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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자료

강론자, 훌륭한 스토리텔러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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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8 ㅣ No.678

강론자, 훌륭한 스토리텔러가 되라


칼멘 멜레(미국 엘패소 교구 신부)

 

들어가며

 

이 시대 의사소통 형태 가운데 이야기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이 있을까? 저녁 뉴스를 보거나 아침 신문을 보면 언제나 머리기사 다음에 나오는 내용은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연설 또한 비슷한 유형을 따른다. 감사 인사를 한 다음 연설자는 재미있는 이야기로 연설을 시작한다. 그러나 연설의 목적은 사건 보도가 아니라 청중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그 밖의 의사소통 형태로 설교가 있다. 과거의 강론 또는 설교는 일반적으로 설명적이었다. 객관적인 산문 형태로 신앙에 관한 내용을 명확하게 설명한다. 이러한 설교에서 사용되는 서술어는 대부분 “-이다.” 동사 형태이며 주로 연역법이 사용된다. 그러나 오늘날 강론학 교수들은 설명어를 사용한 이야기를 추천하고 있다. 이 방법을 통해 성경 구절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강론자들은 자유롭게 귀납적 사고를 하게 되었다. 곧 예화를 들어 회중들을 확실하게 이해시킬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예화(illustration)를 선호하게 된 것은 강론자들이 강론 중에 회중들과 함께 논의를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떠오른 개념보다는 이야기를 더 잘 기억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한 논평가가 쓴 글에 따르면, 현실에서 우리의 경험은 이야기 형태로 되어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이야기들을 이끌어가시면서 이 과정을 직관적으로 이해하시고, 청중들이 하느님 나라의 중요성을 파악하도록 도우셨다.


그러나 이야기가 강론의 진정한 목적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어서, 강론자가 전달하고자 했던 주제를 모호하게 하기도 한다. 또한 이야기는 복음의 중요성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


이러한 함정을 막고자 필자는 강론에서 훌륭한 스토리텔링(이야기 전달)1) 방법과 스토리텔링에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시할 것이다. 이 개념은 데이빗 버트릭 교수의 유명한 저서 『강론학: 움직임과 구조』(Homiletic: Move and Structures)를 참고하였다. 10여 년 전에 출판된 이 작품은 미국 내에서 중요한 강론학 지침서가 되었다.

 

 

스토리텔링의 사용 목적

 

버트릭 교수는 이야기를 사용하는 목적 가운데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 외에 전통적인 두 가지를 제시한다. 곧 이야기는 애매한 것을 분명히 나타내고 모호할 수 있는 것에 근거를 제공한다. 강론에서 발견한 개념들은 세속 세계의 한 부분이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세례 때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비유적인 표현을 통해 그 변화 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변화합니다. 사실 우리 자신이 다르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층 더 높은 존재의 위치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신임 대통령의 취임 선서식과 같습니다. 대통령 취임 뒤 존 케네디의 친구들은 더 이상 그를 “잭”이라고 부르지 않죠. 그가 성경에 손을 올려놓고 맹세하는 순간부터 그는 “대통령”입니다. 신임 대통령의 겉모습은 변함없지만 분명히 새로운 권위가 느껴집니다. 마찬가지로 세례 안에서 공동체가 함께 모이고 약속이 만들어집니다. 공식적으로 이름이 주어지고 그 사람에게는 새로운 존엄과 함께 성령의 물이 부어집니다.

 

세례 때 은총이 마음에 충만하다는 말을 하지만, 청중들은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 짧은 글에서 실제로 변형이 일어나는 방법을 설명할 계획은 없다. 또한 변화가 일어난 증거를 제시하지도 않을 것이다.


버트릭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이야기는 “시간을 연결”할 수 있기 때문에 성서 시대 안에 있는 우리를 상상할 수도 있고, 예수님의 시대를 이 시대로 끌어올 수도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가운데 대심문관에 관한 장(章)에서 이야기의 이 기능을 활용하였다.


이야기는 또한 “의식 안에 본보기를 세울 수 있다.” 곧 하느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어떠한 선택을 하셨는지 나타내려는 경우, ‘사랑의 선교회’의 설립 이야기를 함으로써 이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 강론자는 마더 데레사가 “계획도 없었으며 또한 미리 생각한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라고 한 말을 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버트릭 교수는 ‘예’(examples)와 ‘예화’(illustration)를 구분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쏟았다. 예는 “회중의 공통의식”에 토대를 둔다. 곧 보편적으로 경험한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얼마나 자주 이 단어를 사용하는가. 곧 우리는 이야기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단순한 행동이 어떻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 표현하고자 할 때, 생일과 관련된 공통된 경험을 언급할 수 있다. “여러분의 생일날을 기억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얼마나 고마워했던가요. 가족들은 선물을 준비하고, 멀리 사는 친구가 축하 전화를 걸어옵니다. 그리고 직장 동료가 점심을 내기도 하죠.” 이처럼 ‘예’는 거의 모든 청중이 공유하는 사건의 한 종류이다.


이와 반대로 예화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범위 밖에서 시작되지만 쉽게 의식에 동화된다. 예화는 일반적으로 ‘이야기’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제 흔한 이야기가 되어버린 ‘모래 위의 발자국’과 같은 이야기가 바로 예화의 한 종류이다. 실제로 회중 가운데 한 사람도 두 개의 발자국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모두 그 이야기가 이끄는 곳에 도달할 것이다.


예화는 많은 힘을 가지고 있다. 이때 각각의 개념에 대하여 하나의 예화를 사용해야 한다. 여러 개의 예화는 청중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강론자는 개념을 분명히 나타내고자 한 번에 두세 개의 예화를 연결시킬 수는 있지만 이러한 예화들의 고리는 결국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다.


버트릭 교수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가장 중요한 개념을 표현하고자 할 때에만 예화를 사용해야 한다. 다음과 같은 예화에서 종말론적 상징인 “새 하늘과 새 땅”은 암시를 통해 대중 영화에서 시각적인 내용으로 표현된다.

요한 묵시록의 관찰자인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하여 썼습니다. 그는 텍사스 토네이도보다 훨씬 더 괴로운 고통을 견디어냈습니다. 이제 그는 해방의 광경을 그립니다. 이것은 영화 <타이타닉>의 마지막 장면에서 스크린을 가득 채운 것과 같은 희망입니다. <타이타닉>은 대서양에 남겨진 싸늘한 시체들의 모습으로 끝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여자 주인공 로즈를 위해 남자 주인공인 잭이 보여주었던 궁극적인 희생은 결국 부활한 타이타닉 호 위에서 이 둘의 결합을 이끌어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환상일까요?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에게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결국 헌신적인 사랑은 영원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청중들은 자주 지나쳤던 성서의 중심 개념(묵시 21,1-5)을 이해할 수 있다.


강론자들은 여러 자료에서 예화를 찾아낼 수 있다. 영화 말고도 문학, 역사, 전설, 동화, 뉴스, 그리고 사람들의 일상 경험에서도 이야기를 찾을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스토리텔링의 소재를 담고 있다. 다음과 같은 경우처럼 간단한 그림 묘사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다.

 

산호세 외곽 지역, 공항으로 가는 길을 따라 한 지역 은행의 광고판이 보입니다. 건장한 한 남자가 가슴에 아기를 안고,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가야!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너를 지켜주마!” 아버지가 아이에게 아이의 안전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만이 끝없이 위대합니다. 하느님은 어떠한 폭풍 속에서도 우리를 돌보실 것입니다. 그분의 팔은 훨씬 강하고, 그분의 손길은 멀리까지 펼쳐지며, 그분의 지혜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께 의지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요점은 우리의 ‘천상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가장 강하신 인류의 아버지로서 능력을 갖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청중의 관심을 끈다. 강론자는 쉽게 이 사실을 잊는 경향이 있고, 청중 또한 단순히 강론자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회중의 관심과 이에 대한 강론자의 만족이 이야기의 궁극적인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이야기는 성서 구절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야 한다. 아쉽게도 강론자들은 강론에 이야기를 하나라도 집어넣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과 잘 맞지 않는 강론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 결과 혼란이 발생하고 청중의 관심을 잃게 된다.


버트릭 교수는 훌륭한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첫째, 설명할 개념과 일화가 ‘분명한 유사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둘째, ‘예화’의 발전 단계와 개념 구조가 평형 관계이어야 한다. 셋째, 적절한 예화를 제시해야 한다. 부적절한 예화는 중심 개념을 훼손시킬 수 있다. 부적절한 이야기의 예를 보도록 한다.

 

한 유전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를 어떻게 돌보시는지 우리의 이해를 도우려 했습니다. 이 과학자는 초파리를 연구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 작은 곤충은 너무 익은 과일에 많이 모여듭니다. 이 유전학자는 한 번에 초파리 수십 마리를 마취시키고 다시 살리는 과정을 통해 초파리 한 마리 한 마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 이 녀석은 부끄러움이 참 많구나. 그런데 이 녀석은 성질이 있네.” 이런 식으로 유전학자는 초파리 한 마리 한 마리와 관계를 형성하였습니다. 예수님 또한 우리 각자에게 이와 같은 관심 ─ 끝없이 위대한 관심 ─ 을 갖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돌보시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예에서 예화의 발전 단계와 개념 구조가 평형을 이루고 있다(두 번째 기준). 그러나 이 설명은 ‘분명한 유사점’이라는 첫 번째 기준에는 맞지 않는다. 유전학자는 초파리에 관한 지식을 언급하였지만, 고찰해야 할 개념은 인간관계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사람을 초파리와 비교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세 번째 기준).


그럼 이 시점에서 훌륭한 스토리텔링 방법과 스토리텔링에 불필요한 요소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훌륭한 스토리텔링 방법

 

1. 이야기들을 자주 사용한다.


강론의 모든 단락은 최소한 중심 생각을 분명히 설명하는 구체적인 예 하나를 담고 있어야 한다. 강론자가 강조하려는 강론의 중심 개념은 4-5개의 문장으로 된 하나의 이야기로 설명되어야 한다. “그림 하나가 천 마디 말보다 낫다.”와 같은 말을 기억하라. 버트릭 교수는 예화와 관련하여 비슷한 주장을 한다. “곧 네 문장으로 된 하나의 예화가 스무 문장으로 된 내용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다.” 정곡을 찌르는 예화 하나가 강론 전체를 훌륭하게 만들 수 있다.

 

2. 공동체 내 체험에서 예화를 찾는다.


책, 영화, 뉴스 기사와 같은 수많은 이야기는 다양한 소재들을 다룬다. 그러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보다 마음에 와닿는 이야기는 없다. 곧 ‘공동체’ 이야기는 그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의 의미를 증대시킨다. 물론 강론자는 정확하게 공동체의 이야기를 제시하면서 이와 함께 개인의 사생활을 보호해야 한다.

 

3. 충분한 해설 자료를 가지고 이야기를 구성한다.


최근 들어 강론자들 가운데 강론의 도입부와 결론에서 기본 개념을 나타내지 않고 이야기를 이용하려는 경우가 있다. 사실 어떤 강론학 교수는 강론 전체를 이야기로 구성하려는 시도를 옹호하기도 한다. 해설 자료를 사용하지 않은 강론은 재미있을 수는 있으나 혼란을 초래하기도 쉽다. 버트릭 교수는 이러한 유행을 피하도록 조언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야기가 길수록 해설 내용이 더욱 필요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간결하고 생생한 예화가 가장 만족스러운 역할을 한다.

 

4. 다양한 소재에서 이야기를 수집한다.


강론자들은 앞으로 있을 강론을 위해 체계적으로 소재들을 모으고 보관해야 한다. 신문 기사 스크랩, 인터넷에서 찾은 사진 또는 기사 등을 주제에 따라 분류해 모아놓으면 언젠가 강론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5. 스토리텔링에서 독창성을 발휘한다.


갖가지 자료들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성화(聖畵)를 묘사할 경우 그 구성 요소와 색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성화의 세세한 모습들이 어떠한 신학적 내용을 담고 있는지 보여준다.

 


스토리텔링에 불필요한 요소들

 

1. 강론 내용에서 흐름을 방해하는 일인칭 일화(逸話)는 피한다.


강론자들은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불필요하게 그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해 냈는지 설명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또한 이야기를 전달하면서 아무런 관련이 없는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어느 날 밤 저는 신작 영화를 봤습니다. 저는 그 영화에서 오늘 강론의 주제인 구원의 의미와 관련하여 영감을 받았습니다. 부상을 당한 말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지혜로운 한 조련사가 그 말을 치료했죠. 그런데 더 감동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거친 성격의 말 주인 또한 조련사와 대화하면서 마음의 평온을 찾게 되었습니다.

 

강론자는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았지만, 이 일화는 구원의 의미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사실 이러한 일화는 강론자 자신의 심리 변화에 관한 부차적 이야기를 만들어내서 청중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

 

2. 자전적 이야기는 경계한다.


강론자는 자전적(개인적) 이야기를 통해 회중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고, 실생활의 상황을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이기적인 것이다. 강론자는 성경 해석보다는 자신에 대한 과시로 이야기를 시작하기 쉽다. 이에 따라 청중이 강론자의 삶에 더욱 초점을 맞추다 보면 예수님의 삶이나 성경 구절이 제시하는 것에는 신경을 덜 쓰게 된다.

 

3. 과시용으로 “이름을 언급하는” 방식의 이야기는 피한다.


강론에서 “칼 라너”와 같은 이름을 거론해야 좀 더 지적으로 보이고 듣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것인가? 사실 이러한 정보는 예화의 본질이 아니다.


강론자들은 인간적인 존경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 선포에 힘을 쏟아야 한다. 진정한 존경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이나 지식이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책임 이행 방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회중들과 매우 친숙한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 강론자가 제시하려는 생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4. 이야기를 꾸며내어 그것을 사실처럼 이야기하지 않는다.


강론자들은 허구의 이야기로 개념을 설명하고 싶어하는 경우가 있다. 청중이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믿지 않는다면 다른 이야기도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강론자들은 신화 등을 잘 모르면서도 그 내용을 상상력으로 재구성하여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재구성은 적당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사람들은 신화의 의미가 바뀌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번안 내용이 원래 내용인 것처럼 이야기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5. 단지 관심을 끌려는 목적으로 유머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름 언급’과 마찬가지로 유머는 강론의 본질이 아니다. 버트릭 교수는 강론자들은 유머를 자주 이용하는데, 이는 사람들이 그 유머를 재미있어 하기 때문이 아니라 유머를 말하는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상기시킨다. 그러나 강론자의 의도와 부합하고 적당하게 사용한다면 유머는 강론에서 좋은 역할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부활절의 기쁨은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온 천사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로 전달될 수 있다. ‘좋은 소식’은 물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며, ‘나쁜 소식’은 예수님께서 목요일 밤에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 제자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마치며

 

뉴멕시코의 민속 마을에서는 스토리텔링을 자주 볼 수 있다. 스토리텔러는 언제나 원주민 여성이다. 그 여성은 전통 의상을 입고 아이들에 둘러싸여 앉아있다. 어린아이들은 마법에 걸린 것처럼 스토리텔러를 응시하고 그녀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다.


강론자들 또한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와 같이 청중의 관심을 끌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야기들이 복음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가 이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강론자들은 조심스럽게 이러한 이야기들을 끌어가야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강론자의 주관적 관심사와 상관없이 의도하고 전달하려는 메시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야 하는 것이다.

 

* 출처: Carmen Mele, O.P., “The Preacher as Storyteller”, The Priest(1999.9.), 36-40면, 한길자 편역.

 

 

1) 스토리텔링이란: “이야기(story) 하기(telling)”란 뜻을 지닌 스토리텔링은 상대방에게 알리고자 하는 내용을 재미있고 생생한 이야기로 전달하는 행위이다. 고대의 떠돌이 이야기꾼에서부터 현대의 각종 문학작품에 이르기까지 그 근원은 바로 스토리텔링이다. 19세기 후반 교육학에서 이 방식을 도입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광고와 기업 마케팅 그리고 인터넷 매체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으며, 설교학에서도 스토리텔링 방식을 따르고 있는 추세이다.

 

[사목, 2005년 11월호, 주교회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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