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선교ㅣ복음화

복음화의 일부 측면에 관한 교리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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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3-31 ㅣ No.86

교황청 신앙교리성


복음화의 일부 측면에 관한 교리 공지

 

 

I. 서론

 

1. 아버지께서 복음 선포를 위해 파견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회개와 믿음으로 초대하셨다(마르 1,14-15 참조). 부활하신 다음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복음화 사명을 계속할 것을 당부하셨다(마태 28,19-20; 마르 16,15; 루카 24,4-7; 사도 1,3 참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참조: 17,18).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이 한 목자 아래 한 양떼가(요한 10,16 참조) 되도록 이들에게 다가가시기 위해 교회를 통해 모든 역사적 시기와 지상의 모든 곳과 사회의 모든 분야에 계시고자 하신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5-16).

 

그래서 “성령의 재촉으로” 사도들은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삶을 바꾸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권유”하였다. “이 순례하는 교회가 구원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안에 현존하시며 복음 선포자들의 활동을 이끄시고 함께해 주시며 뒷바라지하시고 이들의 노고가 열매 맺도록 해주신다. 그리스도교 역사가 시작될 때 일어난 일이 그 전체 과정에서 지속되고 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와 그의 형제 안드레아 사도 그리고 다른 첫 제자들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하신 말씀이 제삼천년기를 맞이하여 계속 세상에 울려 퍼지고 있다.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은 기적이 일어난 다음 주님께서는 베드로 사도가 “사람을 낚을 것”(루카 5,10)이라고 예고하셨다.

 

2. 복음화라는 말에는 매우 풍부한 의미가 담겨 있다. 넓은 의미에서 복음화는 교회의 사명 전체를 요약하고 있다. 교회의 모든 삶은 복음 전승(traditio Evangelii)의 실현, 곧 복음의 선포와 전달로 이루어진다. 복음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로마 1,16)이며 그 궁극적 본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것이다(1코린 1,24 참조). 이런 식으로 이해된 복음화는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한다. 어떤 경우에도 복음화는 단순히 교리를 가르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복음화는 자신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 다시 말해서 자신을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과 활동을 위한 도구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고 내어 주시는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들을 권리가 있으므로 각자 자신의 고유한 소명을 온전히 이행할 수 있다.” 이 권리는 모든 사람이 바오로 사도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갈라 2,20) 것이라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몸소 선사하신 것이다. 이 권리는 복음을 선포할 상응하는 의무를 내포하고 있다. “사실은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 9,16; 참조: 로마 10,14). 그래서 교회의 모든 활동은 본질적인 복음화의 차원을 가지고 있고, 모든 사람이 신앙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도와야 할 의무와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여기에 복음화의 주요 목적이 있다. “사회적 문제들과 복음은 분리될 수 없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단지 지식과 능력과 기술 소양과 도구만을 전달한다면 너무 부족한 것이다.”

 

3.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선교 명령(마태 28,19 참조)을 듣지 않고 실천하지 않는 혼란이 점증하고 있다. 종교 문제에서 다른 사람을 설득하려는 모든 시도는 그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종종 제기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돌아서게 하고 가톨릭 신앙으로 개종시키려고 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만 제시하고 그들이 각자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도록 초대하는 것만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사람들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자신의 종교에 더 충실하도록 돕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또한 정의와 자유와 평화와 연대를 추구하는 공동체 건설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정확한 지식이 없고 교회에 공식적으로 입교하지 않아도 구원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거나 교회에 입교하도록 촉구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문제에 당면하여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이 공지를 발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바오로 6세 교황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가르침에서 폭넓게 다루어진 복음화에 관한 전체 가톨릭 교회 교리를 바탕으로 한 이 공지는 주님의 선교 명령과 모든 사람의 양심과 종교 자유에 대한 존중 사이의 관계의 일부 측면을 설명하는 목적을 가진 것이다. 이는 중요한 인간학적 교회론적 교회 일치적 의미가 담긴 문제이다.

 

 

II. 몇 가지 인간학적 의미

 

4.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하느님께서는 인류에게 지성과 의지를 주셔서 당신을 자유롭게 찾고 알고 사랑하도록 하셨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는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원이며 도전이다. 이는 선하고 참된 것을 알고 사랑하는 인간의 능력을 위한 선물이다. 선과 진리의 추구에 비견할 만한 인간 자유의 활동은 없다. 선과 진리의 추구는 인간의 자유가 삶의 근본적인 측면과 연관된 것에 충실하도록 이끈다. 이는 특히 구원 진리의 문제와 연관된다. 구원의 진리는 사유의 대상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귀의할 때 지성과 의지와 정서와 활동과 미래 계획 등 전 인격을 포괄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선과 진리의 추구 안에 성령께서는 이미 활동하셔서 토마스 데 아퀴노의 “진리는 누가 말하든지 간에 모두 성령께로부터 오는 것”(omne verum a quocumque dicatur a Spiritu Sancto est)이라는 유명한 말처럼 인간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하신다. 그래서 인간의 지식이 지혜로 성장해가고 믿음으로 진리에 몸 바치도록 도와주셔서, 인간이 진리와 연관을 맺게 하시고 마음을 진리로 향하게 하시는 이러한 성령의 활동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오늘날 자신이 진리라고 여기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고 결국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일이 정당한가 하는 의문이 더욱 자주 제기되고 있다. 이는 종종 다른 사람의 자유에 대한 침해로 간주된다. 이처럼 인간 자유를 본질적으로 연관이 있는 진리와 분리시켜 보는 관점은 “그 어느 것도 궁극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욕구만을 궁극적인 기준으로 삼으며, 자유라는 가면을 쓰고 서로를 옥죄는 감옥이 되는 상대주의”의 한 표현일 뿐이다. 현대 사상에 나타난 다양한 형태의 불가지론과 상대주의에서 “입장들의 정당한 다원성이, 모든 입장이 다 똑같이 타당하다고 가정하는 데 바탕을 두고 있는 무차별적인 다원주의에 양보하게 되었다. 이것은 오늘날 진리에 대한 신뢰의 결핍을 드러내 보여 주는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증후들 가운데 하나이다. 심지어는 동양에 기원을 둔 특정 생명관들조차도, 진리의 배타적 특성을 부정하고 진리가 서로 모순되기까지 하는 다양한 가르침들 안에서 동등하게 드러난다고 가정하는 데에서 이 신뢰의 결핍을 드러내고 있다.” 인간이 진리에 대한 자신의 근본적 능력을 부인하면, 곧 진리를 참으로 알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 회의하면, 결국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의 지성을 파악하고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5. 이러한 맥락에서 진리 탐구와 연관하여 자신의 개인적 노력만 신뢰하고 다른 이의 도움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그들에게 언어와 문화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거의 본능적으로 믿게 되는 여러 진리들도 제공하는 전통들 속에 잠겨 태어나는 것이다. …… 그럼에도 인생에는, 개인적인 검증 절차를 거쳐서 취득하는 진리들보다는, 단순하게 믿게 되는 진리들이 훨씬 더 많이 있다.” 자신의 문화를 통해 전수되거나 다른 사람들을 통해 획득된 이러한 지식을 신뢰할 필요성은 인간을 이 과정과 연관된 인간 관계와 사회 관계에서뿐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는 얻을 수 없었던 진리로 부요하게 해준다. 반면에 영적 개인주의는 자신의 자유를 부요하게 하는 풍부한 선을 받고 베푸는 것과 연관하여 신뢰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열 수 없게 하여 인간을 고립시킨다. 그리고 사회에서 자신의 신념과 의견을 표현할 권리를 위협한다.

 

특히 인간 삶의 의미를 밝히고 지침을 마련해 줄 수 있는 진리에는, 진리 자체의 진정성과 확실성을 보증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을 신뢰하고 받아들임으로써도 도달할 수 있다. “자신과 자신의 인생을 다른 사람에게 내맡길 수 있는 능력은 가장 중요하고 호소력 있는 인간적 행위임에 틀림없다.” 비록 좀 더 깊은 차원의 것이기는 하지만 신앙을 통한 계시의 수용도 진리 탐구의 역동성 안에 있는 것이다.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믿음의 순종’을(로마 16,26; 참조: 로마 1,5; 2코린 10,5-6) 드러내야 한다. 이로써 인간은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지성과 의지의 완전한 순종’을 드러내고 하느님께서 주신 계시에 자발적으로 동의함으로써 자기를 온전히 그분께 자유로이 맡기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모든 인간이 종교와 연관하여 진리를 추구할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확인하고서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한다. “진리는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성에 알맞은 방법으로 곧, 자유로운 연구, 교육과 훈련, 커뮤니케이션과 대화로써 탐구하여야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사람들은 서로 진리 탐구를 돕고자 이미 발견하였거나 발견하였다고 여기는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한다.” 모든 경우에 진리는 “오로지 진리 그 자체의 힘으로 드러날 뿐이다.” 그래서 인간의 지성과 자유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과 만날 수 있도록 진심으로 이끄는 일은 부적절한 침해가 아니라 인간 관계를 더욱 풍요하게 해주는 정당한 노력이며 봉사이다.

 

6. 복음화는 복음화되는 사람들만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복음화는 복음화하는 사람들과 전체 교회 또한 풍요롭게 한다. 예를 들어, 토착화 과정에서 “보편 교회는 …… 다양한 그리스도교 생활 영역에서 새로운 표현들과 가치들로 풍부해진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더 잘 알고 더 잘 표현하게 되며, 지속적으로 자신을 쇄신할 자극을 받게 된다.” 실제로, 성령 강림일 이후 교회는 인류 역사상 모든 시대와 장소의 민족들이 지닌 무수한 보화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자기 사명의 보편성을 표명해 왔다. 다른 사람이나 문화와의 만남은 언제나 고유한 인간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충분하게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복음의 잠재된 가치들을 드러낼 수 있다. 이러한 역동성 덕분에 “사도들에게서 이어 오는 성전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교회 안에서 발전한다.”

 

실제로 성령께서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태중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시도록 활동하신 이후, 문화들의 복음화에서 교회가 어머니로 행동할 수 있도록 이끄신 분이다. 복음은 어떠한 문화에도 속하지 않지만, 어느 한 문화에 예속되지 않으면서 모든 문화에 스며들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말씀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과 문화들이 제기하는 심오한 문제들 간에 이루어지는 대화를 풍요롭게 이끄시며 복음의 토착화에서도 으뜸 주역이 되신다. 이렇게 해서 성령 강림 사건은 역사 안에서 하나이고 동일한 신앙의 일치 안에 지속되며 다양한 언어와 문화로 풍요로워진다.

 

7. 중요한 종교적 사건들과 진리들을 다른 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전달하는 활동은 대화와 선포와 교육이라는 인간 현상과 깊이 조화를 이룰 뿐만 아니라, 인간은 자신이 갖고 있는 좋은 것을 다른 이들과 나누려는 고유한 욕구를 지니고 있다는 또 다른 중요한 인간학적 사실에도 부합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러한 전달을 지향하는 역동성을 지닌다. 삶을 구원하는 진리는 그것을 받은 사람의 마음에 이웃 사랑의 불을 지펴 자신이 자유롭게 받아들인 것을 다른 이들에게도 자유로이 건네도록 이끈다.

 

비그리스도인들도 하느님께서 “당신께서만 아시는 길로” 주시는 은총을 통하여 구원받을 수 있지만, 교회는 그들이 이 세상에서 크나큰 유익을 놓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하느님의 참된 모습과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맺는 친교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실제로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만남을 통해 경이를 느끼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다. 그분을 알고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분과 맺은 친교에 관해 이야기해 주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다.” 하느님과 인간과 세상에 대한 근본적 진리의 계시는 모든 인간에게 큰 선인 반면,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진리를 알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악이며 때로 깊은 고통과 속박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교 신앙으로의 개종을 “어둠의 권세에서” 해방되는 것이며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고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는다.”(콜로 1,13-14)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러므로 진리이신 그리스도께 온전히 속하는 것과 교회에 들어오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거저 받는 사랑, 모든 사람의 선을 위하여 넘쳐흐르는 사랑 안에서 그 자유를 드높여 완성으로 이끄는 것이다. 생명을 주시는 당신 아드님의 살로 나누는 친교를 통해 모든 이를 벗으로 삼으시는 하느님 품 안에서 살아가고, 그분에게 죄의 용서에 대한 확신을 받으며, 믿음에서 생겨나는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은총이다. 교회는 모든 사람이 이러한 선에 동참하여 온전한 진리와 온전한 구원 수단을 누림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로마 8,21) 수 있기를 바란다.

 

8. 복음화에는 다른 사람들의 주장과 감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성실한 대화도 따른다. 실제로 우리는 자유와 사랑과 대화 안에서만, 또한 우리가 하는 말이 단순히 내뱉은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참으로 새겨질 수 있도록 함으로써만 다른 사람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대화 상대자들의 바람과 고통과 구체적인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바로 이렇게 할 때, 선의의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을 더욱 활짝 열고 자신의 영적 종교적 체험을 최대한 성실하게 나눌 것이다. 참된 친교의 특징인 이러한 나눔의 체험은 증언과 그리스도교 선포를 위한 소중한 기회가 된다.

 

인간 활동의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로 종교 문제에 관한 대화에도 죄가 개입할 수 있다. 그러한 대화가 본래의 목적에 따르지 않고 거짓과 이기적인 동기나 오만에 빠져 대화 상대의 존엄과 종교 자유를 존중하지 못할 때 그런 일이 이따금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누구에게든 신앙을 갖도록 강요하거나 부당한 술수로 유인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며, 또한 마찬가지로 그 누구든 신앙에서 멀어지도록 불의한 박해를 받지 않을 권리를 강력히 주장한다.”

 

복음화의 가장 으뜸가는 동기는 모든 사람의 영원한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참된 복음 선포자의 유일한 바람은 그들이 자유롭게 받은 것을 자유롭게 주는 것이다. “교회 시초부터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복음에 어긋나는 방법이나 강제적인 행동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느님 말씀의 힘으로 사람들이 주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도록 힘썼다.” 사도들의 사명과 이를 계승한 초기 교회의 사명은 모든 시대에 복음화의 근본 모범으로 남아 있다. 바로 지난 세기의 역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것은 흔히 순교로 드러나는 사명이다. 순교는 증인들의 신뢰성을 더해준다. 그들은 권력이나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다. 온 세상 앞에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넘쳐흐르는, 무장되지 않은 힘을 보여준다. 그 힘은 자신의 삶을 완전히 내어놓기까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다.”(요한 15,20)라고 예고하셨듯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복음 때문에 박해받아 왔다.

 

 

III. 몇 가지 교회론적 의미

 

9. 성령 강림일 이후, 신앙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람은 신자 공동체 안으로 들어왔다.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날에 신자가 삼천 명 가량 늘었다”(사도 2,41). 처음부터, 성령의 힘으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선포된 것은 사람들이 믿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며 그분 교회의 지체가 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교부들의 글에도 그리스도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라는 권고가 끊임없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개종(conversio)이라는 말은 이교도들을 교회로 데려올 때 쓰인다. 그러나 개종 곧 회개(metanoia)의 정확한 그리스도교적 의미는 믿음으로 선포된 그리스도 안의 새 삶이라는 표현이 말해주듯이 생각과 행동의 변화를 뜻한다. 곧 그리스도와 더욱 하나 되고자 생각과 행동을 끊임없이 바꾸는 것으로서(갈라 2,20 참조), 세례 받은 이들은 무엇보다도 이런 삶으로 부름 받는다. 이것이 우선 예수님께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참조: 마태 4,17) 하고 몸소 부르신 의미이다.

 

그리스도교 정신은 언제나 온 인류를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에게로 이끌려는 열정으로 활기를 띠어 왔다. 새 구성원들이 교회에 통합되는 것은 세력의 확대가 아니라, 하늘과 땅, 그리고 서로 다른 대륙과 시대를 이어주는 그리스도와의 친교망으로 들어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사랑과 정의에 대한 노력으로 활기를 띠는 ‘새 삶’인 그리스도와 이루는 친교의 은총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도구이며 “싹과 시작”이지, 정치적 이상향이 아니다. 교회는 이미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이며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1코린 15,28)이 되실 참된 미래, 결정적인 미래를 자기 안에 지니고 있다. 하느님께서만 참된 평화와 정의를 세상에 가져다주실 수 있기 때문에 교회의 현존이 필요하다. 하느님 나라는 오늘날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듯 모든 종교적 체험들과 전통들을 넘어서 하느님을 찾는 모든 사람의 보편적이고 구별 없는 친교로서 지향하는 일반적인 실재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습인 나자렛 예수님이라는 이름과 얼굴을 지닌 인격체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를 향하는 인간 마음의 자유로운 모든 이끌림은 그 본성상 그리스도께 이르고 그 나라의 효과적인 표징인 그분의 교회 안으로 들어오려 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느님 현존을 드러내는 존재이며 따라서 인간과 세상이 참으로 인간다워지도록 하는 수단이다. 역사 안에서 선교 활동에 힘입은 교회의 성장은 그분의 나라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데에 이바지한다. 실제로 “그 나라를 교회와 분리할” 수도 없다.

 

10. 그러나 교회의 “선교 사명인 복음 선포는 오늘날, 실제적으로(de facto)뿐 아니라 원칙적으로(de iure)도 종교 다원주의의 정당화를 모색하는 상대주의 이론들 때문에 위협을 받고 있다.” 오랫동안,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복음화의 이유를 분명히 알지 못해 왔다. 하느님의 온전한 계시를 선물로 받았다는 주장 뒤에는 불관용의 태도와 평화에 대한 위협이 숨어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을 드러내심으로써 주시는 진리의 온전한 선물은 당신께서 몸소 인간 본성의 지울 수 없는 특징으로 창조하신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무관심이 아니라, 진리를 향하는 자유를 말한다. 이러한 존중은 가톨릭 신앙 자체와 그리스도의 사랑의 요구 조건이다. 그것은 복음화의 본질적인 요소이며, 따라서 하느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인류에게 주시는 충만한 구원을 알리고 기꺼이 받아들이게 돕는 노력과 반드시 함께 증진되어야 하는 선이다.

 

종교 자유에 대한 존중과 촉진이 “진리와 선에 대하여 우리를 무관심하게 만들어서는 결코 안 된다. 오히려 바로 그 사랑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진리를 선포하도록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재촉하고 있다.” 그러한 사랑은 성령의 참 현존의 표징이다. 성령께서는 복음화의 으뜸 주역으로서 복음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끊임없이 움직이시어 그들이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신다. 이것이 교회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사랑이고, 거기에서부터 타오르는 사랑의 불이 이 세상 끝까지 모든 사람의 마음속까지 비춘다. 인간의 마음은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기다린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초대하시는 복음화의 시급성을 이해하고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신 사명이 모든 세례 받은 이의 사명이 되는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각자 고유한 소명에 따라 교회 안의 모든 이에게 울려 퍼진다. 오늘날 매우 많은 세상 사람들이 여러 형태의 광야에서 특히 “영혼이 메말라 인간 생명의 존엄과 목표를 인지하지 못하는, 하느님의 어둠의 광야”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시며, 베네딕토 16세 교황 성하께서는 “전체 교회와 그 목자는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광야에서 생명의 장으로, 성자와 나누는 친교로, 우리에게 생명을 풍성하게 주시는 한 분에게 이끌어야 한다.”고 세상에 일깨우셨다. 이 사도 직무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와 의무이고 종교 자유의 고유한 표현으로 그 윤리-사회적 차원과 윤리-정치적 차원에 부응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 안타깝게도 아직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또 다른 지역에서는 실질적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있는 권리다.

 

11.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에페 5,2 참조) 그리스도의 사랑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절이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하고 간청한다(2코린 5,20 참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그 사랑, 단테가 말하듯 우주에 끝없이 펼쳐진 바로 그 사랑에 활짝 열린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감사를 표현하는 사랑이다. 이는 사도들의 설교에서 분명히 드러나고(사도 4,31; 9,27-28; 26,26 등), 아그리파스 왕이 바오로 사도의 말을 듣고는 “당신은 조금 있으면 나를 설득하여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하게 만들겠군.”(사도 26,28)라고 말할 만큼 직접 체험했던 그 열정과 확신과 담대함을 설명해 준다.

 

복음화는 대중적인 복음 설교나 대중적 활동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언제나 효과적인 개인적 증언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실제로, “따라서 대중적인 복음 선포와 병행하여, 직접 만나서 전달하는 방법도 여전히 유효하고 중요하다. …… 기쁜 소식을 대중에게 선포해야 할 절박한 요구 때문에, 이러한 형태의 선포를 잊어서는 안 된다. 직접적 선포를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서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전해 듣고 개개인의 마음은 감동을 받는다.”

 

언제나 복음을 전할 때에는 삶의 증언과 말씀이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진리의 빛이 모든 사람을 비추려면 무엇보다도 성화의 증언이 필요하다. 말과 행동이 모순될 때 이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증언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가장 훌륭한 증언이라 하더라도,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1베드 3,15)라고 한 베드로의 말대로, 그러한 증언을 설명하고 정당화하지 않으면, 또한 주 예수님에 대한 분명하고 명료한 선포로 명시화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효과를 거두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IV. 몇 가지 교회 일치적 의미

 

12. 처음부터, 교회 일치 운동은 복음화와 밀접히 연관되어 왔다. 사실 일치는 선교 활동이 효력이 있다는 보증이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분열의 걸림돌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여야 할 지극히 거룩한 대의를 손상시키고 있다.”고 유감을 표명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 그리하여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요한 17,21)

 

교회의 사명은 보편적이고 세계의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러나 복음화는 여러 상황에 따라 다르게 수행되어야 한다. 정확히 말해서, 복음화는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을 향한 만민 선교(missio ad gentes)다. 넓은 의미에서, 복음화는 통상적인 사목 활동을 가리킬 때 사용되고, ‘새 복음화’라는 말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더 이상 실천하지 않는 이들을 향한 사목 활동을 가리킨다. 또한, 오랜 그리스도교 전통과 문화를 지닌 나라들을 포함하여 비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는 나라들에서 이루어지는 복음화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러한 나라들의 전통과 영적 풍요로움에 대한 참된 존중과 성실한 협력 정신이 필요하다. 가톨릭 신자들은 “한편으로 종교 무차별주의와 혼합주의를 배척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건전한 경쟁을 지양하여, 되도록, 민족들 앞에서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공동으로 고백하고, 또한 사회적 기술적 사안과 문화적 종교적 일에서 협동하며,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의 규범에 따라, 갈라져 나간 형제들과 형제애로 협력하여야 한다.”

 

교회 일치 활동은 다음과 같이 다양한 차원으로 구별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모든 대화의 기본 조건인 듣기가 있고, 그 다음으로는 다른 이들의 믿음, 전통, 신념을 이해하고자 함으로써 이따금 불일치 아래 가려져 있던 동의를 이끌어내기도 하는 신학 토론이 있다. 이 모든 것과 밀접히 연관된, 교회 일치 활동의 또 다른 본질적 차원으로는 증언과 선포가 있다. 개별 전통이나 신학적 세부 사항이 아니라 신앙 전승 자체에 속하는 요소들을 증언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교회 일치 운동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부분적 친교를 진리와 사랑 안에서 완전한 친교로 자라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제도적 차원만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모든 신자 구성원이 무엇보다도 기도, 참회, 연구, 협력을 통하여 달성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언제 어디서나 가톨릭 신자는 각자 자신의 신앙을 증언하고 온전히 선포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비가톨릭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가톨릭 신자들은 서로 존중하는 사랑과 진리의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단순히 사고의 교환만이 아니라 은총의 교환인 대화를 나눔으로써 구원의 충만한 수단을 대화 상대편에 제시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은 그리스도를 향한 더 깊은 회개로 이끌린다.

 

이와 연관하여, 또한 비가톨릭 그리스도인이 양심의 이유로 또 가톨릭 교회의 진리를 확신하며 가톨릭 교회와 온전한 친교를 이루기를 바란다면, 이는 성령의 활동이며 양심의 자유와 종교 자유의 한 표현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경우는 흔히 생각하는 부정적인 의미의 개종 권유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일치 교령’에서 분명히 인정하였듯이, “완전한 보편적 일치를 바라는 개인들의 준비 작업과 화해는 본질적으로 일치 활동과 분명히 구별되지만, 둘 다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결코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 일치 활동은 가톨릭 신앙을 자유의사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이를 온전히 선포할 권리나 책임을 없애지 않는다.

 

이러한 전망은 당연히 부당한 강요를 삼갈 것을 요구한다. “종교적 신앙을 전파하거나 종교 관습을 소개할 때, 특히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이들에게는, 떳떳하지 못하고 올바르지 못한 강제적인 설득으로 보이는 모든 행동은 언제나 삼가야 한다.” 진리에 대한 증언은 힘이나 강압적인 행동, 또는 복음에 어긋나는 방법으로 무언가를 강요하고자 하지 않는다. 당연히 사랑의 활동은 거저 베푸는 것이다. 사랑과 진리에 대한 증언은 무엇보다도 하느님 말씀의 힘으로(1코린 2,3-4; 1테살 2,3-5 참조)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을 지향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성령의 힘과 선포된 진리 자체를 바탕으로 한다.

 

 

V. 결론

 

13. 교회는 자신의 복음화 노력을 결코 소홀할 수 없다. 주 예수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언제나 교회와 함께 계시리라 약속해 주셨기 때문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오늘날 종교 영역에 만연한 상대주의와 거짓 평화주의는, 교회가 자신의 본성에 속하고 실제로 자신의 ‘으뜸 과제’인 그 힘들고도 거룩한 사명에 응답하지 않을 타당한 이유가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 5,14).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의 삶이 이 진리를 증언한다. 교회 역사 전체에 걸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랑에 이끌려 전 세계, 모든 사회 분야에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과 활동을 하며, 모든 그리스도인 세대에게 기꺼이 그리스도의 명령을 완수하도록 끊임없이 일깨우고 초대해 왔다. 그러므로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 일깨워 주셨듯이, “복음 선포와 증언은 그리스도인들이 각 개인과 온 인류를 위해 할 수 있는 첫째가는 봉사다. 그리스도인은 유일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모든 이에게 전달하도록 부름 받았다.”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사랑은 우리를 하느님과 일치시켜 주는 것이고 “우리의 분열을 뛰어넘어 우리를 하나로 만드는 것, 바로 ‘우리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께서는 마침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1코린 15,28) 되신다.”

 

베네딕토 16세 교황 성하께서는 2007년 10월 6일 아래 서명한 장관 추기경에게 허락된 알현에서 신앙교리성 정례회의에서 채택한 이 교리 공지를 승인하시고 그 발표를 명령하셨다.

 

로마 신앙교리성에서

2007년 12월 3일

선교의 수호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대축일

장관  윌리엄 조셉 레바다 추기경

차관  안젤로 아마토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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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Redemptoris missio), 1990.12.7., 47항, 『사도좌 관보』(Acta Apostolicae Sedis) 83(1991), 293.

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14항; 참조: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 「만민에게」(Ad gentes), 7항;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일치의 재건」(Unitatis redintegratio), 3항. 이 가르침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시는”(1티모 2,4) 하느님의 보편 구원 의지와 모순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두 진리를 결합시킬 필요가 있다. 곧 모든 인류가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과 구원을 위해서는 교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교회의 선교 사명」, 9항, AAS 83(1991), 258.

3)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서 「새천년기」(Nova millennio ineunte), 2001.1.6., 1항, AAS 93(2001), 266 참조.

4) 바오로 6세, 교황 권고 「현대의 복음 선교」(Evangelii nuntiandi), 1975.12.8, 24항, AAS 69(1976), 22 참조.

5) 「교회의 선교 사명」, 46항; 참조: 「현대의 복음 선교」, 53.80항.

6) 베네딕토 16세, 뮌헨의 노이에 메세(국제 박람회장)의 야외 광장에서 거행한 미사에서 한 강론, 2006.9.10, AAS 98(2006), 710.

7)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I-II, q. 109, a.1, ad 1. 

8)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신앙과 이성」(Fides et ratio), 1998.9.14., 44항, AAS 91(1999), 40 참조.

9) 베네딕토 16세, ‘가정과 그리스도인 공동체: 인성 교육과 신앙 전수’를 주제로 열린 로마 교구 대회 참가자들에게 하신 연설, 2005.6.6., AAS 97(2005), 816.

10) 「신앙과 이성」, 5항.

11) 「신앙과 이성」, 31항; 참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12항.

12) 국제연합의 「세계인권선언」(1948) 18-19항도 이러한 권리를 인정하고 확인하고 있다. 

13) 「신앙과 이성」, 33항.

14)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하느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 「하느님의 말씀」(Dei verbum), 5항.

15)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 「인간 존엄성」(Dignitatis humanae), 3항.

16) 종교 자유 선언, 1항.

17) 「교회의 선교 사명」, 52항.

18)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슬라브인의 사도들」(Slavorum Apostoli), 1985.6.2., 18항, AAS 77(1985), 800 참조.

19) 계시 헌장, 8항. 

20) 「현대의 복음 선교」, 19-20항 참조.

21) 선교 교령, 7항; 참조: 교회 헌장, 16항; 사목 헌장, 22항.

22) 베네딕토 16세, 교황 즉위 미사 강론, 1005.4.24., AAS 97(2005), 711.

23)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하느님의 아드님」(Dei Filius), 2항: “그 자체로는 인간 이성의 영역 밖에 있는 하느님에 관한 문제들이 인류가 현재 놓인 조건에서도 모든 사람에게 어려움 없이 굳은 확신으로 오류와 섞이지 않고 인식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하느님의 계시 덕분이다(『신학대전』, I, q.1, a.1)”(『신앙 규정 편람』Denzinger-Hunermann, Enchiridion Symbolorum, 3005). 

24) 선교 교령, 13항.

25) 종교 자유 선언, 11항. 

26) 예를 들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그리스인을 향한 권고」(Protrepticus ad Graecos), IX, 87, 3-4,『그리스도교 원전』(Sources Chretiennes) 2,154-155; 성 아우구스티노,『설교』(Sermo) 14D [=352A], 3, Nuova Biblioteca Agostiniana XXXV/1, 269-271. 

27) 교회 헌장, 5항. 

28) 「교회의 선교 사명」, 18항 참조. “만일 이 나라를 예수님에게서 분리하면, 그분께서 계시하신 하느님 나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고, 그 결과 하느님 나라의 의미는 왜곡되어 순전히 인간적이고 관념적인 목적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으며, 그리스도의 신원 자체도 왜곡되어 그리스도께서는 더 이상 언젠가는 모든 것이 그분께 굴복하게 될(1코린 15,27 참조) 주님으로 여겨지지 않게 됩니다.” 

29) 「교회의 선교 사명」, 18항. 그리스도와 그분 나라의 관계에 관해서는, 신앙교리성 선언 「주님이신 예수님」(Dominus Iesus), 2000.8.6., 18-19, AAS 92(2000), 759-761 참조. 

30) 「주님이신 예수님」, 4항. 

31) 「현대의 복음 선교」, 80항 참조. “또한, 올바른 마음만으로도 온 세상이 구원될 수 있는데 왜 복음을 선포하여야 하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세상과 역사는 ‘말씀의 씨앗’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미 심어 놓으신 씨앗 안에 존재하는 복음을 전하겠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32) 베네딕토 16세, 예수 성탄 대축일을 맞이하여 로마 교황청에 한 연설, 2005.12.22., AAS 98(2006), 50 참조: “종교 자유가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는 인간 무능력의 표현으로 간주되고 따라서 상대주의를 인정하는 것이 되어 버리면, 사회적 역사적 요구로 종교 자유는 형이상학 수준으로 잘못 높여지고 그 참 의미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이 하느님에 대한 진리를 알 수 있고 또 그 진리의 내적 존엄을 근거로 이러한 앎에 연관되어 있다고 믿는 이들은 종교 자유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와 정반대로, 종교 자유를 인간의 공동 생활에 필수적인 것으로 여기거나, 외적으로 강요될 수 없고 오로지 확신의 과정을 통해서 받아들이기 마련인 진리의 본질적 결과로 종교 자유를 인식하는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33) 사목 헌장, 28항; 참조: 「현대의 복음 선교」, 24항.

34) 「교회의 선교 사명」, 21-30항 참조.

35) 베네딕토 16세, 즉위 미사 강론, 2005.4.24., AAS 97(2005), 710.

36) 베네딕토 16세, 즉위 미사 강론.

37) 종교 자유 선언, 6항 참조.

38) 사실, 종교 자유의 권리가 인정받는 곳에서는 한 사람이 다른 이들의 양심을 완전히 존중하면서 자신의 신념을 그들과 나눌 권리도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이러한 나눔은 다른 이들을 자기 자신의 종교 공동체로 들어오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잘 발달된 법리학과 더불어 수많은 법적 체계로 확립된 권리 가운데 하나다.

39)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La Divina Commedia) 천국 편, 33,87, ‘우주에 흩어진 모든 것’ 참조.

40) 「현대의 복음 선교」, 46항.

41) 교회 헌장, 35항 참조.

42) 「현대의 복음 선교」, 22항.

43) 일치 교령, 1항; 참조: 요한 바오로 2세, 「교회의 선교 사명」, 1.50항.

44) 「교회의 선교 사명」, 34항 참조.

45) 선교 교령, 15항.

46)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하나 되게 하소서」(Ut unum sint), 1995.5.25.,14항, AAS 87(1995), 929.

47) 「하나 되게 하소서」, 28항 참조.

48) 일치 교령, 3.5항 참조.

49) ‘개종 권유’(proselytismus)라는 말은 원래 유다교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개종자’(proselytus)라는 말은 ‘이방인’ 출신이지만 ‘선택받은 민족’ 가운데 들어오게 된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리스도교에서도 개종 권유라는 말은 흔히 선교 활동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 말은 복음의 정신과 반대되는 수단과 방법으로 자기 종교를 촉진하고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수호하지 않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교회 일치 운동에서는 개종 권유라는 말이 이러한 뜻으로 사용된다. 세계교회협의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 공동실무위원회, 개종 권유의 도전과 공동 증언의 소명, 1995 참조.

50) 일치 교령, 4항.

51) 종교 자유 선언, 4항.

52) 베네딕토 16세,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Deus Caritas Est), 2005.12.25., 31항 다), AAS 98(2006), 245 참조.

53) 종교 자유 선언, 11항 참조.

54) 베네딕토 16세, 성 바오로 대성전 방문 때에 한 강론, 2005.4.25., AAS 97(2005), 745. 

55) 베네딕토 16세, ‘선교 교령’ 반포 40주년 국제 학술 대회 참가자들에게 한 연설, 2006.3.11., AAS 98(2006), 334.

56)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8항.

 

[출처 : 주교회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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