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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초기교회의 교무금 - 교무금의 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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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09 ㅣ No.148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초기교회의 교무금

 

교무금의 연원

 

 

박해시대 교회는 “맘몬과 하느님을 같이 섬길 수 없다.”고 말하면서 맘몬 곧 재물과 신앙을 분리시켰고, 지상의 재물보다는 천상의 보화가 중요하다고 늘 가르쳐왔다. 그러나 교회는 박해를 받던 중에도 운영과 자선을 위해서 언제나 돈이 필요했다. 교회 재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교무금이었던 바, 여기에서는 오늘날 교회에서 걷고 있는 교무금의 연원이 어디까지 소급될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공소 순회와 교회 재정

 

우리나라 교회가 창설된 직후에는 일정액의 금액을 정기적으로 봉헌하는 교무금에 대한 관념이 없었다. 다만 필요한 경우에는 신자들 스스로 헌금을 거둔 사례만을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관행은 중국에서도 발견된다.

 

1803년 중국 스촨(四川) 교구회의 결정문에서는 헌금 관리와 관련된 언급만이 나온다. 이는 당시 스촨 교구에 교무금을 정기적으로 납부하는 제도가 없었음을 말한다. 조선과 중국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현상은 아마도 신자들의 주류가 농민들이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박해가 끝나가던 1880년에 이르러서 교회는 신자들에게 교회를 위한 물질적 기여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이때에 이르러 해마다 정기적으로 신자들이 교회를 위해 일정 금액을 납부하는 관행이 생겼다. 이러한 사실은 개항기 선교사들이 작성한 배정기(配定記)를 통해서 엿볼 수 있다. 배정기란 본당신부가 성교사규에 규정된 성사를 집전하려고 공소를 방문할 때, 이에 앞서 공소에 사전 예비를 위해 보내던 통지문 또는 사목서한을 말한다.

 

공소 신자들은 이 배정기를 회람하여 읽고 선교사를 맞아들일 준비를 했다. 본당신부의 공소 순회는 해마다 한두 차례씩 일정한 시기에 진행되었다. 여기에서 해마다 교회에 일정한 시기를 정해서 헌금하는 관행이 생겼고, 이것이 오늘날 교무금의 원형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관행은 1880년 5월 6일자로 경상도 신자들에게 보낸 두세(Ducet) 신부의 배정기에서 나타난다. 이를 보면 두세 신부의 공소 순회를 전후해서 신자들 사이에서 “돈이 없어 성사를 받지 못하겠다.”고 하는 사건이 생긴 듯하다. 이 일은 당시 조선교회에서 성교사규 상의 고해성사를 보기 전에 신자들에게 일정액을 부담하도록 하는 규칙이 있었음을 전제한다. 두세 신부는 이러한 말을 전해 듣고 곧 신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신부가 너희에게 돈 받기 위해 전교하느냐? 각 사람이 처지대로 해서 본디 성교회 규구가 있으니 할 만한 터에 하지 않는 것은 잘못하는 일이고, 할 수 없어서 주지 않아도 괜찮으니 이후에는 그런 교우가 있거든 회장에게 통해서 다시는 돈이 없어서 성사를 받지 못하겠다는 말이 나지 않게들 하여라.” 이 편지에서 알 수 있듯이 개항 직후에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신자들에게 굳이 교무금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교무금과 공소전

 

오늘날 우리 교회에는 1886년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가 신자들에게 보낸 사목서한이 남아있다. 이를 보면 당시 신자들이 부담하던 헌금의 종류를 파악할 수 있다. 블랑 주교는 먼저 일종의 불우이웃 돕기에 해당하는 애긍전(哀矜錢)에 대해 언급을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당시 신자들이 사규고해를 볼 때 ‘애긍전’이라 하던 헌금 관행이 있었음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이때 블랑 주교는 신자들에게 해마다 거두던 애긍전 외에 서울의 양로원 설립과 운영에 필요한 애긍전을 별도로 요청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교회가 전체 신자를 대상으로 하여 공식적으로 걷기 시작한 특별헌금의 첫 사례가 될 것이다.

 

또한 이 사목서한의 기록을 볼 때 1880년대 조선교회의 공소에서는 사업 준비금으로 해석할 수 있는 판비전(辦備錢)을 가지고 있었다. 이 판비전은 아마도 공소에서 거둔 선교자금으로서 회장이나 공소 주인이 관장하여 지출한 듯하다. 그러므로 블랑 주교는 ‘판비전이 넉넉한데도 신부를 변변히 대접도 아니 하고, 성교회에 바치는 것도 별로 없는’ 공소를 꾸짖었다.

 

그리고 블랑 주교는 “명하전을 거두어 공소에 쓰고 한 푼이라도 나머지가 있거든 회장이나 공소 주인이 자기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마땅히 성교회에 바치게 하여라.”고 말한다. 아마도 명하전(名下錢?)이란 말은 신자들의 이름 아래 납부한 헌금을 기입한 데서 발생한 용어가 아닌가 생각된다.

 

블랑 주교는 ‘공소돈’[公所錢]이란 용어를 쓰고 있었다. 이 말은 애긍전, 판비전, 명하전을 모두 총괄하여 일컫는 말이다. 공소돈이란 단어는 1920년대의 한국교회에서도 계속하여 썼다. 이 공소돈은 분명한 공금이었다. 그러기에 블랑 주교는 신자들이 신부나 신부의 수행원인 ‘복사’에게 사사로이 선물하는 데는 공소돈이 아니라 ‘사사돈’[私事錢]을 써야 한다고 하였다.

 

블랑 주교는 1889년에 보낸 사목서한에서 공소예납전(公所例納錢)이란 말도 쓰고 있다. 이는 각 공소에서 으레 납부해 오던 돈이란 말로서 공소돈의 다른 표현으로 생각된다.

 

블랑 주교는 “이왕은 각 신부가 전교할 때에 공소예법이 성교회의 허다한 용도를 돕기를 위하여 얼마간 예납이 있었으니 지금 이후로는 공소예납전을 법대로 수합하여 본당신부께 바치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 돈으로 ‘선생을 마련하여 몇 동네(마다) 학당을 배치할 것’이라고 약조했다.

 

한편 1901년 공베르 신부가 보낸 배정기에는 “배정 편지를 받아 보고 성사 예비를 잘하기 위해서 주모경을 한 번 염하기 바란다. 예납한 통문전은 본근 없거니와 교우 사정을 생각해서 촛대전[燭臺錢]까지 없이 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는 아마도 배정기를 통고받은 다음 신부를 맞을 준비의 일환으로 미리 헌금을 거두었기 때문에 ‘예납통문전’이란 말을 쓰게 된 듯하다.

 

이는 공소예납전이나 같은 의미였으리라 추정된다. 또한 촛대전이란 말은 미사전례를 거행할 때 촛대를 마련하려는 비용이란 뜻으로 해석된다. 통문전과는 구별되고 있음을 보면 아마도 이는 미사 중에 직접 걷던 헌금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공베르 신부는 예납통문전을 다른 본당과는 달리 받지 않았고 이 촛대전마저도 폐지했다. 그가 사목하던 안성성당에는 적지 않은 토지소작료 수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던 1890년대에 이르러 교회는 도처에 토지를 구입하여 성당 주변에 사는 신자들에게 소작을 주었다. 그러고는 거기에서 나오는 소작료로 교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토지를 경작하던 사람들에게 당시 교회가 요구하던 소작료는 대략 수확량의 30%였다. 소작농민들의 처지에서는 당시 수확량의 50%를 웃돌기도 했던 일반 소작료보다 교회의 소작료가 안정적이었고 부담이 가벼웠다.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추수한 소작료를 걷으려고 가을판공 형식으로 성탄 때 고해와 성체성사를 진행했다. 원래 성교사규에는 해마다 부활 전후 1회의 고해 영성체를 신자들의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이를 더욱 강화하여 부활과 성탄 전후 2회로 규정하고 있다. 이 강화된 의무 성사에 관한 규정은 바로 추수 후 판공성사를 시행한 관행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나머지 말

 

한국교회가 1914년 간행한 “대구교구지도서”에는 공소돈(pecunia Kongso)에 대한 언급은 나오고 있으나 정기적인 교무금 형태의 재정 부담에 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1923년도에 간행된 “서울교구 지도서”에는 조선인 성직자에 대해서 조선인 신자들이 책임을 지기를 기원하고 있다(253조). 그리고 서울교구의 신자들에게 해마다 4전씩을 내도록 권고했다(253조).

 

이를 보면 1920년대에 이르러서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교회의 운영에 대한 재정 부담 문제가 이전보다는 더 본격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회에서 도시화가 진행되고 신자들의 상당수가 매달 일정 금액의 수입으로 살아가는 생활 형태를 갖추게 되자 매월 납부하는 교무금의 개념이 생긴 듯하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교무금 납부 제도가 정착된 시기는 한국전쟁 이후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7년 11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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