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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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유박해 순교자들: 이중배 마르티노 - 옥중 간절한 기도로 동료 격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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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43

신유박해 순교자들 (13) 이중배 마르티노


부활절 맞아 길에서 "알렐루야", 옥중 간절한 기도로 동료 격려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평화의 절실함을 깨닫듯이 슬픔과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기쁨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참 기쁨은 모든 고통과 슬픔을 압도한다. 여기 죽음을 이긴 부활의 참 기쁨에 겨워 종일토록 부활 찬미경을 노래한 순교자가 있다. 그는 조선 후기 서학은 남인학자들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참 진리이기에 당파를 초월해서 할 수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소론(小論)에 속한 학자로서 영세 입교하여 순교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 분이 바로 이중배(李中培) 마르티노이다.

 

그는 소론(小論)에 속하는 전주 이씨 집안의 자손으로 경기도 여주 고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성격이 곧고 굳기는 했지만 난폭하고 화를 잘 내었다. 그는 또 비상한 힘과 용기를 가졌는데, 의술(醫術)을 조금 지니고 있으면서 분에 넘치는 야심을 가진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가 여행할 때는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도 낮에는 쉬고 밤에만 걷는 기벽(奇癖)이 있었고, 그 외에 자주 아무 거리낌없이 난폭하고 불의한 행동으로 이웃에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이러한 이중배가 1797년 그의 친구 김건순(金建淳) 요사파의 권고로 이종사촌인 원경도(元景道)와 함께 입교하게 되었다. 그는 세례성사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된 후부터 새사람이 되었다. 그는 자기 성격을 억누르고 다만 정직하고 굳셈만을 보존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독실한 신앙생활로 가족들을 모두 입교시키고 넘치는 열성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그가 입교시킨 아버지와 아내와 함께 아무에게도 숨김없이 신앙의 본분을 지켜 나갔다.

 

경신년(1800년) 3월에 지극한 절제로 사순시기를 보낸 이중배는 부활절을 맞아 넘치는 희열에 찬 모습으로 친구이며 착실한 신자인 정종호(鄭宗浩)의 집으로 부활축일을 지내러 갔다. 정종호의 집에서 또 다른 신앙의 동지들을 청하였고, 모인 사람들은 고기를 삶고 술을 장만하여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이들은 길가에 둘러앉아 모두 큰소리로 '알렐루야'와 부활삼종경을 외고 나서,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고 흥에 겨워 바가지를 두드리며 희락경과 기도문을 거듭 노래하였다. 그들은 종일토록 부활찬미가를 소리 높이 부르고 장만해 간 음식을 나누었다. 이들의 우정에 넘치는 그리고 신심 깊은 부활잔치는 하루해가 저물도록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 광경을 전해들은 관아에서 포졸들을 보냈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가 부활잔치 중에 체포되어 옥으로 끌려갔다. 관아에서 관장은 이들을 엄중히 문초하고 주리를 틀며 매질했다. 그러나 그들은 포악한 형벌 중에서도 부활축제의 기쁨을 잃지 않았다. 참 기쁨은 어떤 역경도 압도한다. 그 죽음도 이긴 부활의 기쁨 앞에 어떤 고통이 장애가 되리오! 특히 이중배는 옥중에서 활기찬 열정과 간절한 기도로 동료들을 격려하며 옥중 생활을 거룩하게 살았다. 그는 옥중에서 효성 지극한 임희영을 입교시키고, 조용삼을 허약한 몸으로도 위대한 영적 승리를 얻는 순교의 길에 동참하게 했으며, 동료들의 마음을 약하게 할 어떤 계기도 준엄한 자세로 막아냈다.

 

마침내 이중배 자신도 가장 견디기 어려운 시험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가 초라한 모습으로 옥에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손을 잡고 말했다. "너는 백발이 성성한 네 아비를 버리고 죽고자 하느냐?" 어떤 형벌도 의연히 이겨낸 이중배는 아버지에 대한 효성으로 찢어지는 듯한 마음을 어찌할 수는 없었지만 "아버님, 저는 효성의 본분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아마 저의 처신이 별로 용감해 보이지는 않을 것 입니다마는 아버님도 저와 마찬가지로 교우이시니 우리는 사물을 더 높은 시야에서 보아야 합니다. 인정에 끌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배반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아버님 깊이 판단하십시오"하고 간절히 아뢰었다.

 

하느님은 이 영웅적인 신앙에 대해 병을 고치는 치유의 은혜로 상을 주시기라도 한 듯 이중배는 이후 옥중에서 그의 의술을 발휘했다. 평소 그가 의술을 지니고 있기는 했지만 옥중에서 그의 치유능력은 이내 퍼져나가 일약 유명해졌다. 당시 옥중의 동료들은 열이면 열이 그의 치료를 받고 다 나았다고 했다. 옥중의 원경도의 상처도 여러번 치유했으며 포졸들도 그들의 병든 가족을 데려와 치료를 받고 갔다.

 

어느 날 포졸들이 몰려와 그 선풍적 인기를 일으키게 한 의학서적을 보자고 청한 적이 있었다. 이중배는 "나는 독특한 처방이 없소. 다만 천주를 섬기기만 할 뿐이요. 당신들이 의술을 배우고 싶다면 우선 나처럼 천주를 믿어야 하오"하고 대답했다. 포졸들이 "당신이 책을 모두 불살라 버렸다고 주장하니 우리가 어떻게 배울 수 있겠소?"하자 이중배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마음속에 타지 않는 책들이 있으니 당신들을 가르쳐서 천주교를 신봉하는데 충분하고도 남소."

 

그는 옥중에서 수많은 병자를 치료해 주어 낫게 하고, 포졸을 감복시켜 입교하게 하여 열심한 교우가 되게 했다. 이중배와 동료들은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의금부의 결안이 확정되자 여주로 내려와 1801년 4월 25일 여주읍 내 성밖에서 참수 순교하였다.

 

[가톨릭신문, 2001년 6월 10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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