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2일 (토)
(녹)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강론자료

연중 27 주일-가해-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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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3-02-28 ㅣ No.371

연중 27 주일 (가해)

 

        이사야 5,1-7  필립비 4,6-9  마태 21,33-43

       

     2002. 10. 6.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시월의 첫 번째 주일은 연중 스물일곱 번째 주일이고 ‘군 사목’에서 수고하는 분들도 함께 기도하는 군인주일입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생각이 자라고 몸집이 커지며 동시에 잠재능력이 성장하는 일은 사람에게 준비된 묘한 일중의 한가지입니다.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언제 어디서나 만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기억에 남길만한 일을 한다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조금만이라도 노력한다면 나와 이웃을 보다 충실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결실에는 도달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것이 또한 사람이라는 존재가 갖는 특성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변화의 초점은 흐르는 시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시간을 보내더라도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개인이 준비한 입장에 따라 다르다는 것입니다.

 

오늘 한 주간의 첫 날에 우리는 삶에 새로운 눈을 뜨게 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미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에 앞서, 저는 이 글을 준비하면서 ‘사람이 어리석게 살고 싶다면 한정이 없겠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존심이 강한 사람을 포함해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너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실제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고, 본인 스스로는 어리석다고 생각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똑같은 판단을 내리고 나를 그렇게 모자란 사람으로 대한다면 거부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한 부류의 사람들인 ‘소작인’은 ‘남의 땅을 부쳐 먹고 일정액의 도지를 내는 것이 본분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따라서 소작인이라고 자신의 신분을 받아들이면서 그렇게 사는 것을 거부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같은 자리에 머물 수 있는 자격을 스스로 포기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신분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찾지 말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어찌 되었든 자신의 위치가 분명했던 사람들이었던 소작인들이  왜 그런지 모르게 언젠가부터 욕심을 갖게 되었고 그 욕심은 자꾸만 자라나서 해서는 안 될 일도 마치 자랑스러운 것처럼 해치우고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질 수도 있다’는 꿈을 꾸게 됩니다. 이게 눈에 보이지 않는 욕심이라는 것이 드러내는 현실입니다.  이렇게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잘못 판단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너무나 좁게 보는 사람들이고, 자신들이 정하고 세운 규칙대로 내 맘에만 들도록 다른 사람들이 행동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온 소작인 이야기를 잘 새기면 ‘사람이 욕심을 앞세우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정해진 이치이고 자신도 망하게 되는 지름길 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그런 현상이 발생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진 한계의 한 가지는 겉으로 드러나는 일만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겉으로 드러난 일만이 세상에서 생길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빨리 판단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에서도 같은 모양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포도원 소작인들의 잘못된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면서, 그렇게 사는 일은 우리 삶을 판정하실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 자기 삶을 옭아매는 것이라고 단언하십니다.  잘못된 마음을 돌이킬 줄 모르고 그 마음과 고집을 앞세워 끝까지 간다면 그 일은 내게 먼저 올 가능성이 충분하던 축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축복에서 자신은 제외된다는 것입니다.  

 

‘천재와 천치’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글자 하나 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특성을 가진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결과는 글자 하나의 차이를 넘는 심각한 상황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간단한 차이에서 발생하는 결과가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것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현실에서 각자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사랑이란 ‘세상에 사는 사람은 나 혼자라는 기준으로 생각’할 수 있는 차원은 아닙니다. 그것과는 다른 기준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씀드린다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창조물들을 관리하도록 사람들을 특별히 생각하셨던 하느님의 사랑과 같은 차원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내 앞가림만을 위한 사랑을 생각한다면, 이스라엘인들을 걱정하고 고집 센 그들에게 경고하는 이사야예언자의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좀 더 겸손한 사람이 되고 하느님의 은총을 입으려면,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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