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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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유박해 순교자들: 최필제 베드로 - 부부애의 귀감이며 공적 신의 지킨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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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66

신유박해 순교자들 (5) 최필제 베드로


부부애의 귀감이며 공적 신의 지킨 순교자

 

 

늙은 아버지는 이미 한번 옥고를 치르고 난 아들이 천주교에 다시 열중하는 모습을 보고 몹시 걱정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을 천주교로부터 떼어내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다. 최필제는 아버지의 만류가 있을 때가 가장 괴롭고 힘들었다. 그는 지극히 공손하고 온유한 태도로 천주 공경이 참되고 올바름을 간절히 설명하며 함께 신앙생활 하기를 오히려 청하기까지 했다.

 

서울의 중인 출신으로 자를 자순(字順)이라 했던 최필제(崔泌第 베드로, 1769∼1801)는 일찍이 길거리에서 열정에 북바쳐 "주님을 믿어야 한다"고 외치던 순교자 최필공의 사촌동생이다. 그는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약장사로 생업을 삼아 부모를 봉양하여 살았는데 효성이 지극한 그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약제를 다루어 약값이 싸고 질이 좋다며 모두 그를 더욱 신임하였다.

 

그리고 타고난 성품이 참되고 온유하였는데 그 진실하고 충직하며 중후한 성품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서 바라보기만 하여도 그가 어진 사람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최필제는 1790년경 내포의 사도로 불리던 이존창의 전교로 입교하여 최필공과 함께 활약했다. 그러나 바로 이듬해 일어난 신해박해때 사촌형과 함께 체포당하여 그만 배교하고 풀려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후 한동안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냉담하였다.

 

그러던 그는 신해박해 이후 비참한 상태에서도 굳건한 신앙생활을 하며 눈물겹게 사제영입 운동을 벌이는 모습을 차츰 자신의 불성실을 뉘우치기 시작했다. 1793년경 다시 교회의 품으로 돌아온 그는 옛 동지들의 외롭고 힘겨운 활동에 동참했고 이윽고 주문모 신부가 입국해 사목활동을 펼 때 정약종 황사영 등과 함께 더할 수 없이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러한 자식의 모습이 염려스러워 기회 있을 때마다 만류했는데 한번 배교를 뉘우치며 새 삶은 시작한 그는 가장 고통스러운 혈육의 탄압을 놀라운 슬기와 의지로 이겨내며 자신의 굳은 신앙의지를 힘있게 느끼게 하였다. 그는 가족의 탄압을 오히려 굳고 심원한 신심을 공고히 하는 계기로 삼고 더욱 열절한 사람으로 가족에게 성실하여 참 사람의 계율을 아름답게 실천해 갔다.

 

축첩의 폐습과 남존여비의 일상화된 관습을 버리고 아내를 정중하고 사려 깊게, 한 인격체로 대하며 사랑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교적 사랑과 평등으로 부부애를 이 땅에 실현해 낸 첫 효시라 할만 했다. 이러한 그의 삶을 주문모 신부가 보고 탄복하였다. 신부는 그를 칭찬하여 "부부 정절을 지키며 훌륭하게 끝을 맺는 이가 아주 드문데, 이 부부는 지조가 갈수록 굳어지고 고통을 이겨 주님께 공을 세우는 일에 부지런하니 참으로 어진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사촌형 최필공도 최필제를 언제나 존중하고 두려워했다. 나이가 어린 아우 뻘이지만 모든 일을 그와 의논하여 행하고 한 가지도 마음대로 처리하지 않았다. 최필공에게는 항상 천주교를 헐뜯고 배척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그는 천주교 신자들을 모조리 돌아가며 욕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도 그의 사촌인 최필제에 대해서만은 감히 흠잡아 말하지 못했다. 오히려 최필제의 자를 부르며 "천주교에서 취할 사람은 오직 자순 한 사람뿐"이라고 칭찬했다.

 

신유박해의 기운이 감돌고 그의 사촌형이 잡혀간 이틀 뒤 주님봉헌 대 축일을 맞아 이른 새벽 한길 가에 있는 약방의 안쪽 방에 몇 사람의 교우들과 함께 모여 축일 기도를 바치다가 포졸에 발각되어 오현달과 함께 잡혀 관아로 끌려갔다. 그는 옥중에서 배교를 강요당하고 형벌을 받았지만 그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동료를 고발하라는 어떤 유혹과 위협에도 오직 침묵하며 의연하여 오히려 관리들을 감복하게 하였다.

 

그는 옥중에서 그의 종형이며 신앙의 동지인 최필공 토마스를 만나 함께 옥고를 치르며 서로 격려하였다. 그러던 중 최필공이 먼저 정약종등과 함께 순교하자 그의 순교에 대한 열망이 더욱 굳어졌다.

 

그 때 늙으신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이 옥고를 다시 치르게 되자 너무 상심하여 병석에 누웠다가 세상을 떠났다. 옥중에서 아버지의 부음을 들은 최필제는 지극한 효성으로 애통해하며 관원에게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일시 귀가를 청하였다. 당시 조선의 형법에는 이를 허가하게 되어 있었다. 비록 죄인일지라도 일시 귀가하여 상주로서 의무를 행하게 했었다.

 

허락을 해준 관리는 그의 인품에 감복하여 이번 기회에 상례를 마치고 멀리 도망쳐 생명을 구하라고 넌지시 알려주었다. 그러나 최필제는 정한 날짜에 돌아왔다. 지극한 효성으로 상례를 마치고 정한 날짜를 어기지 않으려고 무한히 애쓰며 돌아와 국법을 준수하고 또한 공적 신의를 지켰다.

 

그는 돌아와 아버지가 대세를 받고 돌아가셨음을 기뻐하며 옥중 동료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귀에게 원수를 갚고 배교했던 것을 기워 갚기를 원하네. 내 가장 큰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하여 내 머리를 바치는 일이네."

 

그는 1801년 5월 14일 정철상 등 5명의 교우들과 함께 그의 소원대로 서소문 밖에서 순교의 피를 흘리며 자신을 주님께 봉헌했다.

 

[가톨릭신문, 2001년 4월 1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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