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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유박해 순교자들: 강완숙 골룸바 - 주문모 신부 모신 첫 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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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54

신유박해 순교자들 (23) 강완숙 골룸바


주문모 신부 모신 '첫 여회장'

 

 

낙엽이 진 가지에 하얗게 서리가 피고, 하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자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체포령이 내려진 주문모 신부를 한집 식구도 눈치 채지 못하게 뒷간 장작나무 광에 숨겨 놓고 간을 말리며 지낸 지가 벌써 여섯 달이 됐다. 그런데 이제 겨울이 접어들면 추위를 막을 수 없는 광속에 신부님을 더 이상 모실 수가 없다. 그러나 포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는 신부님을 모시는 일에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도대체 시어머니의 신앙적 결단과 의지가 어떤지를 알 수 없으니 사랑방에 모시자고 의논해 보기도 어려운 노릇이다.

 

그녀는 마침내 시어머니의 뜻을 알아보기 위해 단단한 결심을 하고는 먹지도 않고 잠도 거의 자지 않은 채 탄식하며 울기만 했다. 며느리가 이토록 근심하며 울기만 하는 까닭을 알지 못하는 시어머니는 애가 탔다. 의원의 진맥도 싫다고 거절하는 며느리는 "어머님, 저의 병은 제가 압니다. 제 병은 마음에 든 병입니다" 하며 막무가내로 울기만 했다. 며느리가 점차 탈진하여 기진 해 가자, 며느리를 잃을까 두려워하던 시어머니는 울면서 말했다. "네 마음에 든 그 깊은 병의 사연을 끝내 내게조차 말하지 않으니 내 비록 억지로 말하게 하지는 못하겠지만 너 하나 믿고 사는 내가 이대로 혼자 죽게 할 수는 없다. 이럴 양이면 차라리 나도 너와 함께 죽겠다" 하고 시어머니도 식음을 전폐했다. 시어머니의 단단한 결심을 보고 못내 기뻐하며 그녀는 비로소 용기를 얻어 의논했다. "신부님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우리 영혼을 구하기 위해 여기 오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갚기 위하여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신부님은 지금 피신하실 곳도 없으십니다. 이 일을 생각하면 제가 목석이 아닌 바에야 어찌 괴롭지 않겠습니까? …어머님, 저는 어머님의 덕행을 보고 위로를 받습니다. 신부님을 우리가 모실 수 있도록 어머님은 신부님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어머님께서 이 일에 동의하신다는 약속을 해주신다면 저는 곧 마음의 평화를 얻겠습니다. 그리고 전에 가졌던 기쁨을 되찾아 어머님께 죽을 때까지 효성을 다하겠습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태산처럼 믿고 비장한 다짐으로 며느리의 뜻대로 신부님을 사랑방에 모시게 했다. 이렇게 신중한 확인을 하며 우리나라에 오신 최초의 목자 주문모 신부를 포도청의 그 서릿발같은 탐색의 눈을 피해가며 6년간 사목할 수 있게 한 용감하고도 치밀한 여장부가 바로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1760~1801)이다.

 

순교자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여회장인 강완숙은 본래 충청도 내포지방의 향반(鄕班) 출신이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몹시 영리하고 성격이 활달한데다 뛰어난 통찰력과 곧고 단단하며 용감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착하고 너그러워 어머니의 까다로운 성격을 잘 참아냈다. 고결했던 그녀의 마음은 보다 높은 종교적인 것을 갈구하고 일찍이 불교에 뜻을 두고 출가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충청도 덕산에 살던 홍지영에게 후처로 시집갔으나 남편의 성품이 용렬하여 더욱 깊은 시름 속에 삶의 의미를 찾게 되었다. 그 무렵 천주교가 충청도까지 전해져 친척으로부터 천주교에 대한 말을 듣고 "천주라면 하늘과 땅의 주인일 것이다. 이 종교의 이름이 바르니 그 교리는 진리일 것이다"하고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얻어 단숨에 읽었다. 그리고 그 깊고 위대한 진리에 감명을 받아 크게 기뻐하며 천주교에 열중하여 신자생활의 첫걸음부터 영웅적인 덕행을 갈망하게 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 때에는 감옥에 갇힌 교우들에게 먹을 것을 갖다주며 돌보다가 그녀 또한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옹졸한 남편은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겁이 나서 별거를 요구했다. 강완숙은 이로 인해 남편과 헤어져 서울에 살게되면서 여러 교우들과 접촉하게 되었고, 더욱 전교에 힘쓰며 특히 사제영입운동에 투신하여 지황(池璜 샤바)을 도와 주신부의 영입에도 기여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의 탁월한 열의를 보자 즉시 세례를 주고 최초의 여회장(女會長)으로 삼아 교회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그녀의 탁월한 덕성은 여회장 직을 총명하게 수행할 뿐만 아니라 남편과 헤어질 때 아들을 버리고 며느리를 따라와 함께 사는 시어머니와 전처의 아들을 영세입교시키고 많은 처녀와 부녀자들을 감화시켜 입교하게 하였다. 그리고 당시 국왕인 정조의 사제가 되는 은언군 이인(李咽)이 그의 아들 상계군의 반역죄에 연루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자, 그의 거처인 경희궁에 쓸쓸히 남아있던 부인 송씨와 며느리인 과부 신씨를 찾아 그들의 불행을 동정하여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받아 끝까지 신앙을 지키게 하였다.

 

1801년 순조 원년에 전국적인 박해가 시작되자, 그 해 2월 24일 가족과 함께 강완숙도 체포되었다. 그녀는 체포당하면서도 주문모 신부를 안전하게 피신시켰다. 그러나 주신부는 수많은 교우들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고통 속에 죽어감을 가슴 아프게 여겨 스스로 자수하고 순교하였다. 강완숙은 주신부의 순교소식을 옥중에서 듣고, 치마폭을 찢어 주신부의 업적을 적어서 후세에 남기고자 하였으나 애석하게도 그 자료는 전해지지 못했다. [가톨릭신문, 2001년 8월 19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교수)]

 

 

한국의 새로운 여성상을 보여준 강완숙

 

 

낙엽이 지고 앙상한 가지에는 아침마다 하얗게 서리가 피고 하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자 강완숙은 초조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한영익의 밀고로 체포령이 내려진 주문모 신부를 한집 식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뒷간 장작나무 광에 숨겨놓고 애간장을 태우며 지낸 지가 벌써 석달이 넘었다. 그런데 하루가 다르게 추워지는 날씨 때문에 허술한 광속에서 더 이상 신부님을 모실 수가 없었다. 눈에 불을 켠 포졸들이 찾고 있는 신부님을 모시는 일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시어머니의 속뜻을 아직은 알 길이 없는 터라 어떻게 신부님을 사랑방에 모시자고 의논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자칫 신부님의 거처가 탄로 나는 날에는 무슨 변고를 당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처지였다.

 

그녀는 이러한 안타까운 심정에 괴로워하다가 마침내 병들어 눕게 되었다. 시어머니의 뜻을 알아야 심부님을 모시는 일을 의논할 수가 있는데 도대체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잠도 자지 않고 먹지 않은 채 탄식하며 그저 울기만 했다. 며느리가 이토록 근심하여 울기만 하니 시어머니는 속수무책으로 애만 태웠다. 며느리가 점차 기운을 잃고 탈진하여 기진해지자 자뭇 심각해졌다. 며느리를 잃을까 두려움에 사로잡힌 시어머니는 마침내 며느리에게 눈물로 말했다 "내 마음에 든 그 깊은 병의 사연을 끝내 나에게는 말조차 하지 않으니 내 비록 억지로 말하게 하지는 못하겠지만 너 하나 믿고 사는 내가 이래도 너를 혼자 죽게 할 수는 없으니 이럴 양이면 차라리 나도 너와 함께 죽겠다." 시어머니도 식음을 전패했다.

 

시어머니가 죽음으로써 삶을 함께 하겠다는 이 단단한 결단을 보고 그녀는 못내 감격하며 또한 기뻐하였다. 비로소 용기를 얻은 그녀는 시어머니께 의논했다.

 

"신부님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우리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갖기 위하여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신부님은 지금 피신하실 곳도 없으신 형편입니다. 이 일을 생각하면 제가 목석이 아닌 바에 어찌 괴롭지 않겠습니까? … 어머님, 저는 지금 어머님의 덕행을 보고 위로를 받습니다. 신부님을 우리가 모실 수 있도록 신부님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어머님께서 이 일에 동의하신다는 약속을 해주신다면 저는 곧 마음의 평화를 얻겠습니다. 그리고 전에 가졌던 기쁨을 되찾아 어머님께 죽을 때까지 효성을 다하겠습니다."

 

시어머니는 이미 며칠을 굶은 채 며느리의 결의에 찬 말을 들으며 그 일이 얼마나 위험하며 또 소중한 일인가를 깨닭았다. 말없이 한동안 반짝이는 눈빛으로 마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시어머니는 생각했다. 못난 아들의 두 번째 아내로 들여온 며느리, 전처의 어린 아들과 딸을 그토록 지성으로 길러낸 며느리, 지극한 효성으로 시어머니를 봉양한 며느리, 마침내 옹졸한 아들이 제 복을 차버리듯 이 며느리와 별거할 때 미어지는 가슴으로 아들을 버리고 며느리를 따라서 서울로 이사오기까지 믿고 의지하던 며느리, 시어머니는 조용히 며느리의 손을 굳게 잡았다. 그리고 태산처럼 믿고 비장한 다짐으로 며느리의 뜻을 따르겠다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렇게 신중한 확인을 하며 우리 나라에 오신 최초의 목자 주문모 신부를 포도청의 그 서릿발같은 탐색의 눈을 피하여 여섯해 동안이나 사목할 수 있도록 한 용감하고도 치밀한 이 여장부가 바로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1760-1801년)이다.

 

황사영은 그의 백서(帛書)에서 순교자요, 한국 최초의 여회장으로서 특히 여섯해 동안 사제를 숨겨 모신 강완숙의 지극한 치밀함과 놀라운 대담성을 칭찬하여 "당시 조선교회의 남녀를 통틀어 그녀를 따를 공로자는 다시없다."고 하였다.

 

강완숙, 그녀는 분명 선구자의 고독과 선각자적인 연민을 더없이 곱고도 치열하게 불태운 한국의 새 여인상으로 민족의 구원사에 부각되어 있다. 그녀는 문화사적으로 그리고 한국의 여성사적 측면에서도 사임당 신씨와 견줄 수 있는 또 다른 모습으로 한국의 새 여인상을 귀중하게 보여주고 있다. [경향잡지, 1997년 1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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