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2일 (토)
(녹)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강론자료

주의수난 성금요일-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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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3-04-26 ㅣ No.404

주의 수난 성금요일

  이사 52,13-53,12  히브리 4,14-16; 5,7-9  요한 18,1-19,42

 2003. 4. 18.

주제 : 대속(代贖)의 죽음

오늘은 예수님이 이 세상의 삶을 마치신 날입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죽음과 하느님 자신의 죽음은 그 차원을 달리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 표현이 다양하지 않기에 예수님께서 구원의 희생으로 죽으신 것과 보통 사람들의 죽음을 같은 낱말로 표현합니다만, 그 의미는 분명 다른 것입니다.  사람이 생명을 다하고 이 세상을 떠나는 죽음과 음식으로 쓰기 위해서 동물을 잡는 것의 차이와 같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예언자는 ‘하느님의 종 네 번째 노래’를 통하여 죽음의 의미를 흔히 아는 죽음과 다르게 해석합니다.  사람들이 그 의미를 모르고 저지른 일들을 하느님은 인류구원의 이정표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와 앉은 우리가 똑같은 마음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교회는 예수님의 죽음과 그 의미를 그렇게 받아들이고 설명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대신 고통을 당하고,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분에게 하느님은 특별한 표징을 준비하고 계시다고 말입니다.  물론 우리가 머리로 알아듣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나의 삶도 하느님의 아들이 보여주신 그 의미를 실천할 수 있는 것이 돼야 합니다.

 

우리는 생명의 값어치를 계산합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던 여러 가지 직책에 따라 그 계산은 달라집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사용하고 없어질 돈으로 계산합니다.  하지만 전 인류에게 영향을 끼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上] 죽음의 효과는 2000년 전 한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까지 연장되는 것이고 앞으로도 그 의미는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죽이고도 사람들은 자신이 승리한 것이라고 축배를 올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축배의 잔치가 얼마나 오래갈 수 있었겠습니까?  사람이 미래를 본다고 큰소리는 칩니다만, 과연 그것이 말대로 얼마나 오래 영향을 끼치는 것인지는 사람이 더 잘 아는 일입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한 죽음은 지난 주일에 읽은 마르코 복음의 수난기와는 약간 다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에 꽤나 궁금해 하는 본시오 빌라도와 몇 차례 오고가는 대화를 나눕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생각 때문에 빌라도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옳은 길을 회피합니다.  그리고 그는 편치 않은 생활을 하게 됩니다.  우리도 같은 상황이라면 빌라도처럼 변명을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지내고 난 다음에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삶의 의미를 남기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이었다면 그 삶의 가치는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알아주시면 충분한 일입니다.  나는 과연 하느님의 뜻에 다가서려고 얼마나 노력하는 사람이이겠습니까?  내 모습을 살펴봐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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