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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교리상식: 가톨릭교회 안에서의 위험요소들 - 기복적인 미사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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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7-01 ㅣ No.613

[알기 쉬운 교리상식] 가톨릭교회 안에서의 위험요소들 - 기복적인 미사지향


오래 전의 이야기다. 어느 교포 자매님이 미사를 부탁해 왔다. 돌아가신 어떤 분을 위해서 50대의 위령미사를 봉헌해 달라는 전화였다. 그렇게 하겠다고 했는데, 꼭 50대를 지내 달라고 재차 강조를 하기에 왜 그러시냐고 물어 보았다. 그 자매님은 매년 휴가를 겸해서 이탈리아로 피정을 가는데, 그곳 신부님은 특별한 은사를 받으셔서 죽은 사람이 천당에 갔는지, 지옥에 갔는지 잘 알아 맞힌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만일 망자가 연옥에 머무르고 있으면 미사를 몇 대 봉헌해야 천당으로 갈 수 있는지도 알아낸다는 것이다.

더욱 놀랄 일은 그 전 해에 연옥에 있는 그 망자를 위해서 미사를 16대를 봉헌하라는 처방(?)을 받아서 모 신부님께 부탁을 했는데, 아직도 그 망자가 연옥에 있는 것을 보면 그 신부님이 미사를 제대로 다 드리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 신부님 같으면 성실하게 미사를 드려줄 것 같다면서 나에게 부탁한다는 것이다. 얼핏 내 머릿속에 ‘그렇다면 내년에 또 그 용하다는 신부에게 물어봐서 아직도 그 망자가 연옥에 있다고 한다면 나는 미사를 떼어먹은 신부가 되는 것이 아닌가?’하고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두려운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그 자매님에게 정중히 거절하면서, 한 인간의 구원에 관한 문제는 전적으로 하느님께 속한 것이고, 우리 인간은 판단할 수도 없고 판단해서도 안 된다는 점을 설명했던 기억이 난다.

기복적인 미사지향과 관련하여, 몇 해 전에 성령기도회를 중심으로 문제시 되었던 <가계치유문제>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가계치유(家系治癒)는 미국성령기도회의 로버트 드그란디스 신부와 존 햄쉬 신부에 의해 시작되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가계치유(또는 가계정화)란 조상들의 죄가 후손에게 영향을 끼쳐 대물림되기 때문에 가계에 내려오는 그 부정의 뿌리를 기도와 미사를 통해서 정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가계치유를 주장하는 자들은 후손들이 당하는 고통이나 문제점들을 조상들의 탓으로 돌린다. 가계치유를 위해서는 기도와 미사를 정성들여 봉헌해야 하는데, 미사는 충분한 예물과 함께 그 횟수도 많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에서 시작된 가계치유신심운동이 우리나라에 급속히 확산된 이유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민간신앙적인 심성과 어느 정도 일치하기 때문이 아닐까? 마치 한을 품고 죽은 조상의 귀신이 후손들을 괴롭히니 그 원혼을 달래기 위하여 굿을 해야 한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다행히도 대구대교구를 비롯하여 여러 교구에서는 문제점을 직시하여 잘못된 점을 시정하였지만 기복신앙의 심성을 버리지 않는 한 여러 형태로 재발할 여지는 충분하다.

가계치유는 무엇보다도 가톨릭교회가 가르치는 세례성사의 은총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신자들은 세례를 통해서 모든 죄에서 해방된다. 곧 원죄와 모든 본죄, 그리고 모든 죄벌까지도 용서 받아서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다. 컴퓨터를 예를 든다면 완전 포맷이다. 그러므로 가톨릭 신자라면 조상들의 죄가 후손들에게 유전된다는 가계치유를 주장하는 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가톨릭교회는 먼저 세상을 떠난 조상들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는 아름다운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교회는 초대 그리스도교 이래로 죽은 이들에 대한 기억을 커다란 신심으로 소중하게 간직하여 왔으며, 죽은 이들이 죄에서 벗어나도록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거룩하고 유익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2마카 12,45 참조)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를 바쳤다.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단지 조상들의 구원만이 아니라 기도하는 이들의 내적 치유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곧 기도 중에, 부모나 조상들에게 잘못한 것에 대하여 용서를 청하면서 그들과 화해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이 살아생전에 자신에게 준 상처나 부정적 영향을 발견하고 그들을 용서함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이는 기도를 통해서 산 이와 죽은 이들이 서로 통교할 수 있다는 가톨릭교회의 신앙, 곧 ‘성인들의 통공’에 부합한다. 그렇지만 올바른 신앙은 미사의 횟수와 예물의 양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정성스러운 마음자세와 태도에 달려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급변하는 사회 환경 속에서 말 못할 어려움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가정이나 사회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소외되어 극심한 외로움과 무력감으로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삶의 의미를 잃고 사는 사람들도 너무나 많다. 또한 선천적으로 타고난 병환으로 고통 받거나 후천적인 여러 원인으로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많다. 고통을 겪는 신자들은 대개 심리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기 마련인데, 이들은 제도화된 틀 안에서 해법을 찾기보다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고통에서 벗어나려 한다. 이들을 위한 사목자들의 배려가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당장의 위로보다는 더 큰 신앙의 틀 안에서 위기를 신앙성숙의 기회로 이끌어 주는 도움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월간빛, 2012년 6월호, 하창호 가브리엘 신부(매호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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