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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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최필제 베드로: 정한 날짜에 돌아온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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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36

최필제 베드로 - 정한 날짜에 돌아온 순교자

 

 

1801년 5월 14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여섯 명 가운데 하나인 최필제 베드로는, 일찍이 길거리에서 열정에 복받쳐 "주님을 믿어야 한다."고 외친 가두선교의 효시라 할 순교자 최필공 토마스의 사촌동생이다.

 

서울의 중인계층 출신인 그는 자가 자순(子順)이었는데,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약장사로 생업을 삼아 늙으신 부모를 봉양하며 살았다. 효자였던 그는 성실하게 약제를 다루어 약값이 싸고 질이 좋다며 모두 그를 신임하였다. 그리고 타고난 성품이 참되고 온후하였는데 그 진실하고 충직하며 중후한 성품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서 바라보기만 하여도 그가 어진 사람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사촌형이며 순교자인 최필공도 최필제를 언제나 존중하고 두려워했다. 그래서 나이가 어린 아우뻘이지만 모든 일을 그와 의논하여 행하고 한 가지도 마음대로 처리하지 않았다. 또 최필공에게는 항상 천주교를 못마땅해하는 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늘 천주교를 헐뜯고 배척하며 천주교 신자들을 모조리 돌아가며 욕했다. 그러나 그도 그의 사촌인 최필제에 대해서만은 감히 흠잡아 말하지 못했다. 오히려 최필제의 자를 부르며 천주교에서 취할 만한 사람은 오직 자순(子順) 한 사람뿐이라고 칭찬했다.

 

최필제는 한국교회 창립 직후인 1790년경 내포의 사도라 불리던 이존창의 전교로 입교하였다. 그는 이 무렵 입교한 사촌형 최필공과 함께 활약했는데 그 이듬해 제사문제로 일어난 신해박해로 1791년 종형과 함께 체포당하였다. 입교한 지 겨우 1년, 아직 그의 심중에 깊이 박히지 못한 신심으로 혼란에 빠진 그는 배교하고 옥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한동안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냉담 상태에 빠졌다.

 

그러다 진산사건 이후 교우들이 비참한 상태에서 굳건한 신앙생활을 하며 눈물겹게 벌이고 있는 사제 영입운동을 보면서 차츰 자신의 불성실을 뉘우치기 시작했다. 그는 1793년경 다시 교회의 품으로 돌아와 신앙 동지들의 외롭고 힘겨운 활동에 동참했고 이윽고 주문모 신부가 입국해 사목활동을 펼 때 더할 수 없이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 그의 늙은 아버지는 이미 한 번 옥고를 치르고 난 아들이 천주교에 대해 다시 열중하는 모습을 보고 몹시 걱정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을 천주교로부터 떼어내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최필제는 아버지의 만류가 있을 때마다 지극히 겸손하고 온유한 태도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함께 신앙생활을 할 것을 청했다. 아버지와 온 집안의 만류가 심했지만 그는 한 번 배교한 것을 무섭게 뉘우치며 부모에 대한 효도와 천주공경의 갈등을 이겨냈다. 그는 간절한 효도와 온순한 태도로 천주공경의 올바름을 아버지께 아뢰면서 신앙의 의지를 힘있게 느끼게 하였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그에게 가족의 탄압이 오히려 굳고 심원한 신심을 공고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에 더 힘들고 괴로운 가족의 박해 속에서 오히려 그들에 대한 참사랑의 계율을 아름답게 실천해 갔다. 축첩의 폐습과 남존여비의 일상화된 관습을 버리고 아내를 정중하고 사려 깊게 한 인격체로 대하며 사랑하였다.

 

이러한 그의 삶을 주문모 신부가 보고 탄복하였다. 신부는 그를 칭찬하여 "부부가 정절을 지키며 훌륭하게 끝을 맺는 이가 아주 드문데, 이 부부는 지조가 갈수록 굳어지고 고통을 이겨 주님께 공을 세우는 일에 부지런하니 참으로 어진 사람이다."고 하였다.

 

조정의 천주교 탄압세력이 기회를 노리다가, 1800년 정조 임금이 승하하고 어린 순조의 뒤에서 대왕대비 김씨가 섭정을 시작하자, 파당의 적대세력을 탄압하려는 명분으로 국가기강을 바로잡는다면서 천주교 박해령을 내렸다.

 

며칠 뒤 주님 봉헌 대축일을 맞이하여 이른 새벽에 최필제는 한 길가에 있는 약방의 안쪽 방에서 겨우 몇 사람과 함께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포졸들이 교우들이 기도하며 가슴을 치는 소리를 듣고 투전치는 소리로 잘못 알았다. 포졸들은 마침 무뢰배들이 돈내기하는 투전을 단속하던 참이라 창문을 열고 교우들 방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곳에 투전이 보이지 않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몸을 수색하여 첨례단(축일표) 한 장을 찾아냈지만 포졸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포졸들은 그것을 글을 아는 다른 관리에게 가지고 갔다. 그리고 그것이 천주교에 관련되는 것임을 알아내고는 교우들을 잡으려고 다시 돌아왔다. 이때 이미 날이 환하게 밝은 뒤여서 다른 교우들은 다 그 자리를 떠나 흩어졌고 다만 최필제 베드로와 오현달이란 교우만 남아있었다. 두 사람은 잡혀서 관아로 끌려가 옥에 갇혔다.

 

최필제는 관아에 압송된 뒤 배교를 강요당하고 형벌을 받았지만 자신이 천주교 신자인 것만을 분명히 밝히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침묵 속에서 순교의 결의를 다졌다. 이미 한차례 배교한 적이 있는 그는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배교의 강요나 회유, 그리고 동료 신자들을 밀고하라는 어떤 요구에도 다만 침묵하고 있었다.

 

1801년 2월 대왕대비 김씨는 교를 내리어 천주교를 다스리기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어도 황사영을 잡지 못하였음을 꾸짖고, 열흘 안으로 그를 잡지 못하면 포청의 관헌을 처벌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리고 과연 3월 11일 황사영을 잡지 못한 탓으로 경기도 장단부사 구종을 처벌하였다.

 

최필제는 냉담을 청산하면서 주문모 신부가 만든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에 가입하고 교리를 연구하며 정약종, 황사영 등과 함께 열심히 활동하였으나 그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형제가 화를 당할 일을 할 수 없다 하여 끝내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그는 옥중에서 그의 종형이며 신앙의 동지인 최필공 토마스를 만나 옥고를 함께 치르며 서로 격려하였다. 그러던 중 그해 4월 8일 최필공이 먼저 정약종 등과 함께 순교하자 순교에 대한 그의 열망은 더욱 굳어졌다.

 

이때 그의 부친은 사랑하는 아들이 옥고를 치르게 되자 너무 상심하여 병석에 누웠다가 세상을 떠났다. 옥중에서 아버지의 부음을 들은 최필제는 지극한 효성으로 애통해 하며 관원에게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일시 귀가를 청했다. 조선의 형법에서는 이를 허가하게 되어있어 일시 귀가하여 상주로서 의무를 행하게 되었다.

 

허락을 해준 관리는 그의 인품에 감복하여 이번 기회에 상례를 마치고 멀리 도망쳐 생명을 구하라고 넌지시 일러주었다. 그러나 최필제는 정한 날짜에 돌아왔다. 그는 아버지가 대세를 받고 돌아가셨음을 기뻐하며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귀에게 원수를 갚고 전에 배교했던 것을 기워 갚기를 원하네. 내 가장 큰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하여 내 머리를 바치는 일이네."

 

그는 그의 소원대로 서소문 밖에서 순교의 피를 흘리며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였다.

 

[경향잡지, 2000년 9월호, 김길수 요한(전 대구 가톨릭 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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