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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자료

강론의 여러 가지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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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8 ㅣ No.677

강론의 여러 가지 측면

 

존 F. 오그래디(미국 플로리다 주 배리 대학 신학 교수 · 신부)

 

강론은 관련 요소와 때로 이질적 요소들을 수반한다. 누군가 강론을 해야 한다면 그 내용에는 언제나 성경을 포함해야 한다. 미사에서 강론할 때 그 배경은 전례이며, 이는 강의나 발표와는 매우 다른 것이다. 또한 하느님의 말씀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노력하는 데에는 반드시 회중이 포함되어야 한다. 특별한 상황 때문에 회중이 바뀌는 경우에는 말하는 내용뿐 아니라 말하는 방법까지도 바꾸어야 한다. 강론법은 이러한 모든 필수 요소가 상호 관련성을 가지게 될 때 복잡해지게 된다.


강론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으로서 그 하느님의 말씀에 의탁하는 자기 이미지를 더 확고히 가질수록 강론을 더 잘하게 될 것이다. 이는 종종 가르침의 요소를 포함해야 하는 교사의 경우와 매우 다르다. 만일 강론자가 혼인과 가정, 개인 문제들에 전문가이자 상담자이며, 관리자, 재정 계획자일 뿐 아니라 지역사회의 문제와 종교간 대화, 교회일치에 대해 관심을 가진 종교교사라면, 종종 이러한 일들을 위해 들여야 하는 무수한 시간과 노력 틈에서 강론자로서의 역할은 등한시될 수 있다. 불행히도 이는 대부분의 사목자와 강론자에게 해당되는 경우이다.

 

 

강론자로서 사목자

 

만일 사목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신자 공동체에 전파하는 일을 우선적 사명으로 여긴다면, 어디에 시간과 에너지를 먼저 투자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은 에너지와 시간에 한계를 지니고 있다. 모든 본당 신자와 단체가 좋은 강론을 바란다면, 거기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고, 다른 요구들은 포기해야 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모든 일을 다 잘할 수는 없다. 그러면 강론자로서 사목자는 강론 준비를 위해 어떻게 시간을 계획하고, 또한 어떻게 하면 더욱 효과적인 강론을 할 수 있을까? 전자에 대한 답은 지극히 개인적이며, 바쁜 사목자만이 대답할 수 있다. 그리고 후자의 질문에 대해서는 몇 가지 힌트가 답하는 것을 도울 것이다.


강론자는 자신을 살피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성찰해 본다. 성격과 지식, 경험, 기술(목소리, 몸짓, 억양 등) 등이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강론자로서의 역할에 도움이 되는 성격을 타고났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강론자가 되고자 자신의 몇 가지 성격을 극복해야 한다. 성경과 신자들에 관한 지식 또한 강론자마다 다르다. 성경을 찬찬히 공부할 좋은 기회를 가졌던 사람도 있고, 여러 다른 신자들을 알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이들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기회를 갖지 못했던 사목자도 있다.


또한 신학교에서 배운 성경에 관한 지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강론자는 계속해서 공부를 해야 한다. 한 회중 앞에서만 강론하면 한 유형의 회중에 대한 경험만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유형의 회중 앞에서 강론을 해보면, 강론하는 사람의 지식이 풍부해지고, 더 효과적인 강론을 하게 된다. 30년간 강론을 한 사목자는 이제 막 강론을 시작한 사람보다 더 많은 경험을 가질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강론의 기술적인 측면은 어떤 이들에게는 쉬운 부분이지만 또 다른 이들에게는 노력과 어려움이 따른다. 이러한 강론의 측면들은 매우 개인적이다. 강론은 강론자가 자신의 개인적 강점과 약점을 아는 데서 출발한다.

 

 

강론 내용으로서 성경

 

강론은 성경에서 시작한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예수님께 말씀하셨으며, 예수님을 통하여 그분의 초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러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기록인 성경은 오늘날 사람들이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 또 예수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의 관계에 대하여 배움으로써 하느님과 그들 자신의 관계에 대하여 이해하게 한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와 같은 신앙 체험은 오늘날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적 경험을 돌아볼 수 있게 한다. 수천 년 동안 내려온 하느님과 인류, 하느님에 대한 모든 가능한 경험과 하느님께 대한 응답이 이 하나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 성경은 단지 유다인과 예수님, 제자들에게 일어난 일들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인간답게 된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어떻게 신앙적 차원이 모든 인간생활 안에서 드러나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담겨 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너무나 흔하게 나타나는 종교적인 것에 대한 부인조차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성경은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마리를 제공하며, 신앙적 차원이 어떻게 삶의 여러 까다로운 질문들에 더 나은 답을 주는지 알아내도록 촉구한다. 성경은 언제나 강론의 근본적 내용을 형성하는 것이다.

 

 

강론의 배경: 전례

 

강론은 강론자와 신자들의 신앙 표현인 전례 안에서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경우 신자들은 강론자이며 집전자인 사제와 함께 기도를 바친다. 전례는 예수님과 그분을 통한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살아있는 기억이다. 전례의 의미는 토마스 데 아퀴노 성인이 쓴 찬양시 ‘오, 거룩한 잔치여(O sacrum convivium)’에 잘 표현되어 있다.

 

O sacrum convivium in quo Christus sumitur
recolitur memoriae passonis ejus
Mens impletur gratia nobis datur pignus futurae gloria

 

“오, 거룩한 잔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영하며,
그분의 수난을 기념하고 은총으로 가득 차며, 다가올 영광의 보증을 받는도다.”

 

전례를 통하여 과거를 상기하며, 현재는 은총으로 가득 차고, 모든 이가 미래의 영광을 고대한다. 하느님께서는 과거에 사람들에게 선하셨으며, 현재에도 그러하시고, 미래에도 그러하실 것이다.


강론은 이 세 가지 측면, 곧 과거의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기억(특히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다는 점), 현재 인간의 삶 안에서 하느님 현존의 필요성, 미래에 대한 약속 모두를 포함해야 한다.

 

 

신자 공동체

 

강론은 특정 시간에 특정 신자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다. 이를 고려하지 않은 총칭적인 강론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농촌 신자들과 도시 신자들은 매우 다르며,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 하는 강론과 어른에게 하는 강론이 다르다. 부유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하는 강론이 다르고, 교육 수준이 높은 이들은 성경에 대해 그렇지 않은 이들과는 다른 설명이 필요하다. 또한 요양소에서 하는 강론과 대학 캠퍼스에서 하는 강론이 다르다. 훌륭한 강론자는 회중에 적합한 강론을 한다.


특정한 상황 또한 강론에 영향을 준다. 장례미사인지, 혼인미사인지, 세례성사인지에 따라, 또한 현충일인지, 근로자의 날인지가 신자들이 살아가는 특정한 배경을 형성한다. 또한 이러한 회중 안에서 강론이 살아있게 된다. ‘어머니의 날’에 낙태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1월 1일 새해에 관심이 집중된 신자들에게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에 대하여 강론하는 것은 많은 것을 성취하지 못한다. 자연 재해 뒤에는 희망과 신앙에 대하여 강론하는 것이 칠죄종에 대하여 강론하는 것보다 의미가 있다. 특정한 시간과 장소, 회중 모두가 강론자의 머릿속에서 그리고 하느님 말씀을 실제로 강론하는 데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계시: 강론의 토대

 

계시는 감추인 것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알려지게 되는 것이다. 드러냄과 계시에 대하여 더 자세히 이해하고자 할 때 여기에는 관계 맺음이 포함된다. 누가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 보일 때, 자신의 몇 가지 면들을 드러내는 것은 관계를 맺고자 하는 암묵적 제안을 의미한다. 교사는 학생과 교사의 관계를 맺고자 학생들에게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이러한 드러냄은 우정의 가능성을 포함한다. 이러한 제안은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거부되기도 한다. 처음에 이러한 다가감이 받아들여지면, 양측에서 점점 자신을 더 많이 드러내게 된다.


하느님의 측면에서 보면, 하느님께서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자 제안하신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현존 의미를 드러내 보이시며, 인간은 이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한다. 받아들이는 것을 우리는 신앙이라고 부른다.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러한 관계 맺음을 제안하신다. 창조 그 자체로 창조주와 관계 맺도록 하는 완전한 선물일 것이다. 개인이 그의 삶에서 신앙적 체험을 할 때 이 또한 관계에서 오는 선물이다. 대부분 많은 이들의 신앙 초기 단계에서 하느님 편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관계 맺음은 매우 개인적이며 내면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그 관계는 또한 공적이며 외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신앙 체험에 감동하여 신앙심을 갖게 되었다면, 그가 하느님과 맺는 관계는 공적이고 외적인 기준을 충족시킨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 특히 모세를 통하여 유다 민족과 관계를 맺으신다. 모세는 유다 민족과 함께 사막에서 신앙 체험을 하였다. 구약 성경은 하느님의 이러한 관계 맺음의 제안을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러한 하느님의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의 민족이 되었다. 예언자들 또한 각자 하느님 체험을 하였으며, 차례로 하느님과 맺는 관계와 이 관계를 충실하게 받아들이며 살아야 할 필요성에 대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였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한 체험을 하셨다. 구약과 마찬가지로 신약에서도 예수님과 하느님, 그리고 하느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러한 관계 맺음과 신앙 안에서 이를 받아들이는 법을 이해하고자 신약 성경으로 눈을 돌린다. 일단 이것을 이해하게 되면, 비록 부분적으로 이해하는 것일지라도 각자는 하느님과 그 관계를 받아들이려는 자신의 바람을 연결할 수 있게 된다.


훌륭한 강론자는 성경을 알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건네시는 관계 맺음의 제안과 그에 대한 응답의 기록을 안다. 또한 강론자는 신자들의 필요를 알고 있으며, 이 두 가지를 함께 다룬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갈망과 인관과 관계 맺으려고 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그러한 제안에 응답하는 데는 도움이 필요하다. 강론자는 바로 이러한 도움을 제공하는 사람이다.


강론은 현재와 앞으로도 영원히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관계 맺고자 하심을 전제로 한다. 계시는 모든 강론의 근본이며,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관계 맺음의 역사를 알고자 하는 노력을 요구한다. 오늘날 사람들이 앞선 시대의 사람들의 신앙 체험을 이해하게 될 때, 그들은 그들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초대에 더 잘 응답하게 될 것이다. 계시 없는 관계 맺음은 불가능하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이러한 초대와 응답에 대한 설명 없이, 또한 현 시대의 신자들의 요구에 대한 지각 없이 하는 강론은 완전히 실패한다.


처음 생각보다 강론법이 더 복잡해지고 요구하는 것이 많아졌다. 강론자의 개성, 재능과 약점을 고려하여야 하고, 내용은 성경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전제로 하며, 전례라는 배경이 강론에 색을 입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강론은 하느님의 초대와 하느님과 관계 맺도록 하는 이러한 초대에 대한 개인과 공동체의 응답을 포괄한다. 각각의 요소는 강론의 온전한 의미의 일부분만을 형성한다. 그렇지만 이것이 함께하면 사람들의 삶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가능성을 창조한다. 이러한 강론의 임무는 대단한 것이다. 도전적이며, 매우 큰 만족을 주는 것이다. 이 일은 강론자를 통하여 계속해서 관계 맺음의 가능성을 제공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으로써 가능하다. 하느님의 말씀은 이러한 작업을 능가하며, 이를 성취한다. 강론자는 단지 그 힘 있는 말씀에 봉사하는 것뿐이다.

 

 

강 론

 

사람들은 하느님 말씀과 만나고 싶어한다. 이러한 만남은 반드시 성경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계시는 성경에 기록된 것 이상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경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체험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에게 일반적인 방법이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 모든 인간의 삶 안에서 하느님 현존의 강렬한 체험인 구원을 이루신다. 구원은 죽음 이후로 유보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체험 안에서 이루어진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이해,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이해는 인간 삶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의 현존을 사실로 받아들이도록 돕는다. 성경은 이 구원의 약속이 실제로 경험됨을 보증한다. 강론은 이러한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다.

 

 

강론이 아닌 것

 

강론자나 회중 모두 종종 강론이라는 말에 혼동을 일으켜서 그 의미를 잘못 이해한다. 진정한 강론은 개인적 관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강론자의 개인적 생각이나 의견, 느낌 등을 발산하는 기회가 아니다.


또한 강론은 신학 강의가 아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신학 강좌를 듣기도 한다. 신학은 신앙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는 학문이다. 강론은 신학 교수들이 중요한 신학적 견해나 소수의 신학적 견해에 대하여 설명하는 자리가 아니다. 그렇지만 훌륭한 신학을 전제로 하여야 한다. 신학은 강의실에서 가르치는 것이며, 신학의 열매는 학생들을 통하여 얻어야 한다.


강론이 신학 강의가 아니듯이 강론은 성경 본문에 대한 자세한 해설을 하는 것도 아니다. 성경에 대한 주의 깊은 연구는 말씀의 의미와 본문에 사용된 문학 유형, 각 성경에 대한 신학적 이해, 그리고 각 성경의 상호 연관성에 대하여 알게 한다. 강론은 완전한 성경 해석을 하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 다만 성경 해석학의 기초를 전제로 한다.


때로 강론자는 그의 강론에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포함시키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공적 생활에서 필요하다 하더라도 강론이 그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토론하는 장은 아니다. 특별한 정치적 사회적 문제는 교회의 영역에 속하여 있다. 그렇지만 강론은 사회정의와 정치 참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설명하는 장은 아니다. 그러나 강론이 정치적 사회적 측면들을 담고 있는 현실 세계와 관련되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강론은 윤리에 대한 훈계가 아니다. 삶에 필요한 윤리적 지침들은 종교교육 특히 가정에서 습득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교회에 찾아왔을 때, 윤리적 이행은 이미 개인 삶 안에 통합되어 있다. 그렇지만 강론은 윤리적 생활을 북돋우고 언제나 어떤 결심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

 

 

강론이란 무엇인가

 

강론은 매일의 삶을 배경으로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를 연결하는 성사적이며 상징적인 활동이다. 성사적 활동으로서 강론은 말씀을 통한 하느님의 활동을 담고 있으며, 상징적 활동으로서 강론은 말하고 듣고 응답하는 것을 포함한다. 강론자나 회중 모두 우리의 매일의 삶의 평범함과 관련하여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하느님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의 현존과 마주하도록 이끌린다. 그 전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선행되며,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하느님 말씀인 예수님의 현존을 기념하는 데서 그 완전함을 찾는다. 이 과정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전제로 하며, 각각은 다른 것과 연관된다.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거룩한 음식을 받아 모셨을 때, 하느님과 신자들의 일치뿐 아니라 신자들 사이의 일치 또한 이루어진다. 말씀과 성사는 이질적인 실재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실재 또는 같은 실재에 대한 두 가지 측면이다. 모든 강론은 성사적 활동, 특히 성찬례 거행과 관련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강론은 인간의 매일의 삶에 이바지하여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범한 삶을 산다. 이들은 세상을 움직이거나 흔드는 이들이 아니다. 대부분의 삶은 지극히 평범하다. 물론 세계정의나 세계 기아, 세계평화 등과 관련하여 국제적 결정을 하는 데 하느님의 말씀을 고려하여야 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이러한 거대한 문제들에 대하여 직접 할 수 있는 것들을 찾기 어려워 한다. 사람들은 희망과 느낌, 감정, 다른 이들의 필요에 대한 인식, 계속해서 발전하려는 자의식을 지니며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 강론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러한 그들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여야 한다.


강론자는 무엇을 하는가? 성경을 알고, 회중을 알며,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하느님과 맺는 관계를 받아들이고 그 관계 안에서 살아가도록 도움을 준다. 독서의 의미를 제시하고, 성서적 맥락 안에서 그 의미를 배치시키고, 그것을 신자들의 삶과 연결시키며, 응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이를 이룰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사항을 제안한다.

 

1. 매주 성경을 연구할 시간을 찾으라. 월요일에 다가오는 주일의 성경 말씀을 읽으며, 한 주 동안 그 말씀에 대하여 생각한다. 그리고 해석을 위해 참고 자료들을 찾아본다.
2. 신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도록 하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하도록 한다.
3.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 신자들이 요즘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도록 하라.
4. 독서와 독서의 배경, 회중의 상태, 바라는 답 등 강론의 외적 부분을 개발하라.
5.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을 성찬례 안의 하느님 말씀의 현존과 연관시키도록 하라.
6. 강론자로서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하도록 하라. 강점은 잘 이용하고, 약점은 극복하도록 한다.
7. 무엇보다도 매주 성경을 공부하는 시간을 따로 마련하도록 하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강론을 하느님과 사람들의 관계 맺음에 이바지하는 것으로 인식하여야 한다.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현존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전하라. 하느님께서는 말씀과 성사 안에서 지금 이 순간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로마 8,32 참조)

 

* 원문: John F. O'Grady, “The Many Facets of Preaching”, The Priest(2002. 5.), 34-37면, 이준혜 편역.

 

[사목, 2005년 10월호, 주교회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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