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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우리 교회사에서 순교자는 몇 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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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41

우리 교회사에서 순교자는 몇 분인가?

 

 

한국교회사는 대략 200여 년의 역사과정을 밟아왔다. 이 가운데 앞부분 100여 년간은 박해시대의 역사로 서술되고 있으며, 천주교 신앙에 대한 순교와 박해의 연속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박해 시기동안 우리 교회사에서는 '무수한' 순교자가 등장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박해시대에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순교자의 숫자는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 나라에는 많은 교회사적지와 순교성지가 있다. 널리 알려진 어느 순교성지 안내판에는 그곳에서 순교한 사람들이 대략 5000명 내외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또한 어느 순교지를 묘사한 그림을 보면 낙화암처럼 생긴 절벽에서 '무수한' 신자들을 떨어뜨려 죽이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현대 교회에서 간행한 여러 가지 기록이나 저명한 성직자들의 강론원고 등에서는 박해시대 한국교회에서는 적어도 1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 죽었다고 한다. 한국교회사 연구자들 대부분도 이러한 견해를 막연하게나마 인정해 왔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교회의 순교자가 얼마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진지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순교의 개념

 

여기에서 순교자의 숫자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우선 순교의 개념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원래 '순교하다(martyrein)'라는 그리스어의 말 뿌리는 '증거하다', '증언하다', '증인이 되다.'라는 의미였다. 이 단어가 교부시대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고 증언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이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죽음이나 고통을 당하는 행위를 나타내는 말로 쓰였다.

 

여기에서 우리 교회의 전통은 순교의 개념을 다양하게 써왔다. 가장 대표적인 순교는 목숨을 바쳐서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행위를 말했다. 흔히 이를 '붉은 순교'라는 말로 표현해 왔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려고 고통을 감수한 사람들은 '푸른(녹색)순교'라는 단어로 묘사되었다. 중세기 아일랜드 지역의 수도자들은 자신의 삶이 복음 삼덕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증거하는 행위임을 자각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정결한 수도생활을 '흰(백색)순교'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현대 교회에서 순교자를 규정할 때에는 넓은 의미의 개념이 아니라 좁은 의미의 개념으로 이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 좁은 의미의 개념에 속하는 순교가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곧 순교는 실제로 죽음을 당해야 하고, 그 죽음이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진리를 증오하는 자에 의해서 초래되어야 하고, 그 죽음을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진리를 옹호하려고 자발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추정된 순교자

 

박해시대 순교자에 관한 문제를 논할 때에는 당연히 좁은 의미로 순교를 파악하고 이를 밝혀나가야 한다. 그러나 이 순교자의 숫자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박해의 과정에서 신앙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 관한 기록은 부분적으로밖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교회 당국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천주교 순교자의 숫자에 대한 추정작업을 진행시켰다. 곧, 정교, 황현, 박은식을 비롯한 구한말의 인물들은 순교자의 숫자를 2만여 명에서 12만여 명까지로 저마다 다르게 추정하여 언급한 바 있다.

 

한편, 1874년에 간행된 달레(Dallet)의 "조선천주교회사"에서는 "1868년 9월에 벌써 박해에 희생된 사람이 2천 명이 넘었는데 … 1870년 조선에서 공공연히 떠도는 풍문에 따르면 산에서 굶주림과 곤궁으로 죽은 모든 사람을 빼고도 희생된 사람의 수가 8천 명에 이르렀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1900년 당시, 조선교구 교구장이었던 뮈텔(Mutel) 주교는 박해로 인한 피해자의 숫자를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에 보고하며 말하기를 "1866년 3월, 조선에 천주교 박해가 엄습했을 때 약 2만5천 명의 신도가 있었습니다. … 박해의 희생자는 1만여 명으로 추산할 수 있겠습니다."고 했다.

 

그런데 한국 천주교회는 창설 직후부터 정부의 탄압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리고 병인박해 이전 여러 차례에 걸쳐 단행된 박해 과정에서 수백여 명의 신도들이 순교했다. 병인박해 때 순교한 사람들과 그 이전의 박해에서 순교한 분들이 모두 합하면 박해시대 우리 나라 순교자의 숫자가 나올 것이다.

 

 

순교자의 숫자

 

한편, 병인박해 당시의 신도수가 최대 2만5천여 명이었음을 감안하면, 이상의 숫자 가운데 박은식 등의 기록은 분명 과장된 것임에 틀림없다. 병인박해가 절정기를 지나갔던 1868년 9월 교회측에서는 순교자의 숫자를 2천여 명으로 추정한 바 있다. 그러나 달레는 1870년대 항간에 떠도는 소문으로 신자 8천 명이 순교했다는 이야기를 전한 바 있다. 그리고 뮈텔 주교의 단계에 이르러서는 이 추정 치가 다시 1만 명으로 확대되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교회측의 추정 치에 대해서도 재검토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작성해 본 순교자 명단에는, 대략 1860여 명의 순교자들이 확인되고 있다. 물론 이 숫자는 정부의 공식 기록과 교회에서 작성한 각종 자료를 통해서 그 이름을 비롯한 인적 사항을 밝힐 수 있는 순교자들만을 말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무명 순교자들이 포함되어 있지 아니하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전통에서는 초창기부터 순교에 대한 신심이 깊었고 순교자에 대한 기억을 소중히 간직해 왔다. 이 기억들이 정리되어 문헌자료로 남게 되었다. 한편, 조선 후기의 형정에서는 사형수에 대해 비교적 철저히 관리해 왔다. 1870년대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서도 순교자가 8천 명은 되리라고 했는데, 그러나 1868년(무진년) 박해 이후 대규모의 살육이 없었던 점을 감안할 때 이도 또한 과장된 풍문이었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할 때 순교자의 숫자가 1만여 명에 이르도록 확대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추정에 의한 숫자를 내세우기보다는 확인된 순교자의 숫자가 대략 2천 명 내외라고 말함이 더 진실에 가깝다.

 

우리는 순교자의 숫자가 많음을 기꺼워하기보다는 그 순교가 갖는 구원사적 의미를 더 소중히 해야 한다. 단 한 분의 순교자만 있다 하더라도 그 죽음이 우리를 그리스도교적 구원으로 이끌어줄 때 순교의 진정한 의미가 찾아진다. 순교의 의미를 되새김하기 전에 순교자의 숫자만을 강조하는 태도는 신앙의 질은 도외시하고 양만을 소중히 여기는 부박한 풍조일 수도 있다. 이 점을 경계하면서 우리는 순교자의 숫자만을 헤아리는 데 자족하지 말아야 한다.

 

[경향잡지, 2001년 1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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