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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교회5: 19세기 후반 반그리스도교 운동 왜 일어났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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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2-02 ㅣ No.99

[니~하오! 중국교회] (5) 19세기 후반 반(反) 그리스도교 운동 왜 일어났나? (상)


선교사, 제국주의 세력으로 오해

 

 

중국 선교역사는 수난과 박해로 점철돼 있다.

 

특히 19세기 후반에 전국 각지에서 반(反)그리스도교 운동이 일어나 수많은 선교사들이 죽임을 당하고, 교회시설이 불에 탔다. 1860~1899년 사이에 일어난 반그리스도교 사건은 무려 수천 건에 달한다.

 

서양 선교사 20여 명과 중국 신자 5만여 명이 살해된 천진교난(天津敎難, 1870년), 주교 5명ㆍ신부 48명ㆍ신자 2만여 명이 무참히 살육된 의화단의 난(1900년)이 대표적이다.

 

당시 중국인들은 온갖 불평등조약을 강요하며 침략해 들어오는 영국과 프랑스 등 서양 제국주의와 그리스도교를 동일시했다.

 

아편전쟁에서 보듯 청나라는 서구 열강과 충돌할 때마다 엄청난 액수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굴욕적 조약을 맺는 등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불평등조약 체결 때 중국어에 능통한 선교사들이 통역과 조약문 작성에 참여하고, 선교활동에 유리한 조항을 끼워넣은 터라 중국인들은 선교사들을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간주했다.

 

1870년에 발생한 천진교난은 터무니 없는 유언비어가 빚어낸 참극이다. 선교사들이 고아원을 열어 길에 버려진 아이들을 보호하자 "서양인들이 아이들을 죽이고 안구와 심장을 도려내 약품을 만든다"는 괴소문이 나돌았다. 가족 중심의 혈연을 중시하는 중국인들은 선교사들의 자선활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선사업을 돕는 동정녀들을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고, 효과가 뛰어난 양약에 대해서는 "아이의 눈을 빼서 만든 것"이라고 소문을 냈다.

 

인자당이라는 고아원은 수용시설이 부족하자 아이를 데려가 키우겠다는 사람이 나타나면 양육비조로 돈까지 얹어주었다. 그러자 아이를 유괴해 데리고 와서 자기가 키우겠다며 돈을 받아가는 나쁜 사람들이 생겨났다. 어느 날 관원이 유괴범을 붙잡아 고아원에 데리고 와서 조사를 벌이자 주민 수천 명이 몰려와 "서양인을 죽이자"며 들고 일어난 게 천진교난이다. 이 사건은 서구 열강과 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청 정부는 이로 인해 주모자들을 사형에 처하고, 프랑스에 배상금 21만 냥을 지불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지방 관리와 주민들은 배상금을 조달하느라 허리띠를 더 졸라매야 했다. 1860년 이래 선교사 학살과 선교지 파괴에 대한 배상금을 중국 정부에 요구하는 게 관례였다.

 

산동성에서 촉발된 의화단의 난은 서구 열강과 만주족 왕조인 청을 몰아내기 위해 비밀결사단체가 주도한 외세 배척 운동이다. 당시 청나라는 청일전쟁에 패해 배상금 3억 엔을 지불해야 할 처지인 데다 흉년까지 들어 민중의 반외세 감정이 극에 달할 때였다.

 

반대로 교회는 아편전쟁 이후 위상이 높아졌다. 서양 선교사들은 외교적 특권을 누리고, 관청에 들어가서 재판 결과에 영향력을 행사하기까지 했다. 그러자 힘없고 가난한 농촌 주민들이 대거 천주교에 입교했다. 의화단의 눈에 천주교 입교자들은 서양인에게 복종하는 매국노일뿐이었다.

 

무예가 뛰어난 의화단은 1899년 말부터 성당을 파괴하고 성직자와 신자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산동성 일대의 교회 시설들은 대부분 파괴되고 약탈당했다. 베이징 북당 천주교회에서는 성직자와 신자 3000여 명이 의화단의 포위 공격에 맞서 63일간이나 저항했다.

 

교회는 저항 수단이 없는 터라 반외세 무장세력의 집중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00년 중국 공식 신자수는 74만 1562명이었다.

 

[평화신문, 2008년 9월 28일,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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