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신유박해 순교자들: 임희영 - 부친 유언 따르다 순교한 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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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46

신유박해 순교자 (15) 임희영


"내가 죽어도 제사 지내지 말라" 부친 유언 따르다 순교한 효자

 

 

1801년 4월 25일 여주(驪州)고을에서는 다섯 증거자들의 거룩한 죽음이 있었다. 28세의 원경도(元景道 요한), 53세의 최창주(崔昌周 마르첼리노), 50세 가량의 이중배(李中培 마르띠노)와 정종호(鄭宗浩), 그리고 나이도 세례명도 알 수 없는 임희영(任喜永)이 그들이다.

 

이제 이들 증거자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1800년 3월 위의 다섯 증거자 중 대표격인 이중배와 원경도가 정종호의 집에서 부활축일을 함께 보내다가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형벌을 받고 있을 무렵에, 같은 고을인 여주에 임희영이란 양반이 살고 있었다. 그의 부모와 형제자매들은 열심한 신자였으나 그만이 고집을 부리며 신앙생활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는 신앙생활이 자신에게는 너무나 부담스러운 일이라며, "천주교를 충실히 신봉하려면 눈도 귀도 또 다른 모든 관능도 가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의 아버지가 아무리 권고하고 타일러도 그는 결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죽게 되어 그를 불러 마지막으로 간곡히 말했다. "내가 죽기 전에 네가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을 보면 이 세상을 떠나도 아무런 한이 없겠다."

 

그러나 아들은 역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아버지는 다시 말하였다. "네 태도를 보니 내가 죽은 뒤에 조상들에게 드리는 관례적인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것 같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네가 내 말을 듣지 않았으니 이제 잘 들어라. 네가 나 죽은 뒤에 제사를 지내면 너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겠다. 그러니 네가 제사를 지내려거든 상복도 입지 말아라. 내가 내 자식으로 알지 않는데 상복을 입을 것 없다!"

 

이 말은 실로 그에게는 놀라운 충격이었다. 차라리 무서운 저주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임희영은 묵묵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죽음을 앞두고 자식에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 이렇게 분노에 찬 극단에 이르게 되고, 마침내 부자의 의를 끊겠다는 말을 했어도 다만 침묵하고 있는 임희영의 묵묵부답은 참으로 기이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틀 후 그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말이 없던 임희영은 분명한 애통의 표시를 하고, 상복을 입었다. 그러고는 아버지의 자식으로 아버지의 유언을 지켜 관례적인 제사는 하나도 드리지 않았다. 그의 모든 일가친척과 친지들은 그를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불만과 불평을 숨기지 않았다.

 

경신년(庚申, 1800년) 봄에 소상(小祥)이 돌아왔는데, 그는 아무런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이와 같은 행동이 알려지자 여주목사가 포졸을 보내어 그를 체포하고 문초를 했다. "나는 네가 천주교를 믿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네가 부모 제사를 올리지 않는다고 비난하니,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너를 죽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임희영은 그의 아버지 앞에서처럼 오직 침묵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도 옥으로 끌려가 이중배와 원경도 등 그의 동료들과 함께 옥고를 치르며 천주교 신자들과 같이 취급당했다. 1800년 10월에 증거자들은 감사 앞에 다시 불려 나갔다. 그 날 감사는 배교한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즉시 석방하여 자유의 몸이 되게 하겠다고 부드럽게 회유했다. 그러나 증거자들의 용감한 신앙고백이 있을 뿐 감사의 회유가 통하지 않았다. 감사는 그들 모두를 결안(結案)하여 서명을 시키고 모진 매를 때려 하옥시켰다.

 

세례도 받지 않았고 다만 침묵해 아직 외교인인 임희영은 다른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한 달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심문을 받았지만 줄곧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혹독한 형벌에도 비명 한마디 지르지 않았다. 감사가 "너는 천주교 신자도 아니면서 왜 제사를 드리지 않는가? 끝내 제사 드리기를 거절한다면 죽이겠다"고 위협했으나 임희영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10월의 심문이 있은 후 이제 죽음이 다가옴을 느끼면서 같이 있던 교우 한 사람이 임희영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하느님을 공경하지도 않으면서 그대가 당하는 형벌은 아무 소용이 없소. 오히려 굴복하고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더 나을 거요!" 하고 말하였다. 그때서야 임희영은 비로소 대답을 했다. "저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에 유언을 하시면서, '나를 위해 제사를 드리면 내 아들이 아니니 상복도 입지 말라'고 말씀하셨소. 그런데 이제 내가 상복을 입었으니 어떻게 내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제사를 드리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소. 나는 나를 죽이면 죽을 뿐이지 제사는 결코 드리지 않겠소!" 하고 결연히 말을 맺었다.

 

옥중의 교우들은 그의 굳은 결심과 효성을 보고 그를 권고하여 교리를 가르쳤다.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효성은 아버지와 함께 참신앙을 가짐으로써 더욱 완성되는 것임을 이해시킨 것이다. 임희영의 아버지께 드리는 효성은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효성으로 승화되어 마침내 신앙에로 이르게 했다. 그는 옥중에서 대세를 받고 그의 동료들과 함께 기쁨에 찬 순교의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그의 나이도 그리고 세례명도 전해지지 않은 순교자 임희영은 그 효성이 신앙으로 승화된 가장 한국적인 순교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1년 6월 24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교수)]

 

 

임희영 - 효성을 신앙으로 승화시킨 증거자

 

 

순조 원년(1801년), 천주교에 대한 최초의 전국적인 백해가 시작되었던 그해가 어두운 불안 속에 밝아왔다. 정조가 24년에 승하하자 순조는 열한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잇게 되었다. 궁중의 어른이라 하나, 친정 오빠 김구주의 귀양과 죽음으로 가슴에 한을 품고 있던 여인, 영조의 계비 정순황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맡게 도니 정치적 미래가 예측할 수 없는 불안에 싸여있었다. 김 계비는 정치적 보복을 국가 기강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은밀히 위장하고, 선왕 정조의 정례예절인 인산례가 끝나기 무섭게 천주교 박해령을 내렸다. 역사의 이 어둡고 외로운 한 굽이에 한국 초대교회 순교자들의 거룩한 순교의 붉은 피가 민족의 구원사를 적시며 흘러내렸다.

 

1801년 4월 25일 경기도 여주에서는 다섯 증거자들의 거룩한 죽음이 있었다. 28세의 원경도 요한, 53세의 최창주 마르첼리노, 50세의 정도의 이중배 마르티노와 정종호, 그리고 나이도 세례명도 알 수 없는 임희영이 그들이다. 그들 가운데 임희영을 제외한 나머지 네 사람은 신앙의 동지이며 벗들이었다.

 

1800년 3월에 이들 가운데 대표격인 이중배는 원경도와 함께 부활절의 기쁨을 같이 나누려고 정종호의 집으로 갔다. 그들은 술을 거르고 고기를 삶아 산기슭 오솔길 옆에 자리잡고 최창주와 함께 불활 찬미경을 소리 높이 읊었다. 이렇게 영적 기쁨에 넘쳐 종일토록 술을 마시고 고기를 나누며 부활 찬미경을 거듭 노래했는데, 이 일이 관가에 알려져 옥중 생활을 하게 되었다. 임희영은 이때 신자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신자도 아니면서 천주교인들과 한 옥에 갇혀 그들과 같은 취급을 당하여 옥고를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임희영은 심문을 받을 때나 옥중에서도 말이 없었다. 그의 침묵은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여서 그가 옥고를 치르는 까닭도, 신상에 관한 내력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1800년 10월에 들은 감사 앞에 다시 불려나가 심문을 받았다. 그날 감사는 배교한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곧 풀어주어 자유의 몸이 되게 하겠다고 부드럽게 회유했다. 그러나 증거자들은 용감한 신앙고백이 있을 뿐 회유가 통하지 않았다. 감사는 그들 모두에 대해 결안하여 서명을 시키고 모진 매를 때려 하옥시켰다. 그런데 임희영은 세례도 받지 않았고 천주교를 신봉하지도 않으면서, 오로지 침묵한 채 한 달에 두 번씩 천주교 신들과 함께 심문을 받았고 그때마다 침묵했다.

 

혹독한 매질에도 비명 한마디 지르지 않았던 임희영에세 감사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나는 네가 돌아가신 부모에게 제사를 올리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비난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너를 죽일 수밖에 없다. 너는 천주교 신자도 아니면서 왜 제사를 드리지 않는가? 끝내 제사를 드리기를  거절하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그래도 임희영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심문과 형벌을 받고 이제 죽음이 다가옴을 느끼면서 그 동안 옥고를 함께 치른 이중배가 조심스럽게 임희영 곁에 다가와 말했다. "그대가 천주님을 공경하지도 않으면서 다만 부모의 제사를 거절하여 당하는 형벌이 무슨 뜻이 있겠고. 오히려 굴복하고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더 나을 거요." 그러자 임희영은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이제 더는 살 가망이 없는 처지에서 오랜 침묵을 깨고 처음으로 말문을 열어 그 까닭을 말했다.

 

그는 양반이며 풍천 임씨 가문으로 여주에서 살았다고 했다. 그때 그의 부모의 형제자매들이 모두 열심한 천주교 신자였는데, 그만이 고집을 부리며 신앙생활을 거부하였다. 그는 신앙생활이 너무나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말하며 "천주교를 충실히 신봉하려면, 눈도 귀도 또 다른 모든 관능도 가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가 아무리 권고하고 타일러도 그는 결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죽게 되어 그를 불러 마지막으로 간곡히 말했다. "내가 죽기 전에 네가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을 보면 이 세상을 떠나면서 아무 한이 없겠다." 이들은 역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아버지는 다시 말하였다. "나는 이제 오늘내일 사이에 죽을 것이다. 그런데 네 태도를 보니 내가 죽은 뒤에 조상들에게 드리는 관례적인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것 같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네가 내말을 듣지 않았으니 이제 잘 들어라. 네가 나 죽은 뒤에 제사를 지내면 너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겠다. 그러니 제사를 지내려거든 상복도 입지 말아라. 내가 너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는데 상복을 입을 것 없다."

 

이 말은 그에게는 놀라운 충격이었다. 무서운 저주처럼 느껴졌다. 그런데도 임희영은 묵묵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죽음을 앞두고 자식에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 이렇게 분노에 찬 극단에 이르게 되고, 마침내 부자의 의를 끊겠다는 말을 했어도 다만 침묵하고 있었다. 실천하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는 그의 침묵이 그의 진실됨을 웅변하는 것일까. 그의 침묵은 그렇게 신비스러운 고집이었다.

 

이틀 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말이 없던 임희영은 분명한 애통의 표시를 하고 상복을 입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유언을 지켜 관례적인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 상례를 따르는 관례적 허식과 제사를 일체 드리지 않자. 그의 일가 친척들은 놀라 눈으로 그르 쳐다보며 불만과 불평을 숨기지 않았다. 경신년 봄에 소상이 돌아왔는데 그는 아무런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와 같은 그의 행동이 알려지자 여주 목사는 포졸을 보내어 그를 체포하고 문초했다. "네가 천주교 신자가 아닌데 어찌하여 제사를 드리지 않느냐?" 임희영은 그의 아버지 앞에서처럼 침묵했다. 목사는 거듭 다그쳤다. "네 만일 끝내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너를 죽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도 임희영은 오직 침묵할 뿐이었고 옥으로 끌려가 마치 천주교 신자처럼 취급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저희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 유언을 하시면서 '나를 위해 제사를 드리면 내 아들이 아니니 상복도 입지 말라'고 말씀하셨소. 그런데 이제 내가 상복을 입었으니 어떻게 내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제사를 드리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소. 나를 죽이면 죽을 뿐이지 제사는 결코 드리지 않겠소" 하고 결연히 말을 맺었다. 그의 침묵은 태산같았고, 행동은 도도히 밀려오는 파도 같았다. 무서운 침묵 그 뒤에 뜨거운 효성이 활화산처럼 타고 있었던 것이다.

 

옥중의 교우들은 그의 굳은 결심과 효성에 감탄하였다. 그리고 아버지께 향한 그 놀라운 효성은 아버지와 함께 참신앙을 가짐으로써 완성되는 것임을 깊이 이해하도록 그를 권고하여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버지께 드리던 임희영의 효성은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효성으로 승화되어 마침내 신앙에 이르게 되었다. 깊은 상처로 죽음만을 기다리며 지쳐있던 옥중은 뜨거운 교리교실이 되었고 지극한 영신 수련장으로 변했다. 임희영은 옥중에서 대세를 받고 그의 동료들과 함께 신앙의 형제로 여주의 다섯 순교자 속에 들었으며, 효성이 신앙으로 승화된 가장 한국적인 순교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1801년 4월 25일, 여주의 다섯 순교자들의 목을 친 회자수는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해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옥을 지켰던 포졸은 뒷날 옥쇄장직을 버리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고 전한다. [경향잡지, 1999년 4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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