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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유박해 순교자들: 문영인 비비안나 - 궁녀 출신의 동정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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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56

신유박해 순교자들 (25) 문영인 비비안나


궁녀 출신의 동정 순교자, 목이 잘리자 흰피가 솟아

 

 

문영인 비비안나(1775~1801)는 강완숙과 함께 순교한 동정녀들 중 한 사람이다. 그녀는 중인계급의 양가출신으로 아버지와 숙부가 미관말직에 있었는데, 다섯 딸 중에 셋째 딸이었다. 그녀가 일곱 살 때 궁녀를 모집해 가는 관리가 찾아왔다. 아버지는 두 언니를 숨겨두고 영인은 어리니 염려하지 않았는데 관리들은 어린 영인을 데려갔다. 그래서 그녀는 궁궐에서 자랐다.

 

총명하고 뛰어난 용모로 보는 이를 감탄하게 했던 영인은 열다섯 살 되던 해에 궁녀로 머리를 올리고 글씨를 잘 썼기에 문서 쓰는 일을 맡아보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외교인이었으나 어머니가 열심한 신자로 자기 딸이 궁중에 있어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것 때문에 근심했다. 가끔 영인이 집에 다니러 나올 때마다 어머니와 언니들이 간곡히 신앙생활 하기를 권고하면 그녀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어머니와 언니들이나 잘 신봉하셔요. 나는 궁중에 갇혀 있는 몸이라 여러 가지 미신행사에 참석해야 되니 지금은 너무 어려워요. 내가 늙어서 궁에서 나올 수가 있게되면 그 때에 신봉하겠어요" 했다.

 

영인은 어느 날 궁녀들과 어울려 저녁 다과를 먹고 즐기다 헤어져 물러갈 때 별안간 몽둥이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고 정신이 혼란하여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병은 점점 더 깊어져 그녀는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뛰어난 미모와 재능으로 왕의 총애를 받았지만 궁녀의 신분으로 신앙생활이 불가능했던 그녀는 이 까닭 모를 병으로 궁을 나온 것이 계기가 되어 교리를 배우고 기도하며 세례명을 비비안나로 하여 입교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례성사를 받은 다음 날 그녀는 병이 완전히 나았다. 이 급작스런 완쾌가 비상한 은혜였는데 그것이 명백한 기적임을 알 수 있는 일이 계속되었다. 궁에서는 왕의 총애를 받는 영인을 위해 의원과 간병할 궁녀들을 보내왔다. 그런데 세례성사를 받고 완쾌한 그녀는 궁에서 의원과 궁녀가 집에 들어오기만 하면 한쪽 팔과 다리가 마비되는 현상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무수한 약을 먹고 침을 맞게 되었는데 궁중의 의원이 그녀의 집을 떠나면 거뜬히 낫고 궁중에서 누가 오면 병이 나는 이 기이한 현상은 계속되었다.

 

문영인은 궁에서 온 의원과 궁녀들이 나가자마자 아무런 고통 없이 다시 일어날 때마다 하느님께 감사 드리며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아주 건강한 몸을 위해 약을 많이도 허비하고, 침도 쓸데없이 많이 놓는구나!" 그녀는 더욱 읽고 기도하는 데에만 전념하여 죄의 그림자도 정성껏 피하여 그 열심한 신앙생활의 명성이 교우들 사이에 알려지기도 했다. 그녀는 성인들의 전기를 읽고 그들을 본받으려 노력하며 그들을 따라 순교하려는 열의를 드러냈다. 의원들은 3년 동안 그들이 가진 모든 의술로 치료했지만 그 이상한 병을 고칠 방법이 없음을 알고 치료를 포기하였고, 그녀의 이름을 궁녀의 명부에서 삭제했다. 자유의 몸이 된 그녀는 물론 아무런 병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다만 깊은 감사를 드리며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녀는 김섬아 수산나와 함께 강완숙을 도와서 주문모 신부의 시중을 들고, 교우간의 연락을 취하고, 피신하는 교우들을 은밀히 숨겨주기도 하며, 전교에 힘을 써 입교자를 내는 등 모든 일들을 모범적인 헌신과 효성으로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나고 신부는 딴 곳으로 피신하자 문영인은 어머니께로 돌아와 순교의 시기를 기다렸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원치 않으시는가!"하며 조용히 기다리던 그녀는 포졸들의 가택 수색으로 그녀의 은밀한 신앙생활의 단서가 발각되었다. 포졸이 "너도 천주교인이냐?"하고 묻자, "그렇습니다, 확실한 천주교신자 입니다"라고 서슴지 않고 대답한 문영인은 포졸들에게 다과를 대접하고 어머니께 하직인사를 드린 후 포도청으로 끌려갔는데 그 때 나이 26세였다.

 

관리들은 그의 젊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궁에서 그렇게 잘 교육받은 너같이 젊은 여인이 어떻게 국법이 금하는 사교를 따를 수가 있느냐. 도대체 국법의 준엄한 형벌을 받아 죽고 싶단 말이냐!"하고 다그치자, "저는 제가 공경하는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유혹의 방법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관리들은 연약한 여인에게 그토록 강인한 저항력이 있음에 화가 나서 "궁녀였던 여인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하며 다른 이들과는 달리 더욱 혹독하게 고문하였다.

 

구전에 따르면 그녀의 상처에서 흐르던 피가 솟구쳐 꽃으로 변해 떠올랐다고 한다. 관리들은 이러한 현상에 놀라워하며 목격한 모든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절대로 발설하지 못하게 단속했다고 한다. 문영인이 형장에 끌려갈 때 포졸들은 구경꾼들을 물리치려 했는데 그녀는 "마음대로 보게 놔 두셔요. 짐승 죽이는 것은 얼마든지 보러 가는데, 사람 죽이는 것을 왜 못 보겠어요"하고 만류했다. 마침내 참수형이 집행되고 그녀의 목을 칠 때 그 상처에서 젖과 같은 흰 피가 흘러나와 보는 이들을 놀라게 하였다. 주님께서는 이 동정순교자인 여인에게 로마의 동정순교자 성녀 마르티나를 위해 보여주셨던 기적을 다시 내려 주셨다. [가톨릭신문, 2001년 9월 2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젖같이 하얀 피를 흘린 동정 순교자 문영인 비비안나

 

 

주문모 신부를 도와 우리 나라 초대교회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여회장 강완숙 골롬바를 두고 황사영은 그의 백서에서 당시 조선교회에서 남녀를 통틀어 그보다 더 큰 공로자는 없다고 했다. 1801년 음력 5월 22일 서소문 밖에서 여회장 강완숙이 순교할 때 일곱 명의 다른 동료 순교자들이 함께 참수되었는데 이 가운데 넷은 여교우였다. 이들은 강완숙과 함께 옥중에서 열심히 기도하여 감옥을 기도소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죽음의 날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영적 기쁨에 찬 모습을 보였다.

 

사형이 집행되던 날, 수레를 타고 형장으로 끌려가는 동안 그들은 기도하고 서로 격려히며 주님을 찬양하였다. 군중은 여교우들의 얼굴이 거룩한 기쁨으로 빛나는 모습을 보고 크게 놀라며 감동했다. 형장에 이르자 그들이 사형을 주재하던 관리에게 말하였다.

 

"법에는 사형을 받는 자들의 옷을 벗기라 하였으나 여자들을 그렇게 다루는 것은 온당치 않으니 우리는 옷을 입은 채로 죽기를 청한다고 상관에서 전하시오."

 

이 청이 받아들여지자 그들은 만족하여 성호를 긋고 머리를 형리에게 내밀었다. 이렇게 하여 우리 순교자들의 헌신이 이루어졌다. 이때 순교한 다섯 명의 여교우들은 강완숙(姜完淑), 강경복(姜景福), 문영인(文榮仁), 김연이(金連伊), 한신애(韓新愛)였다.

 

조선시대에 여자가 형벌을 받을 때는 본디 이름은 없앴으며, 기록에도 성을 밝히지 않고 순전히 재판을 위해 그들에게 지어준 이름으로만 불렀기에 여자 순교자들의 이름은 대부분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강완숙과 그 동료 순교자들의 성은 실록(순조, 원년, 정범조 "해좌집")에 밝혀져 있고, 문영인의 성이 문씨라는 것도 다른 문헌("징의")에 기록되어 있다.

 

이 다섯 여교우들의 판결문은 거의 비슷하다. 주문모 신부한테 교리를 배워서 세례를 받고 입교하여 교회일에 적극적으로 헌신하였으며, 추적 받는 교우들을 여러 번 피신시켰고 상본과 책을 비롯한 성물들을 집에 숨겨두었다는 것이다.

 

이들 가운데 문영인(비비안나, 1776?-1801년)은 중인계층의 양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숙부와 미관말직에 있었는데 다섯 딸 가운데 셋째 딸인 영인이 일곱 살이 되었을 때 궁녀를 모집해 가는 관리가 그의 집을 찾아왔다. 아버지는 두 언니를 숨겨두고 영인은 나이가 어리니 염려하지 않고 두었는데 관리들은 그만 어린 영인을 데리고 가버렸다. 이리하여 영인은 궁궐에서 자라게 되었다. 총명하고 뛰어난 용모로 보는 이를 감탄하게 했던 영인은 열다섯 살 되던 해에 궁녀로 머리를 올리고, 문서를 쓰는 일을 맡았다.

 

그때 영인의 아버지는 교인이 아니었으나 열심한 신자였던 어머니는 자기 딸이 궁궐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음을 몹시 근심했다. 영인이 집에 다니러 가끔 나올 때마다 어머니와 언니들은 그에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간곡히 권고했다. 그러면 영인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어머니와 언니들이나 잘 믿으세요. 저는 궁에 갇혀있는 몸이라 여러 미신행사에 참석해야 지되니 지금은 너무 어려워요. 제가 늙어 궁에서 나올 수 있게 되면 그 때 믿겠어요" 했다.

 

어느 날 영인은 궁녀들과 어울려 저녁 다과를 먹고 돌아오다가 별안간 몽둥이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아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치료를 받았으나 병은 점점 깊어져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어머니는 딸의 상태가 위험한 것을 보고 어느 때보다 강하게 입교를 권했다. 궁녀의 신분으로 신앙생활이 불가능했던 그는 까닭 모를 병으로 궁을 나온 것이 계기가 되어 교리를 배우고 기도하는 가운데 비비안나로 세례를 받아 입교하였다. 그의 병은 놀랍게도 세례성사를 받은 다음날 완전히 나았다. 이 놀라운 체험을 한 영인은 더욱 열심히 기도하며 교리를 배웠다.

 

이 급작스런 완쾌가 예사롭지 않은 은혜였는데 그것이 명백한 기적임을 알리는 일이 계속되었다. 궁에서는 임금의 총애를 받던 영인을 위해 의원과 간병할 궁녀들을 보냈다. 그런데 세례성사를 받고 완쾌한 영인은 궁에서 의원과 궁녀가 집에 들어오기만 하면 한 쪽 팔과 다리가 마비되었다. 궁중의원들이 들고 온 약을 먹고 침도 많이 맞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의원이 돌아가면 거뜬히 낫고 궁중에서 누가 오면 병이 생기는 기이한 현상이 계속되는 자신의 상태를 보며 영인은 하느님께 감사하였고 소리내어 웃으며 말하였다. "건강한 몸을 위해 많은 약을 허비하고, 침도 쓸데없이 많이 맞는구나."

 

읽고 기도하는 데에만 전심하여 죄의 그림자도 피하는 열심한 그의 신앙생활은 곧 교우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그는 성인들의 전기를 읽고 그들을 본받으려 노력하며 순교하려는 열의를 드러냈다.

 

의원들은 3년동안 그들이 가진 모든 의술을 다해 영인을 치료했으나 이상한 병을 고치지 못하여 치료를 포기하였고, 마침내 그의 이름은 궁녀 명부에서 삭제되었다.

 

자유의 몸이 된 그는 아무런 병도 나지 않았으며, 다만 깊이 감사하며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는 김섬아 수산나와 함께 강완숙을 도와서 주문모 신부의 시중을 들고, 교우끼리 연락을 취하며 피신하는 교우들을 은밀히 숨겨주면서 전교에도 힘써 입교자들을 내는 등 모범적인 헌신과 효성으로 모든 일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나자 주문모 신부를 딴 곳으로 피신시킨 뒤 문영인은 어머니에게 돌아와 순교할 날을 기다렸다. '천주께서는 나를 원치 않으시는가?' 하고 생각하며 지내던 어느 날 포졸들이 그의 집을 수색하러 들이닥쳤다. 영인이 신앙생활을 한 흔적을 찾아낸 포졸들이 "너도 천주교인이냐?" 하고 묻자, 그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확실한 천주교 신자입니다." 영인은 포졸들에게 다과를 대접하고 어머니께 하직인사를 드린 다음 포동청으로 끌려갔다. 그 때 그의 나이가 26세로 전해진다.

 

관리들이 비비안나의 젊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궁에서 그렇게 잘 교육받은 너같이 젊은 여인이 어찌 국법으로 금하는 사교를 따를 수가 있느냐, 도대체 국법의 준엄한 형벌을 받아 죽고 싶단 말이냐!"하고 다그치자 영인은 대답했다. "저는 제가 공경하는 천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어떠한 유혹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관리들은 연약한 여인에게 그토록 강인한 저항력이 있음에 화가 나서 "궁녀였던 여인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하며 다른 이들과 달리 더욱 혹독하게 고문하였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그의 상처에서 흐르던 피가 꽃처럼 변해 솟구쳤다고 한다.

 

사형선고를 받은 영인이 형장에 끌려갈 적에 포졸들이 구경꾼들을 물리치려 하자 "마음대로 보게 놔두세요. 짐승 죽이는 것은 얼마든지 보게 하면서, 사람 죽이는 것을 왜 못 보게 하세요?" 하며 만류했다.

 

마침내 참수형이 집행되어 그의 목을 치자 젖과 같은 하얀 피가 흘러나와 보는 이들을 놀라게 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종정 순교자인 이 여인에게 로마의 동정 순교자 성녀 마르티나에게 보여주셨던 기적을 다시 내려주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문영인 비비안나는 그토록 그리던 주님 품에 안겼다. [경향잡지, 1997년 12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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