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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유박해 순교자들: 최창현 요한 - 성서의 첫 번역자, 가장 존경받은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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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65

신유박해 순교자들 (4) 최창현 요한


가장 존경받은 총회장, 최초로 성서 한글 번역

 

 

한국 사람으로서 복음성서를 맨 처음 읽은 사람은 문헌상으로 광암 이벽이다. 그러나 이 복음서를 최초로 한글로 번역한 사람은 호를 관천(冠泉)이라 부르던 최창현(崔昌顯, 요한 1759∼1801)총회장이다. 그는 한자로 된 복음서의 발췌본인 성경직해(聖經直解)와 성경광익(聖經廣益)에서 최초의 한글을 성서라 할 한글본 "성경직해"를 번역해냈다.

 

한글본 성경직해는 한문본 성경직해와 성경광익을 한글로 번역한 것인데 위 두 권의 한문본 중에서 당시 한국의 교회 생활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택해서 한 권으로 편찬한 것이다. 그래서 한글본 성경직해를 한 때 "성경광익직해"라 부르기도 했다. 한글본 성경직해에는 86개에 달하는 연중 주일과 축일의 복음 구절이 한글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것이 성서의 전체적인 번역은 아니다. 그러나 이 한글본에 실려있는 복음성서의 분량은 4복음서 전체의 구절 총 3709절 중에 30.68%에 해당하는 1138절이다. 초대 한국교회 신자들은 이 한글본 성서직해를 통해 우리말 성서를 읽을 수있었다. 그들은 최창현이 번역한 성경직해를 손으로 옮겨 적은 필사본으로 읽었는데, 1801년 신유박해 때 이름없는 한 여교우의 집에서 압수한 천주교 서적 중에서 이 책이 나오고 있었음이 "사학징의"의 기록에 있는 것으로 보면 일반신자에게까지 얼마나 널리 읽혀졌던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최창현은 성서의 첫 번역자지만 더욱 그를 기억하게 만드는 것은 그는 한국초대교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총회장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양 초전골의 중인출신이다. 그가 비록 중인 출신이지만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쓰며 견문을 넓혔고, 조용한 성품에 매우 슬기로웠으며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용감하게 행동하는 젊은이로 자라났다. 그는 광암의 권고로 복음선포가 이루어지던 해인 갑진년(1784년)겨울에 입교한 후 한결같은 신앙생활로 당대 가장 존경받는 덕망 높은 총회장으로 활약하였다.

 

황사영은 그의 백서에서 그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총회장 최창현은 을묘년에 순교한 최마디아(최인길 최장)의 족질인데 그의 집안에는 진실한 교훈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성교가 이 나라에 들어오자 남보다 먼저 입교하여 평화롭게 몸을 삼가고 공명하게 힘쓰기를 20년 동안 하루같이 하였습니다. 그는 보기에도 순수하고 말이 간단하면서도 옳았으며, 누가 혹 의혹이 생기거나 환난을 당하여 몹시 근심스럽고 답답할 때에는 그의 얼굴만 한번 보아도 자기가 당하고 있는 일이 그다지 큰 일도 아니요 어려운 일도 아님을 스스로 되었습니다. 또한 몇 마디의 말만 들으면 가슴이 시원하게 활짝 열렸으며, 도리에 대한 강론은 자세하고 분명하여 깊은 맛이 있으므로 비록 예사로 말하고 듣기 좋게 말하려고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다 즐겨 듣고 싫증이 나지 않아 사람의 마음 속 깊이 들어가므로 듣는 사람들에게 신령스러운 이익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의 천명에 순종하고 겸손함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왔으며 남보다 뛰어나게 다른 점도 없었고 또한 험잡을 행동도 없었습니다. 덕망이 교우들 가운데 제일 높았으므로 그를 사랑하고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관아에서도 최창현이 뛰어난 지도자로 교인의 영수임을 알고 체포하고자 했다. 그는 박해가 크게 벌어질 것을 예감하고 교우의 집에 피해 있었는데 신유년(1801년) 정월 초 닷샛날 몸이 불편하여 집으로 돌아와 조리하였다. 그런데 밀고자 김여삼이 이를 염탐하고 포도부장을 인도하여 아흐렛날 체포 당하게 되었다.

 

최창현은 그의 신앙의 동지들과 함께 옥고를 치르며 형벌을 받았는데 모진 매를 맞을 때는 기절하여 땅에 엎드려 마치 죽은 사람 같았다. 그러나 매질이 끝나고 관리가 죄목을 헤아리자 벌떡 일어나 십계명을 강론하여 밝혔다. 관리가 제4계에 부모를 효도로 공경한다는 대목에서 "내가 부모를 공경한다면 어찌 제사를 지내지 않느냐"고 따지자 그는 "잘 생각해보십시오. 밤에 잘 때에는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맛 볼 수가 없지 아니하오. 하물며 이미 죽은 사람이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 있겠소?" 하고 되물으며 천주교는 부모를 결코 그렇게 허례허식으로 공경하지 아니 한다고 했다. 포도청 심문과 금부에서 자신의 신앙을 용감히 증언한 그는 총회장답게 형리들 앞에서 십계명을 강론하고 호교문을 적어서 관리들에게 제출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의 순교의 피로 그 강론과 호교론이 주님의 진리임을 증거하였다.

 

덕망이 높아 그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양반출신들도 그를 존경하며 따르던 총회장 최창현은 교회창립 당시 신자로 사제가 없던 때 평신도에 의해 형성되었던 임시교단의 일원으로 임시성사집행에도 선임되어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 활동이 잘못임을 알고 즉시 중단하면서 자세 영입운동에 협력하고 주문모 신부 입국후에는 신부의 사목활동을 총회장으로서 충직하게 도왔다. 덕망이 교우들 가운데 가장 높던 그가 최필공, 적양종, 홍낙민과 함께 1801년 4월 8일(양) 순교의 빛나는 영광을 얻었을 때 그의 나이 43세의 장년이었다. [가톨릭신문, 2001년 3월 25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최창현 요한 - 성서의 첫 번역자

 

 

우리 나라 복음 선구자 광암 이벽 선생이 처음으로 찾아간 이들은 주인P급 친구들 가운데 학식과 덕망이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활기차고 박력있는 말을 듣고 곧 응하였는데 그 가운데 최인길, 김종교와 함께 최창현(1759-1801년)이 들어있었다.

 

최창현은 한양 초전골의 중인 출신이다. 그는 비록 중인 출신이지만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쓰며 견문을 넓혔고, 조용한 성품에다 매우 슬기로웠으며,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용감하게 행동하는 젊은이로 자라났다. 그는 복음선교가 이루어지던 해인 1784년 겨울에 광암의 권고로 입교한 뒤 한결같은 신앙생활로 당대 가장 존경받는 총회장으로 활약하였다.

 

황사영은 그의 백서에서 초대교회 최고의 평신도 가운데 한 사람인 정약종을 한없이 칭찬하여 소개하면서도 "그의 덕망은 관천(최창헌의 호)에 미치지는 못했지만…."이라 했다. 과연 최창현의 덕망은 모든 이가 우러러볼 만했다. 황사영은 백서 32행과 33행에서 그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총회장 최창헌 요한은 중인입니다. 을묘년에 순교한 최 마티아(최인길)의 족질인데 그의 집안에는 진실한 교훈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선교가 이 나라에 들어오자 남보다 먼저 입교하여 평화롭게 몸을 삼가고 공명하게 힘쓰기를 20년 동안 하루같이 하였습니다.

 

그는 보기에도 순수하고 말이 간단하면서도 옳았으며, 누가 혹 의혹이 생기거나 환난을 당하여 몹시 근심스럽고 답답할 때에서는 그의 얼굴만 한번 보아도 자기가 당하고 있는 일이 그다지 큰일도 아니요, 어려운 일도 아님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고, 몇 마디 말만 들으면 가슴이 시원하게 활짝 열렸습니다.

 

강론이 자세하고도 분명하여 깊은 맛이 있어, 비록 예사로 말하고 듣기 좋게 말하려고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다 즐겨 듣고 싫증이 나지 않아 사람의 마음속 깊이 들어가므로 듣는 사람에게 신비스러운 이익이 아주 많았습니다. 천명에 순종하고 남에게 겸손함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왔으며 남보다 뛰어나게 다른 점도 없었고, 또한 책망받는 행동도 없었습니다. 교우들 가운데 덕망이 제일 높아 그를 사랑하고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집이 입정동(笠井洞)에 있었으므로 호를 관천(冠泉)이라고 하였습니다. 조화진(배교한 밀고자)이 충청도를 염탐하여 최 요한이 교인의 영수임을 알았으나 그의 이름과 있는 곳을 몰라 체포하지 못했습니다. 이즈음 최 요한은 백해가 크게 벌어질 것을 알고 교우의 집에 피해있다가 신유년(1801년) 정월 초닷샛날 몸이 불편하여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 몸조리를 하는데, 초아흐렛날 밤중에 김여삼(밀고자)이 포도부장을 이끌고 와서 체포하여 포청에 가두었습니다.

 

십여 일 뒤에 치도곤 열 세대를 맞았는데, 매를 받을 때는 기절하여 땅에 엎드려 마치 묵은 사라 같더니, 매질이 끝나고 관리가 죄목을 세자 벌떡 일어나서 성교의 십계명을 강론하였습니다. 관리가 "네가 부모에게 효도하여 공경한다면 어찌하여 제를 지내지 않느냐?"고 물으니까 그는 "잘 생각해 보십시오. 밤에 잘 때에는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맛볼 수가 없지 아니하오? 하물며 이미 죽은 사람이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 있겠소?" 하고 되물으니 관리는 대답하지 못하고 마침내 그를 옥에 가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 뒤 정 아우구스티노(정약종)와 같은 날에 참형을 당하였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43세였습니다."

 

백서에 적혀있듯이 총회장이며 교우들 가운데 덕망이 가장 높아 존경받던 최창현 요한은 이승훈 베드로, 최필공 토마스,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이베르, 홍락민 루가,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1801년 4월 8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의 빛나는 영광을 얻었다. 포도청과 금부에서 용감하게 자신의 신앙을 분명히 밝힌 그는 총회장답게 형리들 앞에서 십계명을 강론하고 호교론을 써서 관리들에게 제출하였다. 그리고 그의 강론과 호교론이 주님의 진리임을 순교의 피로 증거하였다.

 

그는 한국교회 창립 당시의 신자였다, 평신도들이 세운 교회에 단 한 명의 사제도 없을 때, 성품성사에 대한 교리를 미처 알지 못하며 평신도가 임시 성사집행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최창헌도 선입되어 사제단으로 활동했다. 드러나 북경주교에서 이 활동이 잘못임을 듣고 곧 중단하면서 사제가 필요함을 절실히 깨달아 사제 영입 운동을 폈다. 최창현 요한은 이때 숙부인 최인길 회장을 도와 사제 영입 운동에 협력하였고,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뒤에는 신부의 사목활동을 충직하게 도왔다.

 

주문모 신부는 최창현이 덕망이 높고 그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를 총회장에 임명하여 신자들을 이끌도록 하였다. 그는 비록 주인이었지만 양반들도 그의 지도를 받아들였다. '조용하고 슬기로웠고 견식이 넓고 마음이 용감하고 확고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던 그를 '당시 교인들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을 바치던 총회장이었다'고 달레 신부는 그의 "한국 천주교회사"에 적고 있다.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복음성서를 맨 처음 읽은 사람은 문헌상으로 광암 이벽이다. 그런데 이 복음서를 처음 한글로 번역한 사람이 바로 최창현 요한이다. 그는 한자로 된 복음서의 발췌본인 "성경직해"와 "성경광익"에서 최초의 한글 성서라 할 한글본 "성경직해"를 번역했다. 한글본 "성경직해"는 한문본 "성경직해"와 "성경광익"을 한글로 번역한 것인데, 이 두 권의 책 가운데 당시 한국의 교회생활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택해서 한 권으로 편찬한 것이다. 그래서 한글본 "성경직해"를 한때 "성경광익직해"라 부르기도 했다.

 

한글본 "성경직해"에는 86개에 달하는 연중주일가 축일의 복음구절이 한글로 번역 수록되어 있다. 물론 한글본 "성경직해"는 성서 전체를 번역한 것이 아니다. 한자로 된 발췌본인 중국의 "성경직해"와 "성경광익"처럼 주일과 축일에 해당하는 성서만 번역하여 실은 책이다. 그러나 한글본 "성경직해"에 실려 있는 복음서의 분량은 4복음서 전체 구절 총 3,709절 가운데 30.68%에 해당하는 1,138절이다. 초대 한국교회 신자들은 이 한글본 "성경직해"를 통해 우리말 성서를 읽을 수 있었다.

 

달레 신부는 그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관천이란 호로 더 잘 알려진 창헌이라고 불리는 최 요한도 역관 지안의 아들로서 … 천주교에 나온 뒤로 모든 교회서적들을 자기 손으로 베끼고, 그것으로 크게 봉사하였다. 그의 책 베끼는 솜씨가 어찌나 평판이 높았던지 책을 가지고 싶은 교우들은 그것을 얻으려고 그를 찾아갈 정도였다. '주일과 축일 성경의 해석'이라는 한문책을 조선말로 번역한 사람이 그였다고 한다."

 

최창현 요한이 번역한 한글본 "성경직해"는 손으로 옮겨 적은 필사본으로 초창기 일반 신자사이에 널리 읽혀졌다. 이 사실은 1801년 박해 때 이름없는 한여교우 집에서 압수한 천주교 서적 가운데 이 책이 나왔음이 "사학징의"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천주교가 4복음서의 체계적 번역서를 갖게 된 것은 한기근 바오로 신부가 번역해 1910년에 출간한 "사서성경"이다. 그러나 순교자 최창현이 번역한 "성경직해"는 "사서성경"이 나온 뒤에도 교회안에서 널리 읽혀졌다. 한국교회가 박해속에서도 4복음서의 30.68%에 해당하는 한글본 복음서를 가질 수 있었다는 사실과 뛰어난 번역, 수려한 문체는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며, 그와 함께 최창현 요한도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경향잡지, 2000년 1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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