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2일 (토)
(녹)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강론자료

[주님수난성지주일]부산주보-강종석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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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goodnews] 쪽지 캡슐

1999-03-26 ㅣ No.49

[부산주보에서 옮겨왔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강종석·베드로 신부【사상성당 주임】

 

 

   올해도 사순절을 맞이하여 성지주일의 수난복음으로 사순시기의 절정을 기념합니다. 죽음에 이르는 공포를 예수께서 어떻게 감당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실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이 말씀은 죽음의 순간을 맞이한 예수께서 부르짖는 말씀입니다. 어느덧 죽음의 마지막 고비에 서신 예수님. 애타게 아버지 하느님을 부르건만 평소엔 그토록 자애로운 아버지, 예수님을 그토록 마음에 들어 하시던 아버지께선 아무런 응답도 없고 죽음의 순간만이 초읽기에 접어듭니다. 이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는 일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아버지를 찾았습니다. 그분 안에서 기쁨을 얻었고, 그 아버지를 최고로 알았고, 그분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십자가 위에서도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하고 외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순명으로 일관된 삶을 사셨습니다. 순명은 작은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바로 이 순명의 삶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이루신 우리 주님의 용감한 모습은 순명과 아버지와의 끊어지지 않는 사랑의 관계 안에 있습니다.

 

 

  십자가를 우리가 그것도 죽음의 십자가를 질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 우리는 자신이 없습니다. 예수께서도 그 처절하고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이렇듯이 외치지 않습니까? 그것은 분명 너무나 힘든 모습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모질고 독해서 남들이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마지막 순간에 아버지 하느님을 애타게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분명 예수님은 고통이나 외로움 따윈 신경도 안쓰는 철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여튼 예수님은 이제 그 가장 힘든 고비에 이미 접어들었습니다.

 

  용감하신 예수님의 실체는 아버지께 대한 순명 그리고 끊어지지 않는 사랑의 관계였습니다. 이 순명과 사랑이 십자가의 죽음을 가능케 했고 용감하신 예수님을 낳았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도 고통스러워 하셨던 십자가를 감히 내 것이라고 못하더라도 순명과 사랑을 약속할 수는 있습니다. 이 작은 우리의 약속들을 주님께서 어떻게 쓰실 지는 몰라도 순명과 사랑으로 용감하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만족스러울 뿐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순명과 사랑을 약속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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