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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유박해 순교자들: 다시 그들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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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62

신유박해 순교자들 (1) 다시 그들을 기억하며

 

 

21세기가 시작되는 2001년, 금년은 신유박해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신유박해는 1801년(순조1년)에 일어난 우리 나라 최초의 전국적인 박해로, 조선시대 천주교의 4대 박해 가운데 하나이다. 이 박해는 1801년 1월 10일(음력)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금교령으로 시작되어 12월 22일(음력)에 반포한 "척사윤음"으로 끝났다.

 

신유박해는 초기 한국교회나 당시 조선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 박해의 의의와 영향을 간추려보면 첫째, 이전에 있었던 지역적, 부분적인 박해와는 달리 최초의 전국적이며 본격적인 박해로서 조선시대의 사목을 위해 어렵게 입국한 첫 사제인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고, 초대 교회 지도자들 대부분이 순교하거나 유배당하였다. 이로써 한국교회는 이후 두 번째 사제가 입국할 때까지 33년간 목자 없는 교회로 버려지고, 지도자마저 사라져 지리멸렬한 상태로 빈사상태에 이르는 타격을 받았다.

 

둘째, 천주교를 사악한 무리로 규정하는 반교문을 반포하여 천주교를 언제든지 박해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신자처벌의 선례를 남겨 신앙의 자유를 박탈됐다. 그리고 천주교를 또 반국가적 종교로 인식하여 배척하면서 천주교와 함께 서학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서양의 발달된 과학문명까지 배척하여 조선의 과학기술이 낙후되고, 근대화의 기회를 놓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셋째, 이 박해를 계기로 세도정권 수립의 발판을 마련했다.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가 11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으로 정권을 잡은 정수왕후 김씨는 천주교 배척을 명분으로 체제공 일파를 제거하고, 또 남인 공서파를 이용하여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과 노론의 시파를 물리치고 세도정권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넷째, 이 박해가 초대교회에 참혹한 타격을 주었지만 오히려 이후 교회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것은 살아남은 신자들이 목숨을 지키기 위해 심산유곡으로 숨어들어 교우촌을 이루며 신앙 생활을 영위함으로써 천주교가 오히려 전국으로 확산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다섯째, 신유박해를 거치며 교회의 지도층이 양반 선비층에서 서민계층으로 그 중심으로 옮겨져 만중신앙으로 자리잡고 깊이 뿌리 내려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제 신유박해 200주년을 맞이하여 이 뜻깊은 박해 전후기에 순교한 증거자들의 삶과 죽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 신유박해 전후의 순교자들을 살펴보려는 것은 단순히 순교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위대한 증거자들의 삶과 죽음을 다시 생각해야할 또 다른 까닭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한국교회의 박해시기를 교회 창설 때인 1784년부터 교구가 설정되던 1831년까지를 초기박해기로, 교구설정 이후부터 신교의 자유가 묵인되던 1882년까지를 후기 박해기로 나누어보면 초기와 후기에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초기 박해기의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연구와 노력에 의해 교회가 창설되고 유지, 발전하던 평신도의 교회로 주님의 은총속에 성직자의 종교 교육 없이 평신도가 스스로 교리를 체득하며, 신앙을 토착화했던 교회로 성령이 직접 인도하신 교회라 한다면, 후기 박해기는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교황청의 허가로 조선선교를 맡아 입국하여 성직자 중심의 교회로 되면서, 교회문화가 서구화되고, 선교사의 사목적 특성에 종속화 되어 역동하던 평신도의 토착화한 영성이 침잠해가는 교회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초기 박해기에 해당하는 신유박해 전후의 순교자들은 서양선교사들의 사목적 정책이나 사상적 영향을 덜 받은 순수한 한국인의 영성을 지닌 순교자들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연유로 신유박해 전후의 순교자들을 살펴보며 생각하려는 것은 그들을 통해 그들을 총해 초기 교회의 토착화한 신앙과 그 열절한 한국인의 영성을 살펴봄으로써 새천년을 맞고 있는 우리 시대에 절실히 요청되는 신앙생활에 대한 새로운 열정과, 한국인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새로운 방법과 한국인의 사고와 정서에도 거부감 없는 복음의 새로운 표현을 찾아보고자 함에 소중한 뜻을 둔다.

 

다음으로 우리는 우리의 가슴에 살아 있는 그래서 우리의 일상의 삶 안에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함께하는 순교성인을 가질 수 있도록 하려는데 의의를 두려한다.

 

우리는 지금 프랑스 외방전교회의 노력으로 소중한 한국순교성인 위를 모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순교성인의 탄생에는 시복시성의 복잡하고 엄격한 교회법 절차에 치중한 나머지 그 성인들 가운데 몇몇 위를 제외한 대부분의 성인들에 대해서는 사랑과 존경을 느끼지 못한 체 모셔지기만 하여 마치 관제성인을 모시는 것 같은 처지가 된 현실을 깊이 성찰해야 하겠다.

 

이제 바뀐 교회법에 따라 각 교구에서 추진되고 있는 시복시성운동에 즈음해, 먼저 그 대상자들에 대한 다양하고 적절한 소개로 우리 마음에 새겨 사랑할 수 있는 성인이 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이 기획이 작은 도움이 되기를 간절한 빈다.

 

[가톨릭신문, 2001년 3월 4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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