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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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유박해 순교자들: 강완숙과 아들 홍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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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55

신유박해 순교자들 (24) 강완숙과 아들 홍필주


혹독한 형벌 견디며 '옥중 기도'

 

 

강완숙 골롬바를 체포한 관리들은 주문모 신부의 숨은 곳을 알아내려고 여섯 차례나 무서운 주리를 틀었다. 그러나 그 혹형 중에서도 강완숙은 입을 열지 않았고, 마치 감각이 없는 사람같이 자세를 흩뜨리지 않아 형리들이 자기들끼리 "저건 여자가 아니고 귀신이다"하며 감탄했다.

 

강완숙은 형벌이 잔혹할수록 더욱 굳건한 모습으로 옥중관리들 앞에서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고 하느님의 진리가 옳음을 동양고전과 공자와 성현의 글에서 인용하여 증거하였다. 강완숙의 정연한 논증과 해박한 지식에 관리들은 더욱 감탄하여 "유식한 여인네, 비길 데 없는 여인"이라 부르며 비상한 놀라움에 망연자실할 지경이었다. 관리들은 이 때문에 더욱 그녀를 배교시키려고 안간힘을 다해 가장 심하고 잔인한 형벌을 생각해내어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러나 그들의 형벌이 혹독한 만큼 그보다 더 높은 강완숙의 초자연적인 인내가 확인될 뿐이었다.

 

강완숙과 함께 옥고를 치르던 동료 여교우들은 이제 그 몹쓸 감옥을 기도소가 되게 했다. 그들은 참혹한 옥고를 치르며 함께 기도하고 서로 격려하며 위로하여 감옥이 영신수련소가 되게 하였다. 이 아름다운 옥중 신앙공동체의 눈물겨운 모범을 주님께서는 또한 깊은 은총으로 지켜주시는 듯 했다. 죽음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마치 제헌의 때를 기다리는 듯이 그들은 더욱 기뻐하였고, 특히 그들이 죽기 전날에는 신령한 영적 희열에 취한 것 같았다.

 

그들은 그렇게도 열렬히 바라던 날 1801년 5월 22일에 강완숙과 동료 여교우 4명은 수레를 타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길을 가는 동안 그들은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기도하고 서로 격려하며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군중은 그들의 얼굴에 거룩한 기쁨이 빛나는 것을 보고 놀랐다. 형장에 이르러 강완숙은 형을 집행하는 관리에게 말했다.

 

"법에 사형을 받는 사람들의 옷을 벗기라고 명해졌으나 여자들을 그렇게 다루는 것은 온당치 않을 것이니 옷을 입은 체로 죽기를 청한다고 상관에게 알리시오."

 

허락이 내려졌고 그 순결한 여인들은 만족하게 여기며 십자성호를 긋고 머리를 형리에게 내밀었다.

 

강완숙 골롬바가 사제를 도와 펼친 사도직 활동의 당대함과 활달함 그리고 무섭도록 놀라운 치밀성과 용감함은 한국 여성만이 갖는 특성과 위대함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특히 그녀의 가정생활과 동료 여인들을 이끈 심원한 인간미와 신앙심 그리고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해 보여준 덕성 가운데 특히 그 지혜와 인내는 영원한 한국의 여인상으로 삼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녀가 옥중에서 보여준 모성애로 전실의 아들 홍필주(필립보, 1774~1801)를 격려하여 순교의 길로 나아가게 한 대목을 잠시 살펴보자. 홍필주는 충청도 덕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강완숙 골롬바가 후처로 결혼한 홍지영의 전실 소생인 아들이다. 그는 본래 성품이 착해서 계모인 강완숙을 따라 입교하여 신자가 되었는데, 처음에는 신앙생활에 열성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계모를 친어머니처럼 모시며 따랐는데, 강완숙이 한양으로 올라왔을 때에 함께 와서 주문모 신부를 은밀히 모시면서 주위의 교우들이 감탄할 정도로 열성적인 신자로 바뀌었다. 홍필주는 매일 미사에 복사하면서 어머니 강완숙과 함께 주문모 신부의 손발이 되어 열성적으로 헌신했다.

 

신유박해가 일어나 신자들이 체포당할 때 그도 어머니와 함께 연행되어 문초를 받았다. 그는 심문 중에 특히 주문모 신부의 행방에 대해 혹독한 추궁과 고문을 받았다. 그도 어머니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 어려운 옥중생활의 고통을 잘 견디어냈으나 시간이 흐르고 고통은 끝이 없어 점차로 마음이 흔들려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강완숙은 이때 아들의 신앙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몹시 염려하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옥에서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먼발치로 아들을 보게 되자 그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예수님께서 네 머리 위에서 너를 보고 계신다. 네가 그와 같이 눈이 어두워 스스로 멸망할 수 있느냐. 내 아들아! 용기를 내고 천당 복을 생각하여라!" 어머니의 격려를 받은 홍필주 필립보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용감하게 신앙의 증거자가 되었다.

 

홍필주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용열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지만 새어머니 강완숙을 모실 수 있었기에 순교자가 될 수 있는 영광을 얻었다. 그는 1801년 8월 27일(음력) 서소문 밖에서 다른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을 받고 승리하니 그때 나이 28세였다.

 

아들을 격려하여 그 뒤를 따르게 하고 먼저 순교로 자신을 제헌한 서소문 밖 순교자 강완숙이 하늘나라로 개선해 갈 때 최인철, 김현우, 이현, 홍정호 등 남자교우와 함께 강완숙의 영원한 신앙동지인 문영인, 한신애, 강경복, 김연이 등 여자교우들 또한 함께 순교하였다. 이들 여교우들이 만약 그대로 강완숙의 집에서 신앙공동체를 지속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우리나라 최초의 수도회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이들의 순교를 보기로 하자.

 

[가톨릭신문, 2001년 8월 26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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