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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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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15: 예수님과의 만남을 향한 데레사의 여정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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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5-24 ㅣ No.580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15) 예수님과의 만남을 향한 데레사의 여정 ⑤


“오늘부터 네가 나의 신부(新婦)가 되리라”



예수님과 영적 결혼의 은총을 받는 성녀 데레사. 스페인 아빌라 데레사 생가 성당의 색유리화.


영적 결혼 : 상흔을 간직한 예수님과의 일치

성녀 데레사가 영적 약혼의 은총을 받은 것은 1556년 성령 강림 대축일이었습니다. 그 후 성녀가 하느님과의 사랑 안에서 인격적 관계의 완성인 영적 결혼에 이른 것은 16년이 지난 1572년 11월 18일 아빌라의 강생 수녀원에서 지낼 때였습니다. 당시 성녀는 원장으로 봉사하고 있었으며 수도 공동체의 쇄신을 위해 십자가의 성 요한을 영적 지도 신부로 모시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십자가의 성 요한이 수녀원에서 미사를 봉헌한 후 성녀와 영적 담화를 나눴는데, 성녀는 그날 아침 미사 때 사제가 영하는 대제병을 쪼개 자신에게도 영해 준 게 매우 좋았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성인은 그 다음 날 미사 때 그런 것에 애착하지 말라며 대제병 조각 대신 다른 수녀들과 똑같이 소제병을 영해 주었습니다. 잔뜩 기대했던 성녀는 소제병을 영하고 나서 대제병 조각을 받지 못해 실망하면서 시무룩한 상태에서 영성체 후 묵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성녀에게 나타나 상흔이 있는 오른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씀하시며 성녀를 위로해 주셨다고 합니다. “이 못을 보아라. 이것은 오늘부터 네가 나의 신부가 되리라는 표시이다. …내 영예는 너의 것이고, 네 영예는 나의 것이다”(영적 보고서 35번). 성녀가 체험한 영성생활의 절정에는 수난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성녀는 그때야 비로소 그 예수님을 온전히 자신의 정배로 받아들이고 그분과 사랑으로 일치했습니다.


완덕 :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의 완성

성녀는 예수님과의 사랑 관계를 설명하면서 남녀 간 사랑의 관계를 표현하는 ‘맞선’, ‘약혼’, ‘결혼’ 같은 상징적 표현들을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러한데,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인격적 관계’라는 것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이며, 또 하나는 둘 사이의 심오한 관계를 담아낼 수 있는 인간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언어가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지향하는 성성(聖性)의 절정은 결코 불교나 힌두교처럼 비인격적인 절대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느님은 인격적인 분으로 아버지이신 하느님이자 아들이신 하느님 그리고 거룩한 영이신 하느님, 이렇게 세 위격이자 동시에 한 분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오랜 불교, 유교 문화권 안에 있는 한국적 심성(心性)은 절대자를 위격적인 분이라기보다는 불교, 유교적인 차원에서 우주적인 절대 진리라고 하는 추상적 실재로 받아들이기 쉬운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불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근본적 차이점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두 종교의 신관(神觀)을 함부로 섞어버리면 범신론(汎神論)이라는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우리를 창조하고 사랑과 자비, 용서를 베푸는 아버지 하느님이시자 우리 곁에 인간이 되어 오신 아들 하느님, 그리고 우리를 성화함으로써 본래 인간을 위해 영원으로부터 마련하신 계획을 완성하는 성령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 각 위격과 더불어 인격적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이를 성숙시켜 가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부터 교부들을 비롯해 여러 영성가들은 그 관계가 무르익어 완성되어 감에 따라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남녀 간 사랑의 관계로 풀어서 설명해 왔습니다. 성녀가 자신의 영적 여정에서 도달한 ‘영적 약혼’과 ‘영적 결혼’ 역시 성녀 데레사만이 유일하게 독창적으로 체험하고 제시한 것은 아닙니다. 교부시대에 오리게네스 교부를 기점으로 니사의 그레고리오, 위 디오니시오를 비롯해 중세의 여러 신비가들(성 베르나르도, 복자 뤼스브뤽, 십자가의 성 요한 등)이 끊임없이 사용했던 표현입니다. 인간 간 사랑의 관계에서 ‘결혼’은 사랑을 완성하는 최상의 표현입니다. 거기에는 두 남녀 사이의 밀도 깊은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바탕으로 한, 두 존재 간의 완전한 일치의 상태가 담겨 있습니다.


올바른 신앙의 토착화

교회의 여러 분야에서 소위 한국적 토양 위에 신앙을 토착화해야 한다며 ‘토착화(土着化)’를 화두로 내걸곤 하지만, 가톨릭 교회가 2000년간 목숨을 걸고 지켜온 신앙의 진리들을 변질시키는 토착화는 많은 영혼을 잘못된 진리의 길로 몰아갈 뿐입니다. 토착화는 ①초대 교회로부터 이어오는 불변의 신앙 진리들(삼위일체 하느님, 그리스도의 강생, 수난, 죽음, 부활 등)을 바탕으로 ②각 시대와 장소, 민족에게 소통 가능한 적절한 사고의 틀을 통해 그 신앙 진리들을 재해석해서 제시하는 작업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요소 모두를 분명히 알아야 가능한 작업이며 무엇보다 두 요소 가운데 첫 번째 요소에 무게를 더욱 둬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와 전통이 짧은 한국교회의 경우 신앙의 진리들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원천적 자료들(2000년 역사상 전해오는 교회 교도권의 문헌들, 교부 문헌들, 성인들과 신학자들의 작품 원전 등)이 극히 일부밖에 소개되지 못한 상황에서, 어설프게 한국적 사상들을 접목해서 이상한 개념들을 도출하고 거창한 수식어를 달아 표현한 개념들을 토착화 작업이라고 한다면, 필자는 그런 토착화에는 반대입니다. 신앙의 근본 진리들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수용이 먼저입니다. 이런 선상에서 저는 성교회가 고백하는 하느님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느님은 삼위일체 하느님이자 인격적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과 대화하고 사랑의 교감을 나누는 장(場)이 바로 기도입니다. 아주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인 이 진리를 알아듣지 못할 때 모든 신앙생활이 뒤틀어지고 맙니다. 그럴듯한 불교 교리를 그리스도교 교리와 혼합하고 선(禪) 수행에 빠져 이상한 수행 방법을 기도에 접목해 그리스도교적 기도도, 선 수행도 아닌 삼천포로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많은 신흥 영성 운동이 범람하는 한국교회의 현 상황에서 늘 경계해야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평화신문, 2014년 5월 18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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