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2일 (토)
(녹)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강론자료

사순 5 주일(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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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국 [yk1004] 쪽지 캡슐

1999-03-24 ㅣ No.46

사순 제 5주일 강론(1999년 3월 21일)

 

제1독서: 에제키엘 37, 12ㄴ - 14.

제2독서: 로마 8, 8 - 11.

복음: 요한 11, 1 - 45.

 

   "돌을 치워라." "라자로야, 나오너라." "이제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이제 얼마 안있으면 기나긴 사순 시기도 끝이 나고 부할 대축제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쯤이면 '아, 사순 시기라고 해서 내가 별다른 걸 한 것이 없다.'라고 후회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벌써 포기하지 마십시오. 아직도 사순 시기는 두 주나 남았습니다. 남은 사순 기간을 알차게 희생과 극기를 하면서 보내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에게는 여러 차원의 생명이 있습니다. 가장 기초적인 것은 신체적인 차원의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숨을 쉬고 심장이 뛰는, 말 그대로 '살아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의학적으로 이야기했을 때 '죽은 것'이 아닌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육체적인 차원의 생명이 있습니다. 이것은 눈, 코, 입, 귀, 피부를 가지고 외부의 사물을 보고 느끼고 하는 것과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의식이 있어야만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고 반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이상이 있을 때 사람은 '장애'를 가지게 됩니다.

   우리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은 바로 '인권'이라고도 이야기되는 '사회적 생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가지며,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가 있다는 '인권선언'의 내용은 단순히 신체적인 생명을 보장받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대우를 받으며 사회적 생활을 할 권리를 말합니다. 근대국가에서는 이러한 권리를 국가의 기본법인 헌법에 자유권, 평등권, 생존권, 행복추구권이라는 이름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최소한의 사회적 생명은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받는 소극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이 도덕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서 인정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은 이 사회적인 생명의 적극적인 측면입니다. 이러한 것을 다른 말로 '명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예'를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많아야 그 사회가 좋은 사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곳곳에서 썪었다는 말이 들리는 것은 바로 '명예'보다는 '이익'을 중시하는 경향 때문이고, 특히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고 그렇기 때문에 명예를 소중히 여겨야 하는 사람들이 명예롭게 살지 않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말한 모든 인간의 생명은 시간의 제약을 받는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제한을 받지 않는 인간의 생명은 없는 것인가? 여러분은 신앙인이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해 '있다.'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있습니다. 그것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영신적인 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자기 자신과 타인의 '영신적 생명'에 관해서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라자로를 육신의 죽음에서 살려낸 것 뿐만 아니라 세상의 욕심에 몰두해 있기 때문에 영신적인 죽음의 잠을 자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그냥 나와는 관련이 없는 그러한 이야기로 볼 수만은 없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돌을 치워라."(요한 11, 39)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살려내기 전에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치우라고 사람들에게 명령하십니다. 라자로의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이란 것은 하느님과 인간과의 만남에 있어서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무덤의 돌을 치우는 것, 이것은 주님이 손수 하실 수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굳이 사람들에게 치우라고 명하십니다. 돌을 치우는 것은 개인에게 있어서는 주님을 만나는데 있어서의 방해가 되는 것을 치우는 '회개'를 상징합니다. 또한 이것은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이들, 또는 세례를 받았지만 아직은 믿음이 깊지 않은 이들에게 부르심의 삶을 일깨워 주는 것을 말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영혼은 생명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무덤에 갇힐 것이고 죽음 속에 갇힐 것입니다.

   "라자로야, 나오너라."(요한 11, 43)

   무덤을 막고 있는 장애물이 없어진 다음에 주님은 라자로를 부르십니다. 무덤 속의 라자로가 만일 주님의 부르시는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또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도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가 살아나는 오늘의 복음 이야기는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또한 세상적인 것, 세상의 죄에 묻혀서 주님께서 우리를 참된 삶의 길로 부르시는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면, 아니면 듣고도 외면한다면 우리는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라."(요한 11, 45)

   다시 살아난 라자로는 아직 죽었을 때 자신의 몸에 감아 두었던 삼베와 수건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것을 풀어야만 그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서 깨어난, 그래서 회개의 구원받은 삶을 살고 있는 우리 신자들도 아직 우리의 영혼이 죽음의 잠에 빠져 있었을 때 상태의 습관들, 악습들이 삼베처럼 우리 영혼을 싸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삼베를 벗어 버리는 것은 우리가 계속 착한 행실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죽음의 삼베를 벗겨 버리는 것은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도 이루어지지만,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도움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신앙 안에서 독불장군(獨不將軍)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서로 돕고 친교를 나눔으로써 우리는 우리 영혼을 싸고 있는 삼베를 서로 벗겨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이를 위해서 하는 기도,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나의 영혼의 안전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계절적으로 완전히 봄이 되었습니다. 봄이 되면 땅에서는 새싹이 움터 나옵니다. 만약에 씨앗 중에 게으른 씨앗이 있어서 그 씨앗이 싹을 틔우라고 하는 봄의 목소리를 듣기를 거부하고 씨앗 그대로 머물기를 원한다면 언젠가는 땅 속의 벌레에게 먹히고 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이 영원한 삶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기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언젠가는 멸망의 벌레에게 영혼을 먹히고 말 것입니다. 회개로써 영원한 삶의 길로 가는 것, 그러기 위해서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는 착한 행실의 삶을 살고,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복음을 증거하고 자기 본당 공동체를 비롯한 교회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 그것은 우리 영혼의 안전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원한 안전을 위해서, 그리고 영원한 행복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삶을 살려고 다짐하는 사람의 귓가에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려 주실 것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 2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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