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2일 (토)
(녹)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강론자료

사순 5 주일-가해-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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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1999-03-20 ㅣ No.41

사 순 제 5 주 일 ( 가 해 )

          에제키엘 37,12-14  로마 8,8-11  요한 11,1-45

       1999. 3. 21.

주제 : 삶을 향하여

 

비가 오고 날이 풀려, 봄이 가까워졌습니다.  봄이 되면, 겨우내 죽었던 것처럼 보이던 식물들에서도 한해를 유지할 새로운 생명이 움터 나오곤 합니다. 아직 따듯한 시기가 덜 되었는지 우리의 눈에 생명이 나온 기지개를 켠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만, 오늘 우리는 성서의 말씀을 통하여 새롭게 바뀔 생명, 새로운 삶을 유지할 새로운 생명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순시기는 부활이라는 새로운 생명의 길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줍니다.  그 어려운 과정들을 사순시기의 복음을 통해 돌이켜 보겠습니다.  사순시기 첫 번째 주일에는 닥쳐오는 유혹에 어떤 자세로 임해야 올바른 것인지, 두 번째 주일에는 사순절을 마치고 우리가 변할 모습을 미리 보여줌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기쁨을 미리 맛보았고, 세 번째 주일에는 참된 생명의 물을 얻으려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 삶을 뒤돌아보고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 지난 네 번째 주일에는 앞못보던 사람이 치유를 통하여 얻은 빛처럼, 우리가 만물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지혜를 배웠습니다.

 

이제 사순시기도 막바지에 접어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설날 다음날부터 시작한 이 사순시기를 어떤 마음과 자세로 지내고 계십니까?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순절은 해마다 반복되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해마다 새로운 마음과 자세를 가질 것을 바라십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면, 해마다 그 말씀을 듣고 또 새로운 다짐을 하겠지만, 그렇게 그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의 행동이나 삶의 모습이 갑작스레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과 사람이 바뀌는 것은 많은 준비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전례를 통해서 기억하기에 인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의 기간은 40일이었지만, 하느님은 역사를 통하여 수많은 세월을 준비하셨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말씀의 주제는 '다시 살아나는 일, 즉 부활' 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은 매일 죽는 연습을 합니다.  하루 종일 일하고 나서 다음 날 새로운 힘을 모아서 우리가 움직이고자 한다면, 반드시 쉬어야 합니다. 이렇게 쉬는 일을 우리는 '잠잔다'고 합니다. 이렇게 잠자는 것도, 우리가 다음 날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 죽음의 또 다른 한가지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시기 위해 복음을 전하시던 때에, 라자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우리 친구 라자로가 잠들어 있으니 이제 내가 가서 깨워야겠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시각에서 또, 길고 긴 역사를 주재하시는 하느님의 입장에서 판단한다면, 우리가 잠을 잔다거나 죽는 일은 같은 의미인가 봅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들은 죽음을 다르게 보기에, 무척이나 두려워하고 대가로 무엇을 지불을 지불하면 그 경험을 피할 수 있을까 질문하지만, 그 해결책을 우리에게 알려줄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신앙에서는 그 삶의 방법을 제시합니다. 겉으로 바라보이듯이 그저 우리가 숨을 쉬고 움직이는 것만이 사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참된 삶은 무엇인지 알아보고, 참된 삶을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해야 하겠는지 그 방법을 찾는 것이 오늘 우리가 할 일입니다.

 

교회의 교리에서는 사람의 탄생과 그 삶의 목적을 '하느님을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도 요즘처럼 바쁜 현대인들은 거기까지 미처 신경 쓸 여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신경 쓰는 것 말고도 할 일이 많다는 소리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방면에 신경을 써야 할 현대인들이기는 하지만, 옛날 사람들에 비해서 모든 면에서 더 풍요로워졌는가 하고 질문한다면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여러분은 다시 살아난다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죽었다가 살아나서, 그 죽음의 세계를 이야기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잡지에는 그런 내용이 가끔씩 실립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야기하는 죽음 이후의 세상은 신앙에서 이야기하는 하느님 나라와 같은 모습은 아닙니다.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아마도 인간의 표현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하는 것이 어렵거나 불가능하기에 하느님이 본 모습을 다 보여주지 않으셔서 그럴 것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유다왕국이 멸망하고 난 다음에 바빌론으로 끌려가던 중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활동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에 기쁨을 즐기고 누린 시기는 없습니다.  이런 상황을 에제키엘 예언자는 무덤 속에 머물고 있는 모습과 비교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어 변화가 온다면, 그것이야말로 무덤에서 살아나는 기쁨 만한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죽었다가 살아난 경험이 있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세계가 단순히 그저 그렇고 그런 곳이 아니라고 믿고 받아들이기에 우리는 신앙을 통하여 다른 모습으로 살기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신앙을 통하여 다르게 사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 일에 대하여 바오로 사도는 '육체를 따라 사는 것'과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을 구별'합니다. 하나는 죽음과 멸망의 길로 가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과 영광의 길로 이끄는 것이라고 자신 있게 주장하십니다.  우리가 따라 살아야 할 삶의 방법이 어떤 것인지 여러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 육체를 갖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눈으로 보이는 육체를 위해서만 살고자 한다면, 그것이 곧 죽음과 멸망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들을 때는 제대로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로 살기는 하되, 육체를 위해서만 살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교회가 거기에 다가설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하기는 하지만, 그 방법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선택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달리 바라볼 수 있고, 달리 생각할 수 있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에 공감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1) 우리 친구 라자로가 잠들어 있으니 이제 내가 가서 깨워야겠다"   (2)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3)"네가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여러분들은 어떻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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