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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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윤유일 바오로: 한국교회의 신실한 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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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37

윤유일 바오로 - 한국 초대교회의 신실한 밀사

 

 

압록강을 건너 책문까지는 오랑캐의 땅으로, 인가도 없고 추위도 막심했다. 1793년 윤유일이 조선교회의 밀사로 압록강을 건너 북경을 다니던 그 무렵, 동지사로 중국을 다녀온 적이 있는 홍대용의 "을병연행록"에는, 압록강을 건너 구연성에서 추운 겨울밤 들녘에서 노숙하는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우리가 걸어감에 날이 어두운지라 의주 창군 십여 명이 횃불로 앞을 인도하더라. 십여 리를 행함에 곳곳에서 수풀 사이에 불을 피우고 사람이 모여있으니, 이는 짐 실은 사마꾼이 두루 흩어져 머문다 하더라. … 역관들은 한 곳에 겹장막을 치고 하졸들은 곳곳에 모여 앉아 사면에 장막을 길같이 싸고 불을 질러 불을 쬐고 밤을 새우니, 만일 큰 풍설을 만나면 얼어죽는 이 많을러라. … 밤에 호환이 무서워 자주 천하성을 불러 여러 사람이 일시에 함성으로 서로 응하니 이로 인하여 종시 잠을 깊이 들지 못할러라."

 

윤유일 바오로(1760-1795년)는 한국 초대교회의 밀사로 그 신분을 숨기고 이 험난한 북경 길을 두 차례나 왕복하였으며, 압록강 국경까지 나가 주문모 신부를 은밀히 서울로 모셔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모셔온 사제의 행방을 끝까지 숨기려고 모진 형벌 아래 순교한 증거자이다.

 

그는 1760년, 경기도 여주 고을의 양반 집에서 태어나 유학에 힘쓰던 선비였다. 그는 여주에서 가까운 양근 땅 본향을 자주 드나들면서, 이웃의 존경을 받던 권일신과 교분을 맺었다. 그리하여 초기 한국교회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권일신 프란치스코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있었다. 이때 한국교회는 어렵고 힘든 처지에 놓여있었다. 1784년에 시작한 명례방 김범우 집에서의 정기집회가 발각되어 집주인 김범우는 형조에서 매를 맞고 유배되었으며, 집회를 이끌던 광암 이벽은 아버지가 집안에 감금하였다.

 

그 뒤 권일신은 이승훈과 함께 교회 재건운동을 벌였는데 그때 이들은 신부 역할을 하며 성사를 집행하였다. 이는 물론 교계제도와 성사에 대한 교리를 잘 모른 채 오직 교회 재건의 열의에서 행한 일이었다.

 

이들은 매우 진지하고 정성스럽게 성사를 집행하고 있었는데 교리공부를 하면서 차츰 성품성사와 사제의 독신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회의를 가지게 되었고, 마침내 이를 북경 주교에게 문의해 보고자 했다.

 

북경 주교에게 문의하는 편지는 이승훈과 권일신이 썼다. 그러나 그것을 확실하게 전달할 방법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해마다 북경에 파견되는 부연사행의 일행 속에 신분을 감추고 숨어들어 중국교회와 은밀히 연락을 취해야 하는, 어렵고 위험한 사명을 맡을 유능하고도 헌신적인 인물을 찾아내야 했다.

 

이 중요한 사명의 적격자로 초대교회는 윤유일을 주목했다. 윤유일은 아직 예비신자였지만 성격이 온순하고 비밀을 잘 지킬 뿐만 아니라 매우 침착하면서도 대담하여 이 막중한 사명을 맡을 적격자였다. 그는 또한 처음부터 이 일을 알고 스스로 적극적인 자세로 나섰다.

 

윤유일은 유관검과 이가환의 재정적 도움을 얻어 중국으로 가는 사신 일행의 수행 상인 자리 하나를 사들여 1789년 10월에 북경을 향해 떠났다. 서울에서 북경까지는 삼천리 길이었다. 한겨울에 외국 땅으로 가는 이 긴 여행은 위험과 고통이 따랐다. 실제로 사신 일행 가운데 여러 사람이 도중에 병들거나 얼어서 죽어갔다.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공부에만 전념했고 여행 경험이 한 번도 없었던 윤유일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외롭고 힘든 고난을 홀로 이겨내야 했다.

 

수많은 위기를 넘기고 마침내 북경에 이른 윤유일은 이승훈, 권일신의 명의로 된 조선교회의 밀서를 프랑스 선교사인 로오 신부에게 전했다. 이때의 놀라운 감격을 구베아 주교는 그의 서한에 이렇게 적고 있다.

 

"윤 바오로의 도착은 생각지 못했던 일로, 북경의 교회는 온통 환희에 젖었습니다. 아직 선교사도 찾아가지 않은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도 가르쳐준 일이 없는 나라에서 온 놀라운 복음 전파의 소식을 듣고 교회는 기쁨의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는 새롭게 생겨난 이 교회에서 온 편지를 읽고, 또 이 신자에게서 사정을 듣고 한 통의 답신서를 썼습니다. 새로 태어난 교우들이 전능하시고 무한히 선하신 주님의 영생의 은혜를 받고, 신앙에 대한 그들의 사명에도 무한한 은총을 입어 믿음을 위하여 온갖 것을 인내하도록 권고하고, 그들에게 주어진 복음을 지속시키기 위하여 특별한 수단을 강구해 줄 것을 전구해 주었습니다."

 

윤유일이 이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며 밀사의 막중한 임무를 성공함으로써 조선교회는 비로소 외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윤유일이 다녀간 직후인 1790년 10월 6일 로마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장관 안토넬리 추기경에게 조선교회에 대해 상세히 보고하였다. 이 조선교회 소식을 듣고 교황과 유럽 교회가 감격한 것은 물론이다.

 

윤유일은 구베아 주교에게서 신부 파견 약속과 주교의 교서를 받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예비신자였던 그는 자청하여 세례성사와 견진성사까지 받은 뒤 귀국하였다. 구베아 주교는 윤유일이 "중국인들과 유럽인 참석자들 모두가 눈물을 가눌 수 없을 만큼, 그토록 깊은 신심과 열성으로 성사를 받았다."고 했다. 그의 영세 대부인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판지 수사는 윤유일의 초상화를 그려 생 라자르에 보내고, 이탈리아 본국 신부들에게 그 소식을 편지로 전했다.

 

윤유일의 성공적인 사명 수행은 깊은 신뢰를 받아, 1790년 9월 제사문제를 가지고 밀사로서의 두번째 임무를 맡아 사명을 완수해 냈다. 그는 이렇게 한국교회 사제영입운동에 직접 헌신하여 마침내 한국 최초의 사목사제인 주문모 신부를 성공적으로 영접하였다. 신부의 입국 소식을 듣고 직접 압록강 국경에 나가 입국시기를 조정하고, 결빙기를 이용해 강을 건너 서울까지 직접 안내해 왔다.

 

그러나 사제 영입의 기쁨은 진사 한영익의 밀고로 싸늘하게 식고, 윤유일은 최인길, 지황과 함께 체포당했다. 그는 그가 모셔온 사제를 위해 죽기로 각오하고 모진 형벌을 침묵으로 견디었다. 당시 그를 심문했던 포청 관리들은 "죽음을 기뻐하고 곤장 맛보기를 마치 엿 맛보듯 하며, 입을 꼭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이렇게 1795년 6월 28일 장하치명으로 순교하니 그의 나이 36세였다.

 

구베아 주교는 이렇게 증언했다. "내 자신과 북경의 이 교회가 윤 바오로의 신심과 정성에 대한 증인들입니다."

 

[경향잡지, 2000년 10월호, 김길수 요한(전 대구 가톨릭 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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