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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자료

개신교 목사 설교 들여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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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7 ㅣ No.674

개신교 목사 설교 들여다보기

 

노희성(본지 편집장)

 

설교/설법/강론 만족도 비교

 

한미준-한국갤럽의 『한국교회 미래 리포트』(두란노, 2005년: ‘한미준’은 ‘한국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의 줄임말로 개신교 목사들이 주요 구성원임)에 따르면, 현재의 교회/성당/절에 다니는 이유로 ‘목회자/신부/스님의 설교/강론/설법이 좋아서’라고 응답한 비율이 개신교 신자 21.8%, 불교 신자 11.9%인 반면, 천주교 신자는 7.1%로 나타났다. 천주교 신자들이 느끼는 강론 만족도가 상대적으로 낮음을 보여주는 수치이다.


천주교식으로 말해서, 성찬전례 대신에 말씀전례를 발전시켜 온 개신교에서 설교의 질이 높아지고 설교를 듣는 사람의 만족도가 올라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개신교 예배는 목사의 설교와 찬양(성가 부르기)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신교에서는 유명 목사의 설교를 들으려고 교회를 옮기는 일도 드물지 않다. 그만큼 개신교 신앙생활에서 설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반면, 천주교에서는 미사 때 강론 말고도 성찬전례가 하느님 은혜를 받는 통로로 마련되어 있고 또 거주지에 따라 소속 본당이 자동적으로 정해지므로 개신교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지는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도 천주교에서 강론을 소홀히 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제도 없을 것이다.

 

“교회 성장 비결은 목사의 설교 능력”

 

개신교 목사에게 설교 능력은 교회 개척과 성장의 비결이기도 하고, 생계와 직결되는 자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어떤 목사들의 설교 준비에는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큰 교회 큰 목사 이야기』(이근미, 월간조선사, 2005년)라는 책에는 일반인도 여러 번 이름을 들어보았음직한 16명의 목사가 등장한다. 75만 명의 신도를 거느린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 모범적인 성공 모델로 여겨지는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 교양강좌처럼 깊이 있는 설교로 신도를 이끄는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 극동방송 사장으로도 잘 알려진 김장환 목사 등이 그들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설교’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 점이다. 심지어 책 표지에까지 “큰 교회들의 성장 비결을 딱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역시 ‘담임목사의 설교 능력’이라고 말하겠습니다.”라고 적혀있다.

 

유명 목사들의 설교 준비

 

『큰 교회 큰 목사 이야기』에 나오는 유명 목사들은 설교를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준비하는가?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1936년생)는 모든 설교를 준비할 때 30분에서 3시간 정도 기도를 하고, 말씀을 전하기 어려운 지역에 가서는 설교를 준비한 뒤 다시 30분에서 3시간 기도를 한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설교를 하는 데 나의 모든 에너지를 사용합니다. 내 시간의 30%는 교회의 운영과 목회 일정에 쏟으며, 나머지 70%는 설교를 작성하는 데 보냅니다.” “구역 조직은 교회 성장의 한 방편이고 정말 중요한 건 설교입니다. 아무리 외진 곳에 있어도 음식이 맛있으면 다 찾아갑니다.” “젊었을 때 거울 앞에서 제스처도 연습하고 녹음을 해서 음성의 크기도 조절하고 싫은 말투를 바꾸기도 했죠.” “예화는 조미료예요. 사람 만날 때나 신문이나 잡지를 읽을 때 특이한 게 있으면 메모해 두었다가 적절하게 사용합니다.”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1938년생)는 이렇게 말하였다. “미사여구나 우아한 문장, 논리적인 정보전달보다는 듣기 편하고 마음에 호소하는, 그래서 자꾸만 뇌리 속에서 되뇌어지는 대화식 설교를 하려고 노력합니다. 남자든 여자든 하나님의 말씀을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게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의 방법에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수원중앙침례교회 김장환 목사(1934년생)는 말한다. “주일 설교를 마치고 단에서 내려오는 순간, 아니 설교를 마치고 다음 순서를 진행하는 순간부터 다음 주일 설교 준비의 부담을 안게 되는 것이 목회자의 생활이다. 나는 여행을 하는 시간이 비교적 많은 편인데 여행할 때 설교 구상을 많이 하게 된다. 설교의 원칙은 ‘말씀으로 말씀을 풀이한다.’로 정하고 있으며 따라서 설교 중에 성경 말씀 인용이 비교적 많은 편이다. 예화는 예화집에 있는 정적인 예화보다 신문 기사, 주변에서 일어난 일 등 동적인 것을 많이 사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김장환 목사는 신유의 은사나 기복적인 기도는 되도록 배제하고, 십일조를 강조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십일조는 예수님을 잘 믿으면 저절로 내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1945년생)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설교 준비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성경을 묵상하면서 성도들의 현실적인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을 찾지요. 성경의 옛날 얘기를 오늘의 얘기로 바꾸는 것이 설교의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동원 목사는 설교를 위해 엄청난 독서를 한다고 한다. 한 권의 책을 읽는 데 하루를 넘기지 않을 정도로 독서광이며 독서 폭이 상당히 넓다.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1933년생)는 1998년 12월 목회자를 대상으로 한 교육에서 참석자들에게 “잘하는 설교에 대한 이상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설교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 잘하는 설교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설교를 잘하는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게 하는 것이고, 2000년 전의 말씀을 오늘의 말씀으로 통역하는 것이다.” “설교할 때 수준을 낮게 하지 말라. 제일 높은 수준에 맞게 하라. 맨 위 10%에 맞추어 설교하고 목회하라. 잘 듣는 우등생 교인에게 초점을 맞추어 하라.”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1963년생)는 자신의 저서 『기적이 상식이 되는 교회』에서 “설교에 목숨을 건다.” “극단적으로 얘기해서 책 읽기 싫으면 목사를 그만둬야 한다. 설교와 독서란 뗄 수 없는 관계이다.”라고 하였다. 전병욱 목사는 한 달에 50권 정도의 책을 보고, 한 달 평균 40-50편의 설교를 준비해서 80회 정도 설교를 한다고 한다.

 

설교의 분류

 

설교는 그 구조와 성경 본문과의 관계에 따라 보통 강해설교, 본문설교, 제목설교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조용기, 『나는 이렇게 설교한다』, 서울말씀사, 2004년, 229-234면 참조).


강해설교는 성경의 본문을 배경과 문자적 의미, 그리고 주해를 통해 성경 자체의 의미를 전함으로써 교훈을 얻는 설교이다. 성경 본문은 구절 하나만으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므로 본문의 배경, 곧 성경 본문이 기록된 장소와 연대, 상황 등에 관하여 알아야 하며, 성경 원문 곧 히브리어와 아람어, 희랍어 원문을 살피는 것이 유익하고, 기존 주해서를 참조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설교자 자신이 성령의 능력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본문설교는 가장 일반적인 설교 방법으로, 성경 본문에 따라 제목과 대의(大意)가 결정된다. 예를 들면, 고린토 1서 13장 1-7절을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삶의 철학”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로 복음 말씀에 따라 주제를 정하는 천주교의 강론과 가장 비슷한 설교 형태라고 볼 수 있겠다.


제목설교는 먼저 제목을 선정하고 그에 따른 성경 본문을 고른 다음에 설교 전체를 이끌어나가는 것을 말한다. 제목설교는 강해설교나 본문설교와는 달리 광범위한 주제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제목설교는 자칫 세속적 문제에 치중하여 하느님 말씀의 전달을 소홀히 하기 쉽다는 점에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설교 본보기: 옥한흠 목사

 

개신교에서 커다란 존경을 받는 서울 서초동 사랑의교회 옥한흠 원로목사가 2005년 3월 20일 “날마다 십자가를 보라”는 제목으로 약 45분 동안 설교한 내용을 정리 분석해 보았다. 성경 구절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이다.


옥한흠 목사는 십자가의 의미가 인간 지성으로는 온전히 이해될 수 없으나, 십자가야말로 신앙생활의 중심이며 인간 구원의 근거이고, 십자가 앞에서 겸손되이 하루 10분씩 묵상함으로써 세상을 사는 힘, 거룩하게 사는 힘, 희생하며 사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역설한다. 옥 목사는 이 설교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생생하게 전달하려고 어떤 산악인 이야기,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 등을 예화로 들고, 갈라디아서와 요한 묵시록 등을 근거로 제시하며, 특히 십자가 묵상으로 주어지는 세 가지 열매 또는 힘에 관하여 길게 설명하면서 날마다 10분씩 십자가를 바라보도록 거듭 강조한다.


1) 고난주일에 즈음한 ‘십자가’ 의미 상기: 35년 동안 성경을 공부하고 신학을 연구하고 십자가를 가르치는 생을 살았지만, 현 시점에서 냉정히 생각하면 십자가의 의미를 잘 모르겠다.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을 사랑해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였다는 것을 좁은 지성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


2) 한 산악인 이야기 소개: 한 산악인이 자기 후배와 함께 히말라야 높은 산을 등정하고 내려오던 중에 후배가 크레바스(빙하의 표면에 생긴 깊은 균열)에 빠졌을 때에, 함께 묶고 있던 자일을 끊지 않고 몇 시간 동안 사투하다가 결국 후배의 생명을 살렸다. 나중에 그 산악인은 손가락 여덟 개를 잘라야 했다. 그런데 자신의 생명을 걸고 남을 살릴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자기 아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할 부모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 아들이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나? 이해한다는 사람은 멍청한 사람이다. 십자가를 생각하면 겸손해야 한다.


3) 율법의 지배와 십자가의 구원:


- “나는 이미 율법의 손에 죽어서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위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갈라 2,19).


- 인간은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 거룩한 하느님 앞에 설 때마다 죄인이다. 죄인이므로 죽어야 하는데, 하느님 아들이 죄인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대신 돌아가주셨기 때문에 인간은 율법의 지배를 벗어나 새 생명을 얻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


4) 신앙생활의 본질: 십자가


- 당신 몸을 내어주신 하느님 아들을 믿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바꾸어 말하면 신앙생활의 중심에는 십자가가 있어야 한다. 십자가 없는 신앙생활은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생활이 아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왜 그렇게 어리석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여러분의 눈앞에 생생하게 나타나 있는데 누가 여러분을 미혹시켰단 말입니까?”(갈라 3,1)


- 요한 묵시록의 장면 장면에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등장한다. 예수님은 영원한 과거에서 영원한 미래에 이르기까지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다.


- 테르툴리아누스의 말에 따르면 초대교회 교인들은 언제 어디서나 십자가를 잊지 않으려고 날마다 식탁에 앉을 때에 이마에 십자 표를 그었다. 종교개혁 때에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천주교는 지금도 십자를 긋고 있다.


5) 옥한흠 목사의 과거 회상: 어머니가 평생 한두 번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너를 낳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너는 젖 달라고 하는데 젖은 안 나오고 너는 배고파 많이 울었다.” 어머니의 그 심정, 그 말씀을 잊을 수 없다. 하느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만큼 진한 감동을 주는 것은 없다.


6) 십자가의 은혜 세 가지


- 첫째 은혜: 세상을 사는 힘을 얻는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를 자책하지 마라. 나는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는다. 나의 이 사랑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거니? 인생의 짐이 무겁다고? 나는 더 무겁다. 그러나 다 지나간다. 하늘의 영광은 세상의 고난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 말씀을 듣고 ‘내가 이렇게 소중한 존재구나. 하느님께서 나를 이렇게 소중히 보시는구나. 이렇게 시시하게 살 수 없다.’고 생각하며 세상을 사는 힘을 얻는다. 하루에 10분만 십자가의 죽음을 묵상해 보라.


- 둘째 은혜: 거룩하게 사는 힘을 얻는다. 우리는 주님의 은총으로 의롭게 되었으나, 계속해서 거룩하게 살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죄를 범할 수 있다. 그러나 율법의 지배를 받던 때와는 달리,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잘못한 것이므로 빨리 회개하고 다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거룩하게 살기 힘들다. 계속해서 넘어지고 무서운 악습이 나를 결박해서 끌고 다닌다. 무슨 힘으로 거룩하게 살 수 있을까? 그 힘은 십자가에서 온다. 하루 10분만 십자가를 묵상하라. 나는 죄를 이길 수 있다는 새로운 각오와 힘이 솟는다.


- 셋째 은혜: 희생하며 사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세상은 누군가의 희생이 있을 때 발전한다. 주님은 우리의 피와 땀, 생명과 눈물을 요구하신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죽으라는 뜻이라는 본회퍼(Bonhoeffer)의 말은 진리다. 예수님의 제자는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모든 족속을 주님 제자로 만들라는 명령을 이행하려면 생명을 거는 희생이 따라야 한다. 자녀 없는 기혼 여성에게 물으니 앞으로 아기를 낳겠다고 응답한 비율이 22%였다. 자기 시간을 갖고 인생을 즐기려고 자녀를 낳지 않는단다. 자녀를 위해 희생하지 않겠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이기주의인가? 그런 사람은 정신적으로 병든다. 어느 정신과 의사가 말하기를, 아이 5명 낳은 여자가 정신병원에 온 것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단다. 희생하기 바쁜데 어떻게 정신병에 걸리겠는가? 희생이 있는 곳에 주님의 능력이 있다.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10분 십자가의 주님을 보라. 믿음의 눈으로 보라. 그러면 자신도 썩는 밀알이 되어 희생하려는 마음과 힘이 솟는다.


7) 짧은 기도로 설교 마침: 성도의 영안을 열어주시어 십자가의 주님을 보는 삶을 통해서 놀라운 힘을 체험하는 하루하루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바친다.

 

맺음말: 개신교 설교에 대한 내부 반성

 

월간 『기독교 사상』은 2004년 9월 18일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에서 “한국교회 설교를 말한다”라는 주제로 신도 수가 많은 교회 목사들의 설교를 분석, 비평하는 학술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내용은 『기독교 사상』 2004년 10월 호에 실려있다. 그 가운데 안동교회 원로목사인 유재경 목사는 “실존과 역사의 언저리에 서서”라는 글에서 다음 세 가지로 한국교회 설교의 취약점을 지적하였는데, 천주교 강론자에게도 참고가 될 만한 내용이라고 여겨 이로써 맺음말을 대신하고자 한다.


첫째, “한국교회 설교자들의 설교에서 가장 큰 문제는 신학이 없다는 점이다.” 성서에 나타난 하느님 말씀을 올바로 해석하려면 당일 성서 본문뿐 아니라 성서 전체를 꿰뚫는 신학 지식이 필요한데도 그것이 결핍되다 보니 자의적 성서 해석으로 흐르고 주어진 현실과 타협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실례가 바로 “예수 잘 믿으면 부자도 될 수 있다.”는 ‘삼박자 구원’과 ‘청부론’(깨끗한 부자론)이라고 한다. 이러한 메시지는 자본주의 시대에 대단히 매력적이지만, 구약성경의 ‘아나윔’(가난한 자들), ‘남은 자’로 이룩되는 하느님 나라, 또 신약성경에서도 목숨까지 버리는 그리스도의 가난을 통하여 이룩되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양립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둘째, “한국교회 강단의 문제는 잘못된 교회론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교회의 양적 성장이 곧 하느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이해와 관련이 있다. 1970년대에 이룩한 놀라운 성장 이면에는 개인주의 신앙과 기복 신앙의 만연이 있었고, “교회의 대형화 추세는 농촌과 공단 지역 교회의 소외를 심화시켜 교회의 계층화”를 촉발하였으며, 더욱이 “변화하는 새로운 시대에 올바로 적응할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반성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의 선포가 설교의 중심 주제이어야 하며, 특히 그 나라는 목회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왕으로 다스리신다는 것과 그 나라의 구성원은 개인주의적 삶에서 벗어나 공동체를 지향하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 세상의 모순을 외면한 채 저 세상을 바라볼 수 없음”을 선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셋째, “한국교회 강단의 또 하나의 문제는 바로 역사의식의 결여이다.” 설교가 예언적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는 뜻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박해를 당하면서까지 외치던 내용은 무엇이었으며, 왜 외쳤는지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진리와 자유, 정의와 평화를 짓밟는 사람들에게 경고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기보다 오히려 인간의 비위를 맞추며 하느님 말씀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설교가 예언적 기능을 회복할 때에 교회는 새로운 영광의 날을 보게 되리라고 역설하는 것이다.

 

[사목, 2005년 7월호, 주교회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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