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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교회9: 공산당의 손아귀에 들어간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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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2-02 ㅣ No.103

[니~하오! 중국교회] (9) 공산당의 손아귀에 들어간 천주교


공산당의 검은 장막 드리우다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오랜 내전은 마침내 1949년 공산당의 홍군(紅軍) 승리로 막을 내렸다.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 정부는 미국의 보호 아래 황급히 대만으로 쫓겨갔다.

 

모택동은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광장에서 30만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중화인민공화국 창건식을 가졌다. 이 날은 중국 천주교회가 새로운 암흑의 터널 앞에 선 날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역사의 한 장이다. 중국교회는 숱한 박해를 이겨내며 자립기반을 갖춰가고 있었다. 신자 수는 400만 명에 달했고, 곳곳에서 본토인 성직자들이 교구장에 오르는 등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산당이 중국 대륙을 점령하면서 희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인민의 아편' 종교를 아예 멸(滅)하라

 

공산주의자들은 제2차 국공내전(1946~1949) 기간에 도처에서 천주교에 무지막지한 철퇴를 휘둘렀다. 250년 역사의 교우촌 서만자에 난입해 교우 500여 명을 죽이고 성당과 병원 등에 불을 지른 서만자 학살(1946년)이 대표적 사례다. 심지어 배교를 거부하는 신부와 수녀를 대로상 트럭에 묶어 놓고 동사(凍死)시키는 만행도 저질렀다.

 

1949년 인민공화국 건국 즈음에는 잠시 평화로웠다. 그러나 위장된 평화였다. 그들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 레닌주의 사상에 따라 종교를 금(禁)하는 게 아니라 아예 멸(滅)하려고 했다.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천주교를 냉혹한 시선으로 본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교회는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에 큰 본당과 수도회는 그들 눈에 계급투쟁의 대상인 대지주나 다름 없었다. 또 성직자들은 분명한 반공사상을 갖고 있었다. 서양 종교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앞잡이라는 편견은 오래전부터 그들 뇌리에 박혀 있었다.

 

그들은 과거처럼 성당을 불태우거나 신자들을 학살하는 직접적 방법 대신 서서히 숨통을 조이는 전략을 구사했다. 우선 꼬투리를 잡아 상당한 액수의 헌금과 벌금을 강요했다. 교회가 이를 납부하지 못하면 재산을 몰수하거나 성당까지 팔아 내도록 했다. 교회는 재정에 쪼들려 학교와 병원 등을 폐쇄할 수밖에 없었다.

 

또 유물 변증법 학습으로 세뇌교육을 시켜 신자들이 종교를 버리도록 유도했다. 세뇌교육에 넘어간 신자들은 천주교 분열의 씨앗으로 이용했다. 국제사회의 이목을 의식해 대도시에서는 종교행사 거행을 허락했지만 농촌에서는 이를 불허했다.

 

 

주교들은 군소금 팔러 다니며 신자들 만나

 

공산당은 순교자를 내지 않기 위해 반혁명죄 등의 죄목을 씌워 구금, 처형했다. 천주교는 이미 1950년대 초반에 재산을 전부 몰수당했다. 이로 인해 신부들은 수공업을 하거나 농사를 지어 생계를 꾸려갔다. 어떤 주교들은 신발과 군소금을 팔러 다니며 신자들을 찾아다녔다. 성직자들은 본토인이든 서양인이든 이같은 처참한 환경에 적응하며 탄압을 견뎌야 했다.

 

공산 정부가 1951년 10월 1일 인민정부 수립 기념일 행사에 상해교구장 공품매 주교를 특별 초대했다. 북경교구장이 공석이라 중국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 공 주교였다.

 

그러나 공 주교는 "많은 교우와 성직자들을 잡아넣은 당신들이 나를 행사장에 앉혀 놓고 종교의 자유를 선전하려고 하는 것 아니냐"며 초대에 거절했다. 공산당은 공 주교에게 '반혁명분자' '반공집단의 괴수'라는 죄목으로 체포했다. 이때 신부 100명, 수녀 20명, 신자 4000명 정도가 함께 체포됐다. 이 가운데 상당수 청년들은 사상노동개조 수용소로 끌려갔다. 이어 공산 정부는 "공 주교가 감옥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국가에 협조하기로 했다"고 거짓 선전을 늘어놓았다.

 

천주교 소멸작업은 이런 식으로 진행됐다. 그 결정판이 이어 나오는 삼자운동(三自運動)이다.

 

[평화신문, 2008년 11월 16일,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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