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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여정: 땀방울로 뿌려진 믿음의 씨앗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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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6-22 ㅣ No.923

[순례의 길 떠날 때]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여정


땀방울로 뿌려진 믿음의 씨앗들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여정을 따라 순례의 길을 걷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분의 지상 여정 자체가 하나의 위대한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사제 최양업과 성조 아브라함

 

최양업 신부님(1821-1861년)의 삶은 성조 아브라함의 인생 여정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브람이 아버지 테라의 인도 아래 칼데아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이주하였듯이(창세 11,31), 소년 최양업은 모방 신부님의 인도로 마카오에서 신학교 생활을 합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의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내려갔듯이(창세 12,10), 신학생 최양업은 마카오 지역의 소요 때문에 필리핀으로 피신합니다.

 

소돔을 위하여 기도한 아브라함처럼 최 토마스는 조국을 위하여 하느님께 간청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내어놓음으로써 하늘의 별,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은 후손을 약속받았듯이(창세22,12-18),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와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의 순교를 제물 삼아 거룩한 사제가 되어 수많은 신앙의 후손을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양떼를 먹이려고 목초지를 찾아 이동을 계속하였듯이, 목자 최양업은 전국의 교우촌을 찾아다니며 양들에게 천상 양식을 먹여주었습니다.

 

 

긴 여정 끝의 사제수품과 귀국

 

경기도 부평 교우촌에 살던 중, 정하상 바오로 등의 천거로 모방 신부님에게 신학생으로 선발된 소년 최양업은 1836년 12월 마카오를 향하여 길을 떠납니다. 8년 뒤인 1844년 12월 중국 팔가자(현 길림성 장춘시)에서 김대건 안드레아와 함께 페레올 주교님에게 부제품을 받았습니다.

 

부제품부터 사제품까지는 4년 4개월이라는 오랜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사제수품일인 1845년 8월 17일보다 훨씬 뒤인 1849년 4월 15일 중국 상해에서 마레스카 주교님에게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그 뒤, 중국 요동의 차구(현 요녕성 장하시)에서 베르뇌 신부님(1854년 주교수품)의 보좌로 6개월 정도 공식 사목활동을 하였으니, 이것이 한국인 사제 최초의 외국인 사목입니다.

 

최 토마스는 귀국을 위해 오랜 기간 여러 차례의 시도를 합니다. 신학생 시절인 1842년 7월에 마카오를 떠나 귀국로 탐색을 시작하였습니다(같은 해 11월에 팔가자 도착). 1846년 1-2월에는 부제로서 조선 동북방을 통한 귀국로를 탐색하였고, 1847년 여름에는 고군산군도(현 전북 군산시 옥도면) 부근에서 좌초하여 한 섬에 상륙하기도 하였습니다.

 

1849년 4월 사제품을 받고, 그해 12월 압록강 하류의 의주 변문을 통과하여 마침내 귀국에 성공합니다.

 

 

목숨을 건 사목순방, 땀의 순교

 

길고 긴 여정과 오랜 기다림, 그리고 목숨을 건 귀국 후에 최양업 신부님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머나먼 사목순방길이었습니다. 1846년 병오박해 때 26세의 나이, 1년 남짓한 사제생활로 굵고 짧은 지상 생애를 마치신 첫 사제 김대건 신부님과는 대조를 이룹니다.

 

첫 사제의 피와 둘째 사제의 땀, 이 모든 것이 우리 민족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주님의 지혜로운 안배입니다. “우리 주님의 지혜는 헤아릴 길 없으시다”(시편 147,5).

 

귀국 직후인 1850년 1월 전라도 지역부터 시작된 최양업 신부님의 사목순방은 6개월 동안 거의 5천여 리에 달했다고 합니다. 1861년 선종하실 때까지 방방곡곡의 교우촌 순방여정이 모두 4만 5천 리라고하니, 해마다 평균 4천여 리 땅에 굵은 땀방울을 흘리셨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선교여행으로 아시아와 유럽의 많은 지역이 거룩한 순례지가 되었듯이, 최양업 신부님의 사목순방으로 우리나라의 거의 전역이 거룩한 땅으로 거듭났습니다.

 

최 신부님 일행은 늘 비밀리에 움직여야 했습니다. 한 곳에서 오래 머무를 수도 없었습니다. 산골 오지의 교우촌을 향하여 낮에 움직이고, 밤에 성사를 집전한 다음, 날이 새기 전에 또다시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밀고와 체포의 위험은 늘 신부님을 따라다녔고, 1860년의 경신박해 때에는 거의 절망적 상황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입니다. 최 신부님은 1860년 9월 3일 죽림(현 울산 울주군) 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님들께 보내신 서한에서 이렇게 쓰셨습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다행히 이 고비는 넘기셨지만, 결국 과로와 장티푸스로 쓰러져 ‘예수, 마리아’를 부르시며 1861년 6월 15일 하느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땀의 순교자’입니다. 하느님의 일로 과로를 되풀이한 끝에 체력이 소진되어 더 이상 흘릴 땀조차 없어 하느님께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최 신부님의 삶은 조국의 복음화와 민초들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께 봉헌된 “거룩한 산 제물”(로마 12,1) 그 자체였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쉼터

 

충북 진천의 동골 교우촌은 최양업 신부님에게 첫 번째 거처요 여름 휴식처였습니다. 페레올 주교님의 허락을 얻어 1850년 7월경부터 몇 해 머무르시다가, 좀 더 안전한 배티를 새 거처요 사목 중심지로 삼으셨습니다.

 

최 신부님은 교우촌 배티(충북 진천)에서 여름철 휴식을 취하시면서도, 교우촌 신자들을 돌보고, 순교자 행적을 수집하며, 번역과 집필 활동을 하셨습니다. 또한 신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셨습니다. 배티 마을 중앙에 사제관 겸 소성당이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배티성지에는 최 신부님의 사제관 겸 소성당이 재현되어 있는데, 그야말로 소박한 초가집입니다. 집 왼편 마당에 있는 ‘십자가의 길’은 신부님의 삶을 압축해 놓은 듯합니다.

 

최양업 신부님 선종 150주년 기념성당 건립 예정지, 그리고 야외 제대와 성모상을 지나 산길을 걸어 올라가면 무명의 6인 순교자 묘, 14인 순교자 묘가 나옵니다. 포졸들에게 쫓겨온 교우들이 마침내 하느님의 어린양처럼 피를 흘리며 고개 들어 주님께 자비를 청하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최 신부님도 이들처럼 쫓겨다니셨습니다.

 

온갖 험난한 길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사제의 본분을 다하신 최양업 신부님에게는 조금 이른 귀천이 허락되었습니다. 피흘리는 순교 대신에, 방방곡곡 산하를 다니시며 12년 동안 뜨거운 땀으로 복음을 전하는 백색 순교의 본보기를 보여주신 신부님께서는 40년 남짓의 지상 생애를 마치셨습니다.

 

베르뇌 주교님 주례로 성대한 장례식을 치른 뒤, 신부님의 시신은 배론(충북 제천) 성요셉신학교 뒷산에 안장되었습니다. 신부님을 본받으려 노력했던 후배 사제들의 묘지도 그 아래쪽에 있습니다. 전 원주교구장 지학순 다니엘 주교님도 거기 잠들어 계십니다.

 

배론성지에는 최양업 신부님의 일대기가 묘사된 아름다운 조각공원이 있습니다. 교우들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는 납골시설이기도 합니다. 황사영 알렉시오가 숨어 지내며 백서를 쓴 토굴, 성요셉신학교도 재현되어 있고, 지난 3월 14일에는 ‘지학순 주교 기념관’이 원주교구장이신 김지석 주교님 주례로 봉헌되었습니다.

 

 

최 신부님의 시복시성은 우리의 몫

 

주님께서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풍성하게 뿌리셨습니다. 우리나라 곳곳에 스며든 신부님의 땀방울 하나하나가 그 씨앗들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그 땀방울에서 돋아난 새싹이요 줄기요 이파리입니다.

 

최양업 신부님을 따라 걷는 순례의 길은 다름 아닌 ‘열매 맺는 신앙인’, 곧 말씀을 듣고 깨달아 몇 곱절로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마태 13,23).

 

‘하느님의 종’ 최양업 신부님께 전구를 청하며 주님께 온전히 의탁할 때에, 그분의 후배들인 신학생, 사제뿐 아니라 모든 신자가 그분의 삶과 가르침을 본받고 열매를 맺을 때에, 최 신부님은 시복시성의 영예 속에 교회 전체의 공경을 받으실 것입니다.

 

[경향잡지, 2011년 6월호, 글 노희성 기자, 사진 김민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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