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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교회: 방글라데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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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1 ㅣ No.30

[세계 교회는 지금] 아시아의 교회 : 방글라데시 교회

 

 

평일에 주일미사 보는 교회

 

동남아나 인도 등이 그렇듯이 방글라데시에서도 각 종교별로 고유한 휴일을 국가 공휴일로 다 인정해 준다. 우리 나라에서 불교의 초파일이 공휴일로 지정된 것이 해방 후에도 몇 십 년이 지난 뒤였음에 비춰보면, 이들 나라가 “종교간 평등”에 매우 예민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방글라데시에서도 이슬람은 물론 불교인과 힌두인들에게 정부가 인정한 종교적 휴일이 있으며, 비록 인구의 0.3%밖에 안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크리스마스가 국가 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예전에는 성금요일도 공휴일이었다.

 

그런데 방글라데시 정부가 약 20년 전에 (서구 그리스도교식의) 토일 휴무제를 (이슬람식의) 금토 휴무제로 바꾸면서 이 휴일은 자동으로 없어졌다. 크리스마스는 공휴일로 남아있었으나, 일요일인 부활절은 졸지에 “평일”이 된 반면, 새로이 공휴일로 지정되지는 않았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공휴일 하나가 어영부영 없어진 것이다.

 

일요일인 부활절 주일이 공휴일이 아닌 근무일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주일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부활주일에 시험 일정이 잡히는 때도 있다. 여러 가지로 불편해서 최근에는 새로 공휴일로 지정해 달라는 운동도 벌어지고 있다.

 

본당 사제들은 학생들이 참석하도록 방과 후에 주일미사 시간을 따로 잡는다. 공무원인 그리스도인들은 주일미사에 참석하고자 두 시간 정도 잠시 나갔다 올 수 있지만, 사기업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세속주의를 원하는 교회

 

파키스탄이 인도와 갈라져 독립하게 된 것도 힌두교와 이슬람 사이의 뿌리깊은 갈등과 불신 때문이었지만, 그 파키스탄에서 다시 방글라데시가 독립해 나왔던 것은 동파키스탄(지금 방글라데시 지방)이 서파키스탄(지금 파키스탄)에 비해 크게 차별당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는 숙적 파키스탄이 약화되기를 바라는 인도가 독립을 도와주기도 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갈라진 것은 종교 차이 때문이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두 나라는 둘 다 “종교를 정치나 국가행정에 개입시키지 않는다.”는 세속주의(secularism)를 국시로 내걸었다. 각기 국내의 소수 종교인들을 안심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나라 사이의 갈등이 점점 심해지면서 파키스탄과 인도는 각기 이슬람 근본주의와 힌두 근본주의가 득세했다.

 

방글라데시도 마찬가지다. 1972년에 파키스탄에서 독립할 때는 세속주의를 주춧돌로 삼았는데, 1978년에는 이슬람 정신에 충실한다는 것으로 변하더니, 1986년에는 이슬람이 아예 국교가 됐다.

 

흔히 가톨릭 교회 안에서는 세속주의라 하면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는다. 특히 근대 프랑스에서 국가가 세속주의를 내세워 가톨릭 교회가 공립학교에서 가톨릭 종교교육을 할 권리를 빼앗았던 당시에도 교회는 세속주의를 반대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런 배경과는 상관없이 성속이원론적인 선악 이미지를 가지고 “세속”을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가톨릭이 소수인 여러 아시아 나라에서는 오히려 이렇듯 헌법에 명문화된 세속주의야말로 그리스도교 같은 소수종교가 이슬람이나 힌두교의 국교화를 저지하거나, 설령 국교로 선언되어도 실제로는 똑같은 법적 평등성과 권리를 주장할 최후의 정당한 의지처가 되고 있다.

 

물론 인도나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등과는 달리 방글라데시에서는 심각한 종교 분쟁은 없다. 그러나 10% 정도인 힌두인들은 압박의 대상인 것이 현실이다. 1992년에 인도에서 바브리 모스크가 파괴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처럼 어떤 계기가 있으면 힌두인을 공격하는 일이 있다. 힌두인들이 겁을 먹고 소중한 땅을 버리고 인도로 달아나면 이슬람인들이 그 땅을 차지하곤 하는 것이다. 이는 동북부 치타공 구릉지대의 소수민족에 대한 압박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10만여 명이 인도로 피해 수십 년 동안 난민생활을 하다가 몇 년 전에 귀환했다.

 

다카 대학의 한 교수가 연구한 바로는 방글라데시가 독립한 1971년부터 1998년 사이에 이슬람인들은 25억 5000만 평이나 되는 땅을 차지했는데, 그 대부분은 원래 힌두인 땅이었다. 2001년 10월의 총선 뒤에도 여러 그리스도인과 소수 부족들이 공격당했다. 하지만 정부는 여전히 방글라데시에 있는 4개 종교 - 이슬람, 힌두교, 불교, 그리스도교 - 는 완전한 화합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국을 기억하라

 

방글라데시는 벵골인의 나라라는 뜻이다. 우리에게 방글라데시는 홍수가 많이 나고 가난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사실이다. 인구는 1억 3000만 명에 인구밀도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축에 속한다. 인구증가율이 3%이고, 15세 이상 인구의 문맹률이 61.9% (1995년)나 된다. 한국인들의 여행기를 읽어보면, 거지가 들끓고 공무원들은 뇌물을 원한다.

 

그러나 이 나라는 높은 문화전통을 가졌다. 우리도 잘 아는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바로 이 나라 인구의 90%를 이루고 있는 벵골인이다. 그는 1913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그가 일제 식민지 조선을 위해 지어준 “동방의 등불”이란 시를 안다면, 그가 지은 시 “우리의 황금 벵골”이 지금 방글라데시 국가의 가사란 것도 알아둠직하다. 또 그가 작시, 작곡한 ‘자나 가나 마나(Jana Gana Mana)’는 인도의 국가가 되었다. 인도의 공용어는 힌두어이고, 벵골은 인도의 한 지방에 지나지 않지만, 벵골 문화가 “종교의 나라” 인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짐작할 것이다. 어찌 방글라데시가 지금 가난하다고 해서 함부로 멸시할 것인가?

 

벵골은 영국 식민지 당시부터 민족의식이 높던 곳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같은 민족이면서도 이슬람과 힌두인 사이에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자, 영국은 이를 빌미로 지금의 방글라데시 지방을 동 벵갈, 지금의 인도에 속한 캘커타 일대를 서 벵갈로 행정구역을 분할해 버렸다. 이른바 분할 지배정책이다. 앞서 말한 타고르는 캘커타 출신으로 이 벵골 분할에 반대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민족만이 유일한 분단민족은 아니다. 또 민족은 식민주의 때문에, 이념 때문에 분할되기도 하지만, 종교 때문에 그런 비극을 겪기도 한다.

 

[경향잡지, 2003년 4월호, 박준영 요셉(아시아 가톨릭 뉴스(UCAN) 한국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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