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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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김귀동: 신자로 교우들과 함께 죽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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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35

김귀동 - 신자로 교우들과 함께 죽겠소

 

 

'황사영 백서 사건'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도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한국 근대사의 역사적 사건이다. 불행히도 너무나 유명하고 그 결과가 매우 유감스러웠던 이 사건은 관련된 인물들이 차례로 처형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백서를 쓴 장본인인 황사영은 천륜과 인륜을 어긴 죄인으로 판결되어 참수와 육시를 당하였다. 백서에 서명된 명의자인 황심 또한 결안대로 참수되고 육시를 당하였다. 그리고 그의 동료였던 옥천희와 현계흠은 보통 죄인처럼 참수당했다. 동시에 황사영의 집과 재산이 적몰되고, 어머니는 거제도에, 아내는 제주도에 관노로 보내졌고, 어린 아들 경한은 추자도에 보내졌다.

 

한차례 태풍이 지나간 며칠 뒤에 황사영을 배론에서 숨겨주고 고발하지 않았던 사람에 대한 재판이 있었다. 이렇게 한 사건의 뒤편에서 재판을 받고 불굴의 의지로 외롭게 죽어간 순교자가 있었는데 그가 김귀동(?~1802년)이다.

 

김귀동은 전라도 고산 출신으로 충청도 홍주에서 살았다. 그에 대해 알려진 자세한 문헌이 없어 어렸을 때의 행적이나 천주교 신자가 된 동기는 알 수 없다. 더구나 그의 세례명이 없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세례성사도 받지 못한 채 순교했을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그는 천주교를 알게 된 뒤에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집과 재산을 버리고 1801년 초에 충청도 제천의 배론(현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으로 옮겨와 옹기점을 운영하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 무렵 황사영은 신유박해를 피해 신분을 숨기고 상복 차림으로 변장하여 자신을 이씨라고만 밝힌 채 의지할 곳 없이 방랑하고 있었다. 김귀동은 이 사실을 알고 그를 자신의 집에 피신시키기로 결심하였다. 김한빈의 안내로 황사영이 황심과 함께 배론으로 왔을 때 김귀동은 그들 일행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하고, 그가 경영하는 옹기점에 굴을 파서 피신처를 마련해 그 입구를 옹기 그릇으로 막고 은밀하게 하였다.

 

황사영을 토굴 속에 피신시킨 김귀동은 김한빈과 함께 토굴 속을 드나들며 천주교 서적을 읽고 교리공부를 하며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황사영의 동지들이 교회일을 잘 돌볼 수 있도록 힘껏 뒷바라지하였다.

 

황사영은 이 토굴 속에서 중국 교회에 보내려 한 그 유명한 백서를 썼다. 황심은 백서의 서명인이 되고, 김한빈은 조심스럽게 당시의 교회실정과 순교자들에 대한 소식을 전하여 백서의 자료를 제공하였다. 옥천희가 그해 동지사 속에 숨어들어 전하기로 계획된 이 일은, 그가 국경에서 체포되고 이어 황심과 황사영이 체포당하면서 백서가 발각되었다.

 

실패로 끝난 이 사건으로 황사영과 그의 동지들이 순교한 며칠 뒤 이제 황사영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잡혀온 교우들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서울로 이송되어 포청과 형조를 거치며 여러 차례 심문과 모진 형벌을 받았다. 이때 김귀동과 함께 일했던 김세귀, 세봉 형제는 형벌과 회유가 반복되자 더 견디지 못하고 배교하여 경상남도 칠원과 창원으로 귀양보내졌다.

 

김귀동은 참담한 심정으로 고독하게 신앙고백을 하며 고통을 이겨냈다. 그와 함께했던 황사영과 신앙의 동지들은 모두 사형이 집행되었고, 함께 일했던 교우 김세귀와 세봉 형제는 슬프게도 배교하고 유배의 길을 떠났다. 그를 격려하며 함께할 어떤 신앙의 동지도 없었다. 냉혹한 심문과 교활한 회유, 그리고 음습한 옥중의 차가운 바람이 더욱 쓰라린 고독을 느끼게 하였다. 세상은 그를 잊은 듯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고, 혼자 버려진 김귀동은 끊임없이 예수님과 성모님을 부르며 앞서 순교한 신앙의 동지들과 함께하기만을 바랐다.

 

포청의 심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본시 고산 사람으로 제천의 토목이 좋다는 말을 듣고 옹기점을 하여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번 2월초에 배론 산중에 이주했는데, 같은 달 말경에 김한빈이 이씨라는 상주를 데리고 저에게 와서 옳은 도를 행하는 이라고 극찬하였습니다. 저와 한빈은 힘을 모아 땅을 파서 사서를 숨겨놓았고 그 도에 점점 미혹되었는데 얼마 뒤에 들으니 그 이씨라는 사람이 바로 황사영이었습니다. 제가 이미 사영, 한빈 등과 혈당을 맺고 흉모에 가담하였으니 사영을 따라 함께 사형을 받아 기쁜 마음으로 형장에 나갈 것이며 다시 변심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 밖에 더 할 말은 없습니다."

 

동지들과 함께 순교하기를 열망하는 이 자백에 관장은 놀라워하며 모질게 매질하여 형조로 넘겼다. 형조의 심문과 형벌은 더욱 가혹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동료의 배교를 가슴 아파했고, 피로 맺은 동지들이 목숨을 바치고 떠난 뒤 혼자 남아 옥고를 치르면서, 신앙인으로 죽어 순교하기를 간절히 염원하였다.

 

형조에서 심문한 내용과 이에 대하여 김귀동 자신이 자백하여 말한 내용을 적은 기록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너는 시골의 어리석은 백성으로 사학을 굳게 믿고, 깊은 산골에 옹기점을 마련하여 흉적을 땅굴 속에 숨겨두었으며, 도망할 길을 만들어놓고 머리를 맞대고 모의를 했으니, 그 흉중의 심사는 무엇을 하고자 한 것이냐? 지금 사영이 벌을 받은 뒤에도 그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내심의 흉악한 사정을 감히 속이지 말고 사실대로 바르게 고하라."

 

"제가 생각한 바는 이미 포청 조사에서 모두 진술했습니다. … 저는 시골의 어리석은 백성으로 나라의 금령을 무시하고 사설을 굳게 믿었으며, 도망한 흉적을 감추어두어 여러 달을 잡히지 않게 했습니다. 실정을 알면서 고발하지 않았으니 벌을 면하기 어려운데, 또다시 흉적과 연결되어 오랫동안 은밀히 접촉했습니다. 스스로 범한 죄를 생각해 보니 만 번 죽더라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이는 김귀동에 대한 관변측 기록인 형추문목과 승관초의 내용이다. 그가 자신의 신앙을 사설이라 하거나, 또 신앙의 동지로 목숨을 함께하려 한 동지를 흉적이라 했을 까닭이 없다. 관청에서 죄인이 자신의 죄를 이렇게 자백하고 자인한 것처럼 그들의 입장에서 적은 것이다. 우리는 이 기록에서 오히려 자신의 행위를 당당히 말하고 "사형을 받아 기쁜 마음으로 형장에 나갈 것이며 다시 변심할 생각이 없습니다."라는 대목에서 순교를 열망하는 굳건한 자세를 엿볼 수 있겠다.

 

달레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몇 줄로 그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그의 최후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오랫동안 고문을 한 뒤 관원은 배교하기를 원하면 풀어주겠다고 그에게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꾸준히 거절하고 신앙인으로서 '다른 교우들과 같이 죽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는 마침내 그의 고향인 홍주로 이송되어 1802년 2월 2일 참수당해 순교의 영광스런 승리를 얻었다.

 

[경향잡지, 2000년 8월호, 김길수 요한(전 대구 가톨릭 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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