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이여삼 바오로: 스스로 이마에 물을 부은 순교자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74

이여삼 바오로 - 스스로 이마에 물을 부은 순교자

 

 

1801년 천주교 박해의 모진 바람이 전국을 휩쓸었다. 이는 소장 혁신세력이 모두 꺾이고, 다시 보수로 돌아가는 사건이었다. 한국 초대교회는 이 박해로 양반계층의 교회 지도자를 모두 잃게 되었고, 중인과 서민이 이끄는 교회로 전환되었다. 교우들의 신앙생활도 근거지를 산간벽지로 옮겨 교우촌을 이루었고, 밀고를 피해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어야 했다. 황사영은 당시의 상황을 그의 백서에서 이렇게 개탄하면서 비장하게 호소하고 있다. "교우 가운데 고명하고 힘있는 사람들은 다 죽고 무식한 하류층과 부녀자들 뿐으로 지도자가 없는 상태여서, 현재로서는 재선 방법을 찾을 수 없으며 이대로 가면 10년 안에 또 다른 박해가 없더라도 한국교회는 자멸하게 될 것입니다. 양이 목자를 잃고도 풀을 먹고 자라고, 젖먹이가 어미를 잃고도 온전히 살아가기를 바랄 수 있지만 저희들은 백 번을 생각해도 실로 살 길이 없습니다. … 아!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죽기 전에 어떻게 성교회가 끊어져 없어지는 것을 봅니까!"

 

도저히 가망이 없어 보이는 이 처참한 상황에서 한국 초대교회는 순교의 피로 역사를 물들이며 전개되었다. 1811년 교황과 북경의 주교한테 보낸 2통의 편지에는 순교자들의 사적과 신입 교우들의 고통을 진술하였고, 목자의 파견을 요청하는 조선교회 평신도들의 간절한 청원이 구절마다 배어있어, 이 글을 읽는 북경의 주교와 선교사들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렇게 사제를 모셔오기 위한 노력을 은밀히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방 관청에서 행하는 박해로 순교의 피를 기약 없이 흘려야만 했다. 우리는 순교의 피로 이어지는 초대교회의 역사를 잠시라도 잊을 수가 없다. 아니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1812년 충청도 흥주에서 이여삼(?-1812, 바오로)이 순교하였다. 그는 양반 집안의 4형제 사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일찍부터 성가정을 이루었던 이들은 1791년 박해 때 온 가족이 전라도로 피신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그들은 다시 공주로 피신하였으나 이듬해 2월에 이여삼은 셋째형과 조카와 함께 체포되었다. 이때 조카는 석방되었는데, 이분이 바로 뒷날 샤스탕 신부의 명으로 1839년 순교하기 전에 "옥중수기"를 남긴 순교자 이태권(李太權)이다. 그의 "옥중수기"는 한국 초대 교회의 소중한 자료로서 달레 신부가 쓴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다.

 

다행히 조카는 풀려났지만 형과 함께 유배되었던 이여삼은 10년 동안 귀양살이를 해야했다. 1812년 오랜 유배생활에서 풀려났지만 또 다른 고초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친첫 몇 사람이 체포되었다가 이여삼을 고발했다. 더욱이 친척 가운데 한 사람은 이여삼이 귀양에서 겨우 풀려나 살고 있던 전라도 금산군가지 포졸들을 인도하여 그를 다시 체포하게 했다. 이로써 이여삼은 신앙 때문에 세 번째 감금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의지는 형벌 가운데서 꿋꿋하였고, 관원들의 혹심한 심문에도 한결같이 의연한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여삼은 홍주 감옥에서 6개월 동안 갇혀있었는데, 그가 받은 심문과 고문을 어떠한 모습으로 견디며 신앙을 증거했는지 자세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다만 관원이 그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도록 형식적으로나마 몇 마디 굴복하는 말을 하도록 유혹했으나 그의 자세가 추상같아 관원들이 오히려 숙연해졌으며, 외교인 친구들이 그를 구하고자 간곡한 회유를 여러 번 권하였으나 단호히 물리치고 천주를 위해 죽기를 결심했다고 한결같이 대답하였다.

 

관장은 이여삼을 결코 배교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사형을 선고했다. 마침내 1812년 11월 어느 장날, 관가에서는 이여삼의 사형을 집행하기로 결정했다. 힘센 형리들이 삼모장으로 곤장을 치기 시작하였다. 살이 터져 짓이겨지고 피가 솟구쳐 흘렀다. 이 혹독한 고통 속에서도 이여삼은 신음 한마디 없이 고통을 오로지 주님께 봉헌했다. 관장은 꼼짝않고 쓰러진 이여삼이 죽었는지 살펴보게 하였다. 매질하던 형리는 거친 호홉을 내쉬며 피투성이가 된 그를 살폈다. 이때 이여삼은 고개를 들고 "목이 몹기 타니 물 한 모금만 주시오" 하고 청했다. 이 뜻밖의 요구에 모두가 놀랐다. 매를 치는 형리도 목이 타는데 매맞아 피투성이가 된 사람은 오죽하랴! 형리들은 이미 사형이 언도된 사람의 마지막 청을 들어주며 그에게 물을 한 그릇 떠다주었다. 이여 삼은 마치 장엄한 예식을 행할 때처럼 피투성이로 만신창이 된 몸을 조용히 일으켜 꿇어앉았다. 그리고 그 물로 타는 목을 축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의 이마에 물을 부으며 십자성로를 긋고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나를 씻기노라. 아멘" 하며 세례성사 때 물로 씻는 예식을 행하는 것이었다. 사제가 없던 시절 아직 세례성사를 받지 못한 예비신자였던 그는 죽기 직전에 세례성사를 받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이 세례는 자신에게 스스로 세례를 줄 수 없기 때문에 효력은 없다. 다만 죽음을 앞두고 세례성사를 받고자 하는 이영삼의 열절한 신앙을 우리는 깊이 새기는 마음으로 묵상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모두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이여삼은 스스로 예식을 마치고 관장을 올려다보며 "제가 죽기를 원하신다면, … 여기를 치도록 하시오" 하면서 자신의 옆구리를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고 있는 곳을 형리가 두 번 치자 그는 숨을 거두었다.

 

 그가 순교하던 바로 그 순간 거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을 지나가던 세 명의 젊은이가 있었다. 그들은 길을 가면서 문득 찬란한 광채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놀라워했다. "저것이 도대체 무슨 광채인가? 불빛도 아닌데 참으로 찬란한 광채로군. 이상도 하다." 그리고는 무심코 지나왔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이 교우였다. 그가 집에 돌아 온지 사흘 뒤에 이영삼이 장하치명으로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날짜와 시각을 따져보니, 그 광채가 나타났던 시각과 꼭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고는 크게 감동하여 주님을 찬미하며 더욱 열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이여삼의 시신은 그의 친척들에게 장사지내게 내어주었다. 신자가 아닌 친척들이 시신을 거두는데, 매를 맞아 갈기갈기 찢기었을 시신에는 아무런 상처의 흔적도 없고, 오히려 아름답고 신비로운 광채가 발하는 것을 보고는 몹시 놀랐다고 한다. 친척 가운데 몇 사람은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 깊이 감동하여 마음을 돌려 그때부터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여삼의 이름은 그 뒤 오랫동안 홍주 포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형리들은 교우들이 형벌을 받는 동안 "이여삼처럼 매를 참고 받아야 하는 거야."라며 격려 아닌 격려를 하기도 하였고, 더러는 굳건한 교우들의 옥중생활과 그 죽음을 보고는 "저 사람은 이여삼 같아" 또는 "아무래도 이여삼만은 못한 것 같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순교의 피는 신앙의 씨앗"이라는 말처럼 한국초대교회는 순교의 피와 순교자의 무덤 위에서 꽃피어 있다. 그런데 나는 지금 그 교회의 정원에 핀 한떨기 꽃인가? 아니면 옛날 포졸들처럼 무심하게 순교자의 모습을 입에 담고 있는 정원 밖의 나그네인가? 순교자가 있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순교적 삶을 살아야 함은 바로 지금 난에게 주어진 과제임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이여삼은 지금 하늘나라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그토록 받고자 하던 세례성사를 끝내 받지 못한 채 죽었고 하지만 그대들은 세례성사를 받는 놀라운 은혜를 주님께로부터 받으셨소. 세례성사를 받은 그대들은 과연 얼마나 열절한 마음으로 기뻐했는지요? 그리고 세례성사를 받은 뒤에 어떻게 바뀐 삶을 지금가지 살고 계신지 묻고 싶소."

 

[경향잡지, 1998년 2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 교수)]



573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