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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자료

아우구스티노 성인에게서 배운다: 위대한 수사학자의 강론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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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7 ㅣ No.673

아우구스티노 성인에게서 배운다
- 위대한 수사학자의 강론 특강 -


노희성(본지 편집장)

 

위대한 주교요 당대의 탁월한 수사학자였던 아우구스티노(354-430년) 성인은 『그리스도교 교양』(De doctrina christiana) 제4권에서 성경 말씀을 글과 말로 전달하는 방법에 관하여 다루었다. 물론 책 제목이 가리키듯 ‘성경 말씀의 전달’은 그리스도인의 교양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말씀 전례 안에서 권위 있게 하느님 말씀을 제시하는 사제의 ‘강론(homilia)’에 특히 해당된다. “하느님의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는 것”이 사제들의 첫째 직무이기 때문이다(사제의 생활과 교역에 관한 교령 「사제품」, 4항). 이 글은 『그리스도교 교양』 제4권의 내용을 바탕으로 강론 준비와 내용 그리고 방법을 정리한 것이다. 본문은 성염 역주(분도출판사, 1918년)를 인용하였다.

 

1. “웅변의 법칙을 좇기보다는 웅변가들의 말을 듣거나 (그들의 글을) 읽음으로써 쉽사리 웅변술을 터득할 것이다”(III 4).


이 말은 치체로의 수사학 교과서 『웅변가에 대하여』(De oratore)를 참조한 것이다. 문법을 몰라도 말을 잘할 수 있듯이, 수사학 법칙을 배우지 않고도 능변가가 될 수 있듯이, 강론 법칙을 몰라도 강론을 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론 법칙을 배우는 것보다는 좋은 강론을 많이 읽고 듣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만일 무슨 내용의 강론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언변과 지혜를 다하여 쓴 글을 입수하고 암기하여 회중에게 전하는 것까지도 유익하다고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한다(XXIX 62 참조).

 

2. “비록 달변으로 말은 못할지라도, 지혜를 갖고 말을 해야 하는 사람은 성경 말씀을 암기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 자기의 (언어가) 빈약하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그만큼 (적어도 성서 말씀에) 풍부해져야만 한다”(8).


강론과 성경은 뗄 수 없다. 교회법 제767조 1항에 따르면, “강론은 설교의 여러 형식 중에서 탁월한 것으로 전례의 한 부분이며 사제나 부제에게 유보된다. 전례 주기를 따라 강론 중에 신앙의 신비와 그리스도교인 생활의 규범이 성경 구절로 해설되어야 한다.” 강론을 한다면서 성경 말씀에서 벗어나는 것은 강론의 품위를 격하시키는 일이다. 신자들에게 신앙의 신비와 그리스도교인 생활의 규범을 해설할 때에 관련 성경 구절들을 암송하면서 제시한다면 유창한 수사가 없더라도 그 자체로 훌륭한 강론이 될 것이다.

 

3. “(성경 저자들보다) 더 지혜로운 자가 아무도 없을뿐더러 그들보다 언변이 더 좋은 자가 아무도 없다”(VI 9).
이 말은 성경 자체가 위대한 웅변의 모범이며, 어떤 성경 구절들은 수사학적으로도 훌륭한 강론의 본보기라는 뜻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 예로서 바오로 서간과 아모스 예언서 등을 제시하였다. 로마서 5장 3-5절에 관한 성인의 설명을 들어보자.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3-5, 공동 번역보다 원문에 더 충실한 것으로 알려진 새 번역 성경 인용).


여기서는 환난에서 인내로, 인내에서 수양으로, 수양에서 희망으로 연결되어 문세(文勢)가 높아감을 보게 된다. 둘째 문장(위 한글 번역에서는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 부어졌기 때문입니다.’임 - 필자 주)에 앞서 세 개의 절이 나오는데, 첫째 절은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둘째 절은 ‘인내는 수양을 (자아내고)’, 셋째 절은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이다. 그 다음에 온전한 문장이 뒤따르는데 그것도 세 절로 되어있다. 그 첫째는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습니다.’요, 둘째는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요, 셋째는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을 통하여’이다(한글 번역에서는 셋째를 둘째보다 먼저 옮겨놓았음 - 필자 주). 이런 형식이나 이와 유사한 화법은 원래 수사학에서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사도가 (의도적으로) 수사학의 법칙을 따랐다고는 말하지 않지만 그의 지혜에 언변이 따라주었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는다”(VII 11).


결국 성경은 좋은 강론의 내용과 형식을 모두 갖추고 있는 셈이다. 사도 바오로나 예언자 아모스는 당시 상황에 적합한 하느님 말씀을 명료하고 우아하며 설득력 있게 제시하였다.

 

4. “가르치는 사람은 얼마나 훌륭한 언변으로 할까에 마음을 쓰지 말고 얼마나 명료하게 가르칠까를 생각할 것이다”(IX 23).


하느님 말씀에 대하여 가르치는 데 훌륭한 언변이 반드시 필요한가? 꼭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입장이다(III 4: “이미 성숙했거나 더더욱 나이든 사람들이 그것을 배우는 데 다시 시간을 쏟을 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명료하게’ 가르치려면 강론자 자신이 먼저 하느님 말씀을 명료하게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또 강론은 회중을 상대로 하는 것이므로, 곧 대화처럼 각자에게 질문할 여유가 없으므로 가르침을 명료하게 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아무리 화려한 언어를 구사하더라도 가르치려는 진리의 내용을 명료하게 드러내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비록 열쇠가 금으로 되어있다 하더라도 열고 싶은 것을 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XI 26)
다른 한편, 『그리스도교 교양』 제4권에서 웅변의 세 가지 목표와 그에 따른 세 가지 양식에 관하여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한 것을 보면 강론할 때에 되도록 그러한 방법을 활용하여 주기를 바라는 성인의 마음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으며, 화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목도 없지 않다. “까다로운 사람들에게는 진리를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은 흡족하지 않으며, 말하는 사람의 화술도 상대가 흡족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XIII 29).

 

5. “언변의 위력보다는 기도의 경건함으로 자기가 이 일을 해낸다는 것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을 위해서 또 연설을 할 상대방을 위해서 기도함으로써, 그는 발언자이기에 앞서 탄원자가 되는 것이다”(XV 32).


강론 중에 해설해야 할 신앙의 신비와 그리스도인 생활의 규범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강론자 앞에 앉아있는 신자가 한두 사람인가? 강론을 듣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처해있는 상황도 모두 다르다. 강론자 자신이 그들 모두에게 하느님 말씀을 전달하고 하느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게 해줄 수는 없다. 강론자는 하느님 말씀의 봉사자, 곧 하느님의 거룩한 도구일 뿐, 참으로 일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심는 사람이나 물을 주는 사람은 중요할 것이 없고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하십니다”(1고린 3,7). 그러므로 강론자는 자신을 쓰시는 분의 뜻에 따라 임무를 충실히 이행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자신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성령께 온전히 의탁하여야 한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다”(마태 10,20). 또한 사제로서 하느님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도 강론자의 일이다.

 

6. “무엇을 가르칠 적에는 차분하게, 무엇을 책망하거나 칭찬할 적에는 절도 있게, 그러면서도 무엇을 행동에 옮겨야 하고 그 행동을 하여야 하는데도 하려는 의욕이 없는 사람들에게 말할 적에는 중대한 사안이니 장중하게 발언하고 그들의 심중을 설복시키는 데 적절한 형식을 써야 한다”(XIX 38).


로마 수사학의 창립자 치체로에 따르면, 웅변가란 사소한 일은 차분하게, 보통의 일은 절도 있게, 중대한 일은 장중하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다. 물론 웅변가와는 달리 강론자에게 ‘사소한’ 소재는 없다. 강론대에 서서 회중에게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멸망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어찌 ‘사소한’ 일이란 말인가? 그렇지만 강론 처음부터 끝까지 열변을 토할 수도 없고, 강론 내내 차분하게 말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위에서 언급한 차분한 어법, 절도 있는 어법 그리고 장중한 어법의 예를 성경에서 제시한다.


차분한 어법의 예는 갈라디아서 4장 21-26절이다. “율법으로 살기를 원하는 여러분,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을 들어보지 못했습니까? 율법서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둘을 두었는데 … ”
신중한 어법의 예는 디모테오 1서 5장 1-2절이다. “노인에게는 나무라지 말고 오히려 아버지를 대하듯이 좋은 말로 충고해 드리시오. 젊은이들에게는 형제에게 하듯이, 나이 많은 여자들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이, 젊은 여자들에게는 자매에게 하듯이, 오로지 순결한 마음을 가지고 충고하시오.”


장중한 어법의 예는 고린토 2서 6장 2-11절이다. “지금이 바로 그 자비의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린토의 교우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숨김 없이 다 말하였고 내 마음은 여러분에게 활짝 열려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성경뿐 아니라 암브로시오 성인과 치프리아노 성인의 문장의 예를 들면서 세 가지 문체를 설명하기도 한다. 이러한 문체들을 적절하게 섞어 씀으로써 어법을 다채롭게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 가지 양식으로만 강론을 하면 듣는 사람의 관심을 붙잡아둘 수 없기 때문이다. 장중한 어법을 오래 지속시켜야 하는 경우라도 중간에 차분한 어조를 삽입했다가 다시 장중한 어조로 돌아오는 것이 효과적이며, 특히 첫머리는 되도록 신중한 어조로 시작하여야 한다.

 

7. “말을 따르게 하는 데는 어조의 장중함보다도 말하는 사람의 삶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한다”(XXVII 59).


바오로 사도는 디모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말에나 행실에나 사랑에나 믿음에나 순결에 있어서 신도들의 모범이 되시오.”(1디모 4,12)라고 하였다. 이는 사람들에게 멸시당하지 않는 방법이다. 아무리 화려하고 장엄한 어법을 구사한다고 해도 그릇된 행실로 멸시당하는 사람의 강론은 힘이 없다. 그러한 강론자는 오히려 신자들의 걸림돌이 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못된 생활의 핑계를 딴 데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존경받는 사제의 강론은 훨씬 많은 사람에게 선익을 가져다준다. 말을 지혜롭게 하지 못하는 강론자라 하더라도 그가 보여주는 모범적인 생활 모습은 훌륭한 강론에 견줄 만하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성경 말씀의 전달’에 필요한 태도와 방법과 기술 등을 알려주려고 하였다. 이는 비신자에게 하느님 말씀을 전하려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지만, 전례 안에서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고 그 말씀 안에서 신자들을 하느님께 인도하는 사제들에게 특히 유익한 내용이다. 성인이 제시한 내용들을 실행에 옮기기에 가장 유리하고 적합한 여건에 있는 이들이 사제들이며,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는 것”이 사제들의 첫째 직무이기 때문이다.


사제들을 위하여 힘 닿는 데까지 『그리스도교 교양』 제4권에 담긴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이러한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사목, 2005년 6월호, 주교회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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