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강론자료

2015-0702.....연중 제13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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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5-07-01 ㅣ No.1802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 홀수 해

창세 22,1-19           마태오 9,1-8

2015. 7. 2. 이태원

주제 :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

세상의 삶은 소유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남보다 더 가지려고 하는 것을 기본으로 생각하면서, 많이 가지면 성공한 사람이고 많이 뺏기거나 덜 가지면 실패한 사람이 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단편적인 모든 진리를 담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것들이 모여서 전체를 이룰 것입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이러한 방식대로 하느님을 우리가 규정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딱 부러진 대답이 어딘가에 숨어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하는 평가에 대하여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기도 어려운 것이 사람의 삶에 대한 해석일 것입니다.


세상에 살고 있는 신앙인으로서 자신이 실천해야만 하는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도 어렵지만, 하느님의 뜻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은 더 어리석다고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오늘 독서에 나왔습니다. 100살에 얻은 아들을 110살에 번제물로 바칠 수 있을까요? 이런 소리와 함께 행동으로 실천한 아브라함의 삶을 보면서 우리는 참으로 불가능한 일을 했다고 말하기 쉽습니다. 그런 차이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 됐고, 유대민족과 이슬람민족의 시조(始祖)가 되었지만, 그와 같은 삶을 살 것도 아닌 우리들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불가능한 일을 주문했다고 말하기 쉽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그릇대로 행동합니다. 제가 그릇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만, 사실 저도 제가 얼마나 큰 그릇을 가졌는지는 모릅니다. 어쩌면 아주 작은 그릇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이 아브라함이 겪었을 삶의 고민과 걱정에 대한 얘기를 빼고 기록했을까요? 실제로 현실에 부딪힌 아브라함에 대한 기록은 읽을 수 없는 우리는 그의 삶에서 하느님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인간만으로 보려고 합니다. 내가 얼마나 신앙의 인간인지를 보라는 것이 하느님의 주문이라면, 나는 얼마나 진실한(?) 세상의 인간인지를 보여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우리의 생각을 일부러 충돌시키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과 인간이라는 개념을 생각할 줄 한다면, 하느님과 부딪혀서 승리할 인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복음도 그대로 표현합니다. ‘이 자가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말한 사람의 자세와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한 예수님께서 드러내는 자세가 충돌한 모습에서 어떤 것이 인간에게 더 이롭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요? 축복을 누리는 일만 생각하면서 살기 쉬운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은 과연 어떤 것일지 잠시 묵상할 시간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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