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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연옥에 대해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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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옥에 대해 생각한다
우수수 낙엽이 떨어져 뒹구는 계절이다. 스산한 바람결에 휘날리는 낙엽 하나하나에 진리가 담겨있다. 어제의 그 파랗던 낙엽이 아니었던가. 인간도 시들어지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죽음을 비켜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태고 이래로 죽음을 이겨보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동물은 죽음을 숙명으로 받아들이지만 인간은 극복해 보려고 노력한다. 11월은 죽음을 특별히 생각해 보고, 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 위령성월이다.
누구에게나 다가올 죽음인데도 나에게는 비켜갈 것만 같은 죽음! 그것은 인생의 수수께끼 가운데 절정이다. 과연 죽음은 내게 언제 들이닥칠 것인가? 아무도 모른다. 하느님만이 아신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절치 통곡하게 된다. 울고 또 울고 슬픔은 눈물이 되어 흐르고 또 흐른다.
과연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저 슬프고 두려움만 주는 것인가? 아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새로운 삶으로 옮아가는 관문이다. "교우 여러분, 죽은 사람들에 관해서 여러분이 알아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슬퍼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가실 것을 믿습니다"(1데살 4,13-14).
어떤 종교에서는 인간이 죽으면 다시 환생한다고 믿는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따라, 더 좋게 태어나거나 더 나쁘게 태어난다고 믿는다. 때로는 버러지로 태어나기도 하고 돼지로 태어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환생도 전생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영생을 믿는다. 영생은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된다. 또한 개신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천국에 가느냐, 지옥에 가느냐로 결판난다고 믿는다. 천국에 갈 사람은 여기저기 거치지 않고 직접 가는 것이고 지옥에 갈 사람도 직접 가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연옥이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사람이 죽으면 천국으로 가기 전 정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물론 죄도, 그 벌도 없는 완전히 정화된 사람은 천국으로 직행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어찌 완전히 정화된 상태로 죽을 수 있는가 말이다. 그러므로 정화가 필요한 사람은 죽어서라도 정화를 거쳐야 하며 이를 '연옥'이라고 부른다. 일단 연옥에 가면 언젠가는 하늘나라로 갈 수 있기에 지극히 희망적이다. 물론 여기서 연옥을 어떤 장소의 개념으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의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장소의 개념으로 알아들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연옥
연옥에 대한 신앙교리는 피렌체 공의회와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확정되었다. 교회가 연옥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성서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황금보다 훨씬 더 귀한 여러분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 순수한 것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받을 것입니다"(1베드 1,7). "만일 그 집이 불에 타버리면 그는 낭패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불속에서 살아나오는 사람같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1고린 3,15). 연옥은 불로써 표현된다. 불이란 정화시키는 것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옥의 불을 면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옛 기도문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도 연옥에 관계된 구절을 발견할 수 있다. 유다 마카베오가 죽은 이들이 그들의 죄에서 풀려나도록 그들을 위해서 그 속죄의 제물을 드리게 하였다(2마카 12,45 참조).
성서뿐 아니라 성인들도 연옥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고 있다.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그의 대화집에서 "어떤 죄들은 현세에서 용서받을 수 있으나, 어떤 죄들은 내세에서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연옥에서 죄의 잔재를 용서받을 수 있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주저하지 말고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을 위해 기도드리자."고 호소했다.
우리 교회는 초대교회 때부터 죽은 이들을 존중하고 기념했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와 미사 성제를 드려왔다. 이러한 전통은 지금껏 계속되고 있다. 또한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뿐 아니라 자선과 대사와 보속도 권고하고 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요즘 우리에게 문제가 생겨나고 있다. 예를 들면 연옥 영혼들에게 대사를 받도록 기도하는 것이 무력화되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분명히 말한다. "정화 중에 있는 죽은 신자들도 성인들과 통공을 이루는 같은 지체들이므로 우리는 그들을 위한 다른 도움과 더불어 특히 그들의 죄로 인한 잠벌을 면하게 하는 대사로서 그들을 도울 수 있다." 바오로 6세의 교황령에 따르면 "대사는 죄로 인해 받게 될 일시적인 벌을 부분적으로 면제하느냐 전적으로 면제하느냐에 따라 부분대사와 전대사로 구분된다." 즉 잠벌을 어느 정도 면하게 할 수 있는 한대사를 받을 수도 있고 완전하게 잠벌을 면하게 할 수 있는 전대사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간 영혼들에게 전대사를 받을 수 있게 함으로써 그 뜨거운 연옥의 형벌을 면하게 할 수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귀한 선물일 것이다.
묘지를 근사하게 단장하고 번들번들한 비석을 세워주는 것이 달가운 게 아니다. 죽은 이에게 대사를 얻게 하는 것이야말로 너무나 귀중한 선물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1997년도에 나온 새 가톨릭 기도서에는 '대사를 얻는 기도문'이 빠져있다. 이는 연옥 영혼에게 너무도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왜 빠졌을까? 연옥 영혼들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 아닐까?우리 나라에서는 성교 공과라는 두꺼운 기도서가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968년 가톨릭 기도서가 발행되었는데 새 시대에 맞는 문체로 만든 것이다. 그러던 중 1987년 수정판이 나왔다. 거기까지는 대사를 얻는 기도가 있었다. 새로 나온 기도서가 문제를 가지고 있다면 하루빨리 수정하여 대사를 얻는 기도를 통해서 많은 이들이 연옥 영혼에게 대사를 기부함으로써 그들이 천국에 빨리 들어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대사를 얻는 기도문은 간단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교황님의 뜻대로 주모경(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하면 된다. 물론 은총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서 미사에 참석한 다음에 외우는 기도다. 문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나 대사를 얻는 기도문이 기도서에 있는 것과 없는 것과는 너무도 다르다. 물론 우리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연옥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을 대신하여 자선을 하고 보속도 함으로써 그들을 도울 수 있다.
위령기도(연도)는 많은 신자들이 즐겨하는 연옥 영혼들을 위한 기도다. 또한 우리의 전통에는 그들을 위하여 자주 위령미사(연미사)도 봉헌한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한번도 위령기도를 바치지 않거나 위령미사를 드리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부족한 사람이다. 모든 성인의 통공을 모르는 사람이다.
위령성월에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동시에 우리 자신의 죽음을 가슴에 새기면서 주님 곁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성스러운 달이 되었으면 좋겠다.
[경향잡지, 1999년 11월호, 최기산 보니파시오(인천교구 신부, 인천 가톨릭 대학교 겨레문화연구소장)] 0 1,837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