이 제 모습을 드러내느라고 지난 한 주간은 꽤나 추웠습니다.  몇 년 만에 다가오는 추위라고 해서 수도관이 터져서 물이 새거나 문제가 생긴 곳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힘든 일을 겪고 나면 다음에 올 수 있는 문제들을 예측하고 그에 대비합니다. 하지만 자연의 변화를 완벽하게 알아낼 수는 없기에 하느라고 해도 우리는 삶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에 부딪히게 됩니다. 우리가 그 문제들을 이겨내고 난 다음에 그 기억들을 모아서 정리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개인의 역사이고 공동체의 역사가 됩니다.  그 역사들 가운데는 본받아서 내 삶에 적용할 만한 것이 있고, 적용할 만큼 본보기는 안 되지만 아쉬움을 남기는 것들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를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정확한 날짜는 모른다고 해도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태어나신 다음, 약 30년의 세월이 흘러 성장한 어른으로서 사람들 앞에 다시 나섭니다.  그리고 당신의 모습을 새롭게 드러내시며 사람들 가운데 서시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선택을 알려주신 날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선택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우리도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의 모범을 따라, 세례로부터 신앙인의 삶을 시작합니다.  세례는 신앙인의 길을 시작하는 첫 단계이자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남을 의미하고 하느님의 장부에 기록되는 대단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저의 경우에는 태어난 지 3일 만에 세례를 받았기에 세례성사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세례성사는 내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자란 다음에 배웠고 부모님의 여러 가지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고 지금은 여러분 앞에 서 있습니다.  제 삶을 하느님께서 올바르고 흐뭇하게 봐 주실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세례를 받은 사람이 하느님 앞에 옳은 사람으로 성장하는데 부모님의 역할은 대단히 큽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이 신앙인으로 살아온 삶의 길이는 다를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고 결심하고 그렇게 살아온 시간과 세월이 길거나 많은 분도 있을 것이고 지난해에 신앙인으로서 삶을 시작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부딪히는 상황을 제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이 먼저 보실 것은 신앙인의 삶을 시작한 시간의 길이가 얼마나 됐는지가 아니라 현재 내가 보이는 삶이 하느님께 얼마나 더 가까이에서 살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준비된 축복은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어떤 결실을 맺었느냐가 중요할 것이고, 이 순간 이후에 유지할 내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이냐가 더 중요한 측정 기준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이 세례를 받았음을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물론 장소는 다릅니다.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살아오던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사셨던 예수님은 요르단 강의 어디에선가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셨을 것이고 여러분은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 여러 군데에 퍼진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의 정신이 하느님의 뜻을 벗어나지 않는 한 여러분들이 받은 세례는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와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세례가 무엇이라고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1) 세례는 죄를 씻는 예절입니다.  니체아-콘스탄티노플신경에서도 세례는 죄를 씻는 유일한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인간이 자기생각대로 행동함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벗어나기 시작했던 ‘아담과 하와의 원죄’를 말합니다.  누구에게나 공통적입니다만, 하느님은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 자유를 적절하게 통제할 방법이 없으면 방종(放縱.꺼리낌 없이 제멋대로 행동함)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방종으로 가는 일도 사람은 ‘자기 자유’라고 우기고 하느님은 내 삶에 간섭하지 말라고 큰소리치지만, 그로부터 생기는 결과에 대해서는 하느님께 항의하고 따지는 것이 또한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이렇게 방종으로 흐를 수 있는 잘못된 일을 바로잡게 해주는 것이 세례이고, 세례 받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지침을 주는 것이 신앙의 진리라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2) 세례는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고 그 뜻에 따라 살게 하는 삶의 전환점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신경 쓰고 살아야 할 것이 많습니다.  돈을 버는 일도 그렇고 쓰는 일도 그렇습니다.  이웃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고 가족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해도 좋은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내가 살아있을 때에만 관련되는 일입니다.  내 생명이 끝나면 아무것도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의 일은 더 이상 어쩌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 겪는 여러 가지 일입니다.  하지만, 내 삶에 의미를 주고 활력을 줄 수 있는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일은 내 생명의 한계를 넘어서는 특별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특별한 관계를 갖게 하는 것이 또한 세례로 시작하는 하느님이 힘입니다.

 

(3) 세례는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에 나오는 것처럼, 세례는 부모에게서 받은 육체의 생명을 새롭게 하는 힘이고,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게 하는 삶의 시작이 됩니다. 하지만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그것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자기 생각을 담아 하느님의 뜻을 벗어나 곁길로 빠질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이런 확률을 줄이는 힘이 바로 세례로 인해서 생기는 효과입니다.

 

힘겨운 세상에서 조금 살다가 떠나야 할 인간에게 쉬운 삶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나왔음을 기억하고 그분이 보여주신 삶의 진리들을 실천한다면 같은 어려움이라고 하더라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은 하느님께서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의 방법은 이사야 예언서 42장에 나오는 말씀대로이고, 우리가 그 말씀에 충실하게 살아갈 때 베드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와 함께 활동하실 것입니다.  현실의 내 삶을 아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은 어떤 것이겠는지, 그리고 나는 그 뜻에 충실하게 살고 있는지 잠시 묵상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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