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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교회6: 19세기 후반 반그리스도교 운동 왜 일어났나?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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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2-02 ㅣ No.100

[니~하오! 중국교회] (6) 19세기 후반 반(反) 그리스도교 운동 왜 일어났나 (하)


서로에게 무지했기에...

 

 

제2차 아편전쟁(1856~1860년)이 끝나자 중국 선교의 문이 활짝 열렸다.

 

천진조약으로 천주교 금지령이 해제되고, 선교사들은 5개 통상 항구 외에 내륙 선교권까지 얻어냈다. 교회의 토지 매입도 가능해졌다. 17세기 의례논쟁 여파로 숨죽였던 천주교로서는 더할나위 없는 선교의 호기(好機)였다. 유럽의 선교사들이 중국 복음화의 열망을 안고 속속 도착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중국인들의 반(反)그리스도교 정서에 부닥쳐 고전을 면치 못했다. 성당을 짓고, 세례자를 배출하고, 고아원과 병원을 열어 자선사업을 벌이는 등 숱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교난(敎難)은 끊이지 않았다.

 

신의식(멜키올) 주성대 교수는 '중국 신민의 천주교 인식에 대한 시론'이란 논문에서 그 원인을 서양 선교사와 중국인 상호간 이해부족이라고 지적한다. 선교사들은 중국 문화전통에 대한 이해 없이 서구 열강에 기대어 전교지를 확장하고, 중국인들은 천주교 교리를 수용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의례논쟁 이전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중국 문화와 종교사상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이 있었다. 관리와 지식인들, 즉 여론 주도층에도 천주교를 이해시키려고 적극 다가갔다.

 

그러나 아편전쟁 이후에는 본국의 힘에 의지해 활동하는 경향이 강했다. 교난은 외래종교와 토착민간 갈등에서 비롯된 충돌인 데도 그 문제를 스스로 풀기 보다는 본국 영사의 개입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인들의 중화주의(中華主義)에 기초한 반외세 사상도 걸림돌이었다.

 

선교사가 토지를 매입하려고 하면 지방 관리들은 주민을 동원해 방해하기 일쑤였다. 선교회마다 심혈을 기울인 고아원 육영사업도 마찬가지다. 영아들의 질병과 기아, 남존여비 사상에 따른 여아 유기(遺棄)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선교사들이 불쌍한 영아들을 거둬 보살피는 데 대해 "서양인이 아이들의 눈과 심장을 빼서 약을 만든다"는 괴소문을 퍼뜨렸다. 이런 유언비어가 퍼질수록 반천주교 감정은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교리와 전례도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성령으로 인한 마리아의 예수 잉태, 예수의 신성, 죽음과 부활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영세는 천주교에서 이탈하지 못하게 올가미를 씌우는 것, 영성체는 음약(淫藥)으로 여교우를 유혹하려는 것, 고해소는 서양인과 여교우간의 음란행위 장소라고 하는 등 사사건건 부정적 시각으로 봤다. 도교에 환약과 선단(신선이 만든다는 장생불사 명약)이 있고, 남녀칠세부동석 풍속이 있는 터라 이런 억측에 이해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또한 선교조직이 무학력자가 대부분인 농촌에 너무 몰려 있었다. 사실 지식인층은 조상제사 금지령 이후 천주교에 등을 돌린 상태였다. 교회와 선교사들이 누리는 특권에 편승한 중국 신자들의 거만한 태도도 반천주교 정서를 증폭시는 요인이었다.

 

선교사들이 방인(본토인) 사제를 적극 양성하지 않은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1851년 상하이 주교회의는 중국 사제들의 학위 취득을 원치 않았다. 많은 것을 알면 공자숭배와 제사를 금하는 교회 정책에 이의를 제기할까봐 그런 것이다. 천주교를 오해하는 중국인들과 대화하기에는 방인 사제들이 훨씬 나았을 텐데 말이다.

 

19세기 반그리스도교 운동은 적응주의 선교와 토착화에 큰 과제를 남긴 중대 사건이다.

 

[평화신문, 2008년 10월 6일,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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