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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경기도의 복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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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1-11 ㅣ No.1401

한국 순교자 124위 복자 ⑥ 경기도의 복자들



경기도에서 순교한 순교자들

정약종을 스승으로 받들고 교리를 배운 조용삼 베드로는 예비신자였을 때 체포되었지만 혹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증거했다. 그러나 그가 보는 앞에서 박해자들이 아버지를 매질하며 ‘당장 배교하지 않으면 니 아비를 죽이겠다.’는 고문에 배교를 하고 석방될 때 함께 붙잡힌 이중배의 권면을 듣고 즉시 관청으로 돌아가 신앙을 고백했다. 이후 박해자들은 그의 신앙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더욱 혹독한 형벌을 가했다. 몸이 약해진 그는 옥에 갇힌 지 얼마 안 되어 숨을 거두었다.

조용삼과 함께 체포된 이중배 마르티노는 1797년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된 후 사촌인 원경도와 함께 평소 가깝게 지내던 김건순 요사팟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받아들였다. 그후 아버지와 아내에게 교리를 전했고 교회의 지시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특히 그는 신앙을 고백 할 정도로 용감한 성격으로 1800년 부활 대축일에 밀고로 체포되어 배교를 강요받았지만 오히려 자신과 체포된 교우들이 배교하지 않게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또한 그의 마음을 돌리려 찾아온 사촌 요한의 종을 엄하게 꾸짖었고 아버지 또한 설득했다. 약간의 의술을 알고 있던 그가 행한 치료로 설명하기 어려운 기적과 같은 효험이 나타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모여든 죄수들로 옥문이 장터 같을 정도였다. 그는 다음해 신유박해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자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최창주의 사위이기도 한 원경도 요한은 사촌 이중배와 함께 체포되어 여주 관아에서 형벌을 받던 중 일행을 대표해서 “천주교에서는 다른 사람을 밀고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없고 더욱이 천주님을 배반하는 일은 할 수 없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졌다. 그는 경기 감영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았고 신유박해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자 27세 나이에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1840년 전주에서 순교한 최조이 바르바라의 아버지 최창주 마르첼리노는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40대 초반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온 가족을 입교시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지만 1791년 신해박해 때 배교했다. 이후 그는 깊게 뉘우치고 순교의 은총을 입어 죄를 씻어 낼 방도를 구하는 데 노력했다. 그는 가족과 이웃 신자를 힘써 권면하며 두 딸을 여주에서 순교한 원경도와 1839년 전주에서 순교한 신태보 베드로의 며느리로 각각 출가시켰다. 1800년 부활 대축일에 사위가 체포됐다는 소식에 피신을 나선 그는 순교를 다짐했던 이전의 마음을 되찾고 집으로 돌아온 날 밤 체포됐다. 혹독한 형벌을 받으며 6개월 동안 옥에 갇혀 지내다가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여주로 압송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1795년에 순교한 교회의 밀사 윤유일 바오로의 동생 윤유오 야고보는 형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한 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웃에 교리를 전하는데 노력했다. 주문모 신부에게 성사를 받은 그는 형이 순교한 후에는 조동섬, 권상문 등과 만나 기도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연구하면서 신심을 북돋웠다. 그는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갖가지 문초와 형벌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굳게 지키며 배교를 거부한 가운데 양근 관아로부터 서쪽으로 떨어진 큰길가로 끌려나가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윤유일의 사촌으로 1801년 순교한 윤운혜 루치아의 언니 윤점혜 아가타는 어머니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일찍부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기 위해 동정생활을 굳게 결심한 그녀는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입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와 함께 한양으로 이주하여 과부처럼 행세하며 동정을 지켜나가다 주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어머니가 사망하자 강완숙 회장의 집으로 옮겨가 함께 생활하며 주 신부의 명령에 따라 동정녀 공동체를 만들고 그곳의 회장으로 임명되어 다른 동정녀들을 가르쳤다. 그녀는 교회의 가르침을 엄격히 지키면서 극기와 성경읽기, 묵상에 열중하며 신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죽은 어머니를 위해 연도를 자주 바치며 성녀 아가타처럼 순교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던 그녀는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순교했다. 순교 당시 그녀의 목에서 흐른 피가 우윳빛이 나는 흰색이었다고 한다.

열여덟 살 때 오빠 부부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한 정순매 바르바라는 주문모 신부를 도와 교회 일에 참여한 정광수 바르나바가 오빠이고 올케는 유명한 교우 집안 출신인 윤운혜 루치아이다. 그녀는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바치기 위해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한 뒤 과부행세를 했다. 서울에서 오빠 부부를 도와 교회서적과 성물을 신자들에게 보급하는 일을 담당하며 윤점혜가 회장으로 있던 동정녀 공동체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800년 주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은 이후에는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착한 일을 하는데 정성을 다했다. 그녀는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신유박해 때 순교한 윤운혜와 정순매의 남편이자 오빠인 정광수 바르나바는 입교 후 누구보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1794년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한양으로 올라가 성사를 받고 교리를 배웠다. 주 신부의 명에 따라 김건순 요사팟에게 편지를 전했으며 고향 여주 인근에 교리를 전하면서 비신자를 입교시키는 데 노력했다. 결혼할 때 천주교 신자가 아닌 부모의 반대가 심해 혼인문서조차 주고 받을 수 없었던 그는 천주교 신앙을 버리고 제사에 참여하라는 부모의 강요를 피해 한양으로 이주했다. 한양에서 그는 집 한편에 집회소를 짓고 주 신부를 모셔다 미사를 봉헌했으며 교우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했다. 상당한 학식을 지니고 있던 그는 교회서적을 베껴 신자들에게 배포했고 예수님, 성모님의 상본과 묵주를 제작하여 교우들에게 팔거나 나누어 주었으며 가까운 교우들과 자주 만나 함께 교리를 연구하거나 기도모임을 가졌다. 그는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한양과 지방을 오가며 피신을 다니다가 스스로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한 후 붙잡혀 1802년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윤지충 바오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한덕운 토마스는 신해박해 때 윤지충이 순교한 뒤에도 더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나갔다. 그는 좀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경기도 광주로 이주하여 기도와 독서를 부지런히 하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 열중했다. 또 신자들을 모아놓고 가르치고 권면하기를 좋아했는데 그의 말은 언제나 굳건하고 날카로웠다고 한다. 그는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옹기장사꾼으로 변장한 뒤 한양으로 올라가다 거적으로 덮여 있는 홍낙민 바오로의 시신을 보게 되었고 비통한 마음으로 애도를 표한 다음 홍낙민의 아들 홍재영 프로타시오(1839년 순교)에게 부친을 따라 함께 순교하지 못한 것을 엄하게 질책하는 한편 서소문 밖에서 최필제 베드로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러 주기도 했다. 그는 이처럼 신자임을 드러내는 위험한 일들을 한 끝에 체포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고 남한산성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1801년 순교한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아들 홍인 레오는 아버지에게서 교리를 배웠지만 오히려 아버지보다 먼저 천주교 신앙의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천주교에 입교한 뒤 세속의 꿈을 모두 버리고 하느님을 섬기고 교리를 전하는데 열중한 그는 아버지와 함께 주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고 미사에 참석했다. 그리고 5촌 당숙인 홍익만 안토니오, 황사영 알렉시오 등과 교류하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아버지와 함께 포천지역에 복음을 전하는데도 노력했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아버지와 의논하여 정약종의 책 상자를 집 안에 숨겨 두었다가 다른 곳으로 옮기는 도중 체포된 신자에 의해 이름이 알려졌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피신했지만 곧 집으로 돌아와 체포됐다. 그 후 아버지는 한양으로 압송되어 순교했고 그는 포천으로 압송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한국천주교회 창설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권상문 세바스티아노는 교회 창설 주역들의 스승으로 학문이 드높던 권철신 암브로시오의 조카로 교회 창설에 참여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아들이다. 신앙을 물려받은 그는 이웃에 사는 윤유일 형제를 비롯하여 몇몇 교우들과 함께 기도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연구했다. 신해박해로 아버지가 죽임을 당하자 마음이 약해져 한때 교회를 멀리하기도 했지만 주문모 신부의 입국으로 다시 신앙을 회복한 그는 성사를 받기 위해 한양으로 갔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1795년 을묘박해로 주 신부가 피신생활을 하게 되자 3일 동안 주 신부를 자신의 집에 유숙시키면서 교리를 배웠다. 그는 1800년 6월 양근에서 일어난 박해로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1802년 1월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박경진 프란치스코·오 마르가리타 부부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안전한 곳을 찾아 아들 4형제를 데리고 진천 절골(현재의 진천군 백곡면)로 이주하여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했다. 1868년에 이르러 박해가 더욱 거세졌고 부부는 그해 9월 포졸들이 들이닥쳐 피신할 때 헤어지게 되었다. 마르가리타는 어린 자식을 업고 산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많은 매를 맞았고 몸을 숨겼던 프란치스코는 가족들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산에서 내려왔다가 비신자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부부는 죽산으로 끌려가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다 함께 순교했다.(참고문헌 :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 123위, 초상 제공 :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우리는 지난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과 함께 124위 복자 탄생의 기쁨을 맛봤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때의 감동은 고스란히 살아 우리 신앙 안에 자리잡고 있다. 위령 성월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며 주변의 연옥영혼을 위해 기도하면서 신앙에 더 깊이 빠지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월간빛, 2014년 11월호, 김선자(수산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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