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신유박해 순교자들: 최창주 마르셀리노와 정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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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48

신유박해 순교자들 (17) 최창주 마르셀리노와 정종호


6개월 이상 매달 2회 혹독한 심문과 형벌

 

 

우리나라 최초의 전국적이며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던 해인 신유년은 어두운 불안 속에 밝아 왔다. 이 역사의 한 의롭고 외로운 구비에 순교자들의 거룩한 피는 더욱 붉게 대지를 적시며 흘렀다. 1801년 4월 25일 여주의 다섯 순교자는 고향 땅을 자신의 증거의 피로 적시며 영원한 고향으로 올라갔다. 이들은 부활찬미가를 종일토록 불렀던 신앙의 동지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이중배 마르티노, 임희영, 원경도 요한은 이미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용기와 바른 신심을 갖고 순교의 길을 함께 간 조용삼 베드로도 보았다. 이제 여주의 다섯 순교자 가운데 최창주(崔昌周, 1748~1801년) 마르셀리노와 정종호(鄭宗浩, 1750-1801년)를 살펴보겠다.

 

최창주는 여주고을에 사는 양반으로 '여종'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온 가족과 함께 입교하여 성실하고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의 딸 중에 한 사람인 최소사 발바라는 아버지의 교훈과 모범을 따라 열성적으로 하느님을 믿으며 뒷날인 1840년 1월 4일 전라도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이를 미루어 보아도 최창주의 가정이 얼마나 성실한 신앙생활을 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최창주는 일찍이 1791년에 제사문제로 일어났던 신해박해 때 광주에서 체포되어 관아에 끌려갔었는데, 그만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석방된 적이 있었다. 최창주는 이때부터 하느님을 배반한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 순교로서 자신의 죄를 씻을 결심을 하면서 더욱 열심히 기도 생활을 하였다. 1800년에 이르러 다시 교우들이 체포되어 가는 것을 본 그의 아내는 위험을 피해 숨어있기를 권유했다. 그러자 그는 "염려하지 마시오. 내가 잡혀가고 없어도 당신은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오"라며 부인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어머니가 다시 몸을 피하도록 간절히 권유하자 최창주는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나 서울로 피신하기로 했다. 길을 떠나가던 그는 도중에 또다시 하느님을 배반할 수 없다는 생각에 집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 날 밤 여주관아에서 나온 포졸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관아로 압송되자 관장은 누구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으며 공범자는 누구냐고 심문했다. 최창주는 "천주교에서는 누구에게라도 해를 끼치는 것을 할 수 없도록 되어있습니다. 때문에 저는 그 누구의 이름도 말할 수가 없습니다"라며 단호히 대답했다. 관장은 그에게 형벌을 가하도록 명하고 옥에 가두었는데, 그 옥에는 이미 체포된 그의 사위 원경도와 이중배, 정종호, 임희영 등이 함께 있었다. 그는 이들 신앙의 동지들과 6개월 이상을 함께 지내며 여러 차례 혹독한 심문과 형벌을 받았으나 신앙심이 흔들리는 말은 한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던 10월경에는 경기감사 앞에서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감사는 매우 부드러운 말투로 배교한다는 한마디만 하면 즉시 자유의 몸이 되도록 풀어주겠다고 유혹했다. 이때 최창주는 동지들을 대신하여 "모든 사람의 임금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알고 섬기는 은총을 받았으니 우리는 그분을 배반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분을 위해 죽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며 굳은 신앙의 의지를 밝혔다. 경기감사는 더 이상 이들을 어찌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는 그들의 결안에 수결을 놓게 하고 형벌을 가하고는 하옥시켰다. 이들 신앙의 동지들은 그들에게 내려진 사형선고를 기쁘게 받아들이면서 자신들이 순교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굳건하게 나아가도록 서로 권면하고 함께 기도하는데 더 열성을 보였다.

 

이 옥고를 함께 한 다섯 순교자 중에 부활찬미가를 부르기 위해 모였던 집의 주인은 정종호였다. 그 역시 여주출신으로 신자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에 대한 기록이 빈약하여 세례명이나 어릴 적 행적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1800년 부활절에 그의 절친한 친구인 이중배, 원경도 등이 그의 집으로 와서 가족과 함께 부활축일을 보냈다는 기록을 보면 그가 얼마나 충실히 신앙생활을 하였는가를 엿볼 수 있다. 그들은 길가에서 큰소리로 기도하고 기쁨에 가득 찬 마음으로 부활찬미가를 소리 높여 불렀다. 이 기이한 신앙인의 잔치가 외교인에 의해 밀고되어 체포당한 후에 이들은 옥고를 함께 치르며 순교의 승리를 얻었다. 정종호는 심문과 형벌을 받는 시련을 겪으면서도 아름다운 옥중 생활을 신앙의 동지들과 함께 했다. 그는 이중배가 하느님의 은총 속에 많은 환자를 치료하여 낫게 하고 원경도의 상처도 치료하여 여러 차례 낫게 하는 모습을 보면서 원경도와 최창주의 늙은 종이 가족의 모습을 눈물겹게 호소하면서 마음이 흐트러지도록 유혹할 때 준엄한 태도로 늙은 종을 꾸짖어 그를 물리쳤고, 나약해진 조용삼에게는 다시금 바른 신심으로 용기를 갖도록 격려하여 함께 순교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고 말없이 효도하던 임희영을 영세 시켜 순교할 수 있도록 이끌었으며 마침내 한 포졸마저 신자가 되도록 영향을 주었다. 이렇게 하여 여주의 다섯 순교자들이 참수되던 날 휘강이 중 하나가 핑계를 대고 빠져 혼자서 이들 순교자의 참수형을 집행했던 휘강이는 양심의 가책이 너무도 심한 나머지 강물에 빠져 자살했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남기기도 했다.

 

[가톨릭신문, 2001년 7월 8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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