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2일 (토)
(녹)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강론자료

연중 05 주일-가해-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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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1999-02-06 ㅣ No.25

    연중 제 5 주일 (가해)

      이사 58,7-10      1고린 2,1-5      마태 5,13-16

     1999. 2. 7.

     

    주제: 행복에 이르는 길 2(=행복의 조건 2)

 

사람은 행복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그 행복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못할 일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이 무엇인지 질문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행복이 무엇인지 한 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렵겠지만, 우리는 그것을 얻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아침 일찍 산에 올라가기도 하고, 마당에서 심호흡을 하는 사람도 있고, 이불 속에서 아주 오래도록 몸을 비틀면서 기지개를 켜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표현하기 어려운 행복을 얻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찾고 실천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이곳 성당에 와서 들으신 복음 말씀은 지난 주일의 말씀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지난 주일의 예수님 말씀은 여덟 가지 행복에 이르는 내용이었습니다.  여러분은 한 주간 동안 행복을 얻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실천하기 어렵다’는 것이 첫 번째의 느낌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은 하느님이시기에 가능하지, 사람인 나는 그렇게 실천할 수 없다’고 생각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한다면, 사람의 변화가능성을 무시하는 소리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변화의 존재이고 환경에 적응합니다.  높은 에베레스트 산에 ’공기통’ 없이는 올라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일에 도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도 ’공기통’없이 올라간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한번쯤은 들어본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있는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혹시라도 다른 생각을 갖는 분이 있다면, 그 생각을 고정시키기 전에 ’나도 새로운 다짐과 변화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여덟 가지 행복에 대한 지난 주일의 복음은 행복에 이르기 위한 기본적인 자세를 설명하신 것이었습니다.  그에 비해서 오늘 ’소금과 빛’에 대한 말씀은 구체적인 삶의 적용에 대한 것입니다. 빛의 사명은 자신의 몸이 사라지면서 뭔가를 비추는 데 있고, 소금의 사명은 자신의 몸을 녹여 사라지면서 다른 생명체를 썩지 않고 상하지 않게 하는 데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러한 역할을 하라고 하십니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러가면 우리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좋다는 것은 알겠는데, 난 하지 못하겠으니 다른 사람에게 알아 보라’고 변합니다. 그렇게 할 일을 피하면서도 ’행복해지고 싶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욕망을 깔고 사는 인간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소금과 빛은 혼자 움직이지 못합니다. 사람이라는 생명체가 제대로 움직이도록 관리해줘야 합니다. 소금과 빛은 혼자서 자신이 활동해야 할 곳을 찾지 못합니다. 반드시 사람이 찾아주어야 합니다.  우리 사람들도 좋은 것, 올바른 것을 알고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자라면서 배우고 실천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올바른 것을 알아듣고 실천해 나가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종교요 신앙입니다.  우리는 요즘 세상을 가리켜 ’가치관이 상실된 시대, 이기적인 사람이 차고 넘치는 시대, 어른을 공경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라고 말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그렇게 된 현상을 파악은 잘하지만, 다시 좋은 세상으로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지는 못합니다.  

 

왜 그 방법을 제시하지 못하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과 뜻에서 벗어난 생활을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탓입니다.  현재의 상황을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좋은 결실을 바라는 사람들이 나아가야 할 삶의 방법이 나옵니다.  그것을 실천하면 행복에 가까이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시대, 온 세상이 깜깜해서 대낮에도 호롱불을 밝혀 들고 다녀야 했던 시대에 예언자를 통해서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이 오늘 1독서 이사야 예언서입니다.  세상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일의 한가지는 ’가난하고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이 다른 어려운 사람에게 자신의 것을 더 잘 나누어준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우리 신앙인도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을 더 많이 기억합니다.  "내가 예전에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했더니, 이런 곤경이 나에게 닥친 것은 아닐까?"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느님은 하늘 위에 높이 앉아서 인간이 겪는 어려움을 보고 즐거워하는 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 일을 즐기시는 하느님이라면, 오늘 독서에 나오는 말씀을 전하게 하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상황이 어려운 것을 뻔히 알면서도, ’참된 단식’이라는 주제를 통하여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단식한다는 것은 식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욕심으로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때 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먹는 것을 굶는 것이 우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동은 항상 원인과 결과가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좋은 결실을 바란다면, 좋은 것, 올바른 것을 행해야 한다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바란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신을 얻으려면, 다른 사람들이 애매하게 나를 헐뜯지 않기를 원한다면, ’참된 단식’의 뜻을 제대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단식의 뜻을 알아듣고, 하느님이 마련하시는 행복에 가까이 가기를 원한다면, 분열의 모습으로 팽배해 있던 고린토 교회 공동체에 전해진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들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교회의 사람들에게 믿음을 제대로 갖출 것을 부탁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올바로 살려면, 올바른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우리의 삶을 구속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올바른 생활과 자세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그렇다는 것입니다.

 

고양동 성당의 경제 환경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긴 합니다만, 사람이 살기에는 좋은 곳입니다.  좋다는 것은 우리가 마음과 생활자세를 조금만 바꾸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요소가 많다는 것입니다.  성당에 오는 신자들이 함께 머물러 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잔디밭에 천막도 만들었습니다. 많이 사용하시고, 서로의 삶을 나누는 장소로 바꾸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짧은 삶에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열심히 노력해야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 행복은 삶의 모습을 다르게 갖는데서 시작합니다.  좋은 마음과 자세가 우리 안에 자리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다지고, 행복의 방법을 이야기하시는 예수님께도 도움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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