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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유박해 순교자들: 원경도 요한 - 옥중생활 모범에 포졸도 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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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47

신유박해 순교자들 (16) 원경도 요한


옥중생활 모범에 포졸도 입교

 

 

박해가 시작되면서 지방으로도 이어져 초기교회의 지도자들 대부분이 희생당하였다. 여주에서는 1800년에 이미 체포당한 천주교 신자들이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판결을 받아 결안이 확정된 뒤 다시 그들의 고향인 여주로 이송되어 참수되었다. 1801년 3월 13일(음) 여주 성문 밖에서는 이중배, 임희영, 정창주, 정종호, 원경도 등 다섯 순교자들이 참수되었다. 이들이 바로 부활찬미경을 함께 부르다가 같이 잡혀와서 옥고를 치르며 서로 격려해 온 신앙의 동지들이다. 이때 같이 옥고를 치렀던 조용삼은 모진 형벌에 끝내 옥사 순교하였다. 옥에서 만나 함께 심문을 받던 임희영을 영세 입교시킨 옥중생활은 참으로 신앙인 다운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래서 포졸 중에 한 사람도 이들의 옥중생활을 보고 신자가 되어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기도 했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이렇게 옥중생활을 통해서도 거룩한 복음을 전하며 포교하였던 것이다.

 

원경도(元景道 요한, 1773 ~1801)는 경기도 여주 출신으로 고향에서 외교인으로 살았다. 그는 김건순 요사팟의 인도로 이종사촌인 이중배와 함께 입교한 후부터는 남다른 열성으로 계명을 지키고 신자로서의 본분을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신앙생활에 충실한 그는 당시 여주지방의 열심한 교우들과 자주 연락하면서 교회의 일들을 돌보았고, 신자들과 함께 모여서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기 위한 신심행사를 가지기도 했다. 그래서 이종사촌 이중배와 함께 1800년 부활축일을 지내러 정종호의 집에 함께 갔던 것이다.

 

원경도 요한은 부활의 환희에 북받쳐 그렇게 큰소리로 찬미경을 함께 부르다가 체포당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잡혀가면서도 부활찬미가를 소리 높여 부른 신심행사의 기쁨을 가슴에 간직하면서 의연히 감옥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부활찬미가를 부르던 곳에서 관아로 압송되어 가는 길목에 원경도의 집이 있었다. 늙으신 어머니는 자식이 잡혀간다는 청천벽력같은 말을 듣고 버선발로 뛰어나가 아들이 잡혀가는 모습을 보았다. 어머니는 포졸들에게 다가가서 아들을 잠시라도 만날 수 있도록 청하였다. 눈물을 흘리며 어쩌면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는 아들을 잠깐만이라도 만나려는 청은 냉혹하게 거절당했다. 원경도는 그 애절한 어머니의 모습에 가슴이 메였다. 그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보시던 성모님의 고통과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함께 묵상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들 일행이 관아에 도착하자 관장은 그들에게 공범자와 천주교를 믿도록 유혹한 사람의 이름을 말하고, 하느님을 배반하라고 요구했다. 이때 원경도 요한은 그들 무리를 대표하여 말했다. "저희 천주교에서는 어떤 사람을 밀고하는 것을 금하고 있으므로 절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하느님을 배반하는 일은 더욱 할 수 없습니다"고 말하며 명백하게 밀고와 배교를 거절하였다. 관장은 형리들로 하여금 주리를 트는 등 모진 형벌을 가하도록 명령했다. 이 가혹한 고통 중에 일행의 대표격인 이중배 마르티노(가톨릭신문에 소개되었음)가 놀라운 용기와 격려로 동료들의 인내심을 자극하여 굳건히 이겨내게 하였다. 이 옥중에서 원경도는 그의 장인이 되는 최창주 마르첼리노가 체포되어 와서 서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6개월 이상이나 함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이들은 한 달에 두 번씩 관장 앞에 끌려가 심문과 형벌을 받아야만 했다. 이들은 이 극악한 상황에서도 따뜻한 그리스도적 사랑을 나누고 서로 격려하며 순교의 장하고도 힘든 길을 용감하게 나아가고 있었다. 이들의 옥중생활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크게 감동시켜 포졸 중에 한 사람도 이들을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기까지 하였다.

 

이때 원경도의 가족들은 그의 마음을 움직여 옥에서 풀려나게 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가족들은 자주 늙은 여종을 보내 집에 남아 있는 어머니와 부인의 실상을 몹시 슬프게 전하였다. 한 번은 여종이 와서 더욱 슬픈 모습으로 어머니와 부인의 이야기를 했는데, 원경도는 그날 따라 다른 때와는 달리 몹시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자 이중배 마르티노가 다가와서 이야기하고 있는 늙은 여종을 무서운 눈으로 쳐다보자 여종은 그 위엄에 질려 더 말하지 못하고 달아나고 말았다. 이들은 이렇게 옥고를 함께 치르면서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며 더욱 굳게 마음을 다지도록 했다.

 

순교자들은 이렇게 감옥 속에서 함께 기도하고 격려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치욕과 고통의 상징인 감옥생활을 공동기도를 바치는 기도소가 되게 하였고, 함께 교리공부를 하는 교리실이 되게 하였으며, 또한 순교의 길을 함께 하기까지 서로를 격려하는 공동영신수련소가 되게 했다. 순교자들은 그들이 사는 곳이면 그곳이 어떤 곳이든지 이처럼 거룩한 장소로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가 성지라고 부르는 순교사적지는 바로 그들이 숨어살던 심산유곡이요, 주님을 증거하며 옥고를 치르던 감옥이며, 장하게 목숨을 바친 사형집행장들이다.

 

마침내 원경도 요한은 동료들과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에서 결안을 받고 그의 고향인 여주로 이송되어 성밖에서 함께 참수순교하니 그때가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 그의 나이 28세였다.

 

[가톨릭신문, 2001년 7월 1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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