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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그리스도인의 경제생활: 자본주의에 대한 교회의 태도와 입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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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12-10 ㅣ No.796

[그리스도인의 경제생활] 자본주의에 대한 교회의 태도와 입장은?

 

 

자본주의

 

싫건 좋건 우리는 자본주의 경제체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더욱이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뒤 역사 안에서 자본주의의 승리가 더욱 공고해진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런데 “그 자본주의가 대체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사실 그 대답이 조금 모호하고 애매해진다. 자본주의가 시대에 따라서 그 모습이 조금씩 달라지기도 했고, 또 단순히 어떤 경제체제를 의미하는 말로 국한시키기엔 실제 인간의 삶의 영역에서 자본주의가 미치는 영향이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일종의 삶의 양식이 되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다시 말해, 통상적으로 자본주의는 사유재산제도에 기초한 자유시장 경제체제로 이해되지만, 자본주의는 경제적 영역을 뛰어넘어 모든 영역에서 그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런 포괄적 의미에서 자본주의를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체제로 규정해 볼 수 있다.

 

근대적 자본주의의 등장 이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실로 눈부신 환골탈태의 재주를 피우면서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스스로를 바꾸어갔고 또 스스로의 운명을 만들어나가고 있는”(홍기빈) 자본주의. 우리 삶의 전 방위의 영역에서 우리를 규정하고 우리 삶의 방식마저도 결정하고 있는 이 자본주의에 대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자본주의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 체제로서 우리에게 존재하는가? 따라서 그저 자본주의에 대한 찬가를 부르며 그 시스템 속에서 생존하고 승리자로 남고자 오직 노력해야 할 뿐인가?

 

“우리가 자본주의를 대체할 만한 더 나은 경제체제를 발견하지 못하는 한,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이성적이다. 그러나 이런 이유 때문에 자본주의 앞에 무릎을 꿇어 기도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프랑스의 대중철학자 앙드레 콩트-스퐁빌의 지적처럼, 그저 냉정하게 자본주의를 이해하면서, 자본주의를 좀 더 윤리적인 경제체제로 바꾸고자 노력하기보다는(왜냐하면 경제는 윤리가 아니므로?) 자본주의 체제 속에 살고 있는 우리가 윤리적으로 되어가는 노력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자본주의에 대한 교회 안의 여러 태도들

 

자본주의가 근대 사회 안에 지배적 경제체제로 등장한 이후 교회 안에서도 자본주의에 대한 태도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났다. 시대에 따라 교도권에서는 자본주의에 대해 사회교리적 태도를 늘 표명해 왔지만, 교회 구성원들 간의 성향과 입장에 따라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와 접근 방식이 조금씩 달랐다. 일반적으로 이것을 세 가지 형태의 태도로 분류해 볼 수 있다. - 친(pro)자본주의 경향, 반(anti)자본주의 경향, 중도적 또는 비판적(critical) 경향.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는 자본주의를 세계의 해방자로 옹호하는 경향을 낳았다. 신보수주의자들은 이 자본주의의 승리를 시대적 징표로 간주하였다. 보수적 성향의 신앙인들 역시 이 자본주의에 대한 찬양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그리스도교 자체를 자본주의에 대한 우호적(친화적) 종교(capitalism-friendly religion)로 재정립하고자 했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도덕적 우월성과 물질적 성취를 자랑스러워하며, 물질적 부의 성장이 사회 구성원의 더 많은 책임의식을 고양하며 더 많은 도덕적 행위들을 유발할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그들은 자본주의 문화가 자선과 기부의 문화를 촉진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자본주의가 그리스도교의 윤리관과 인간관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자본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 안에 파생된 지나친 개인주의 경향 때문이라고 여긴다. 따라서 교회가 자본주의가 갖는 약간의 폐해를 교정하고 자본주의가 잘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으며, 또한 교회는 자본주의가 올바른 방향으로 전진할 수 있도록 선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또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경제문제에 대한 인격주의적 접근이 이러한 입장을 대변한다고 주장한다. 경제문제에서 인격주의(economic personalism)란 모든 경제활동과 상업적 구조들은 궁극적으로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공고히 하고 인간성의 충만한 개발을 위한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또한 자본에 대한 노동의 우위성을 강조하며 인간 노동은 단순히 유용성의 측면에서 재단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한다. 따라서 이러한 인격주의적 접근은 경제문제에서 신앙인 개개인과 교회 기관들의 인격적 책임을 강조한다.

 

서구의 사회주의적 성향의 신앙인들과 남미의 해방신학적 신앙인들은 자본주의에 대해 근본적인 관점에서 매우 부정적 입장을 취한다. 이들은 그리스도교의 공동체적 가치관과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개인주의와 물질적 이익 추구의 가치관은 서로 상충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갖는 물신화(物神化) 경향과 우상숭배적 요소들의 위험성을 강하게 지적한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원리들은 사회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시장을 위한 생산이라는 황금률에 따라 인간의 욕망마저도 사로잡고 왜곡하는 삶의 방식이며 일종의 죄의 형태를 띠고 있다. 자본주의는 종교마저도 자본주의화하며, 신앙 역시 자본주의적 신앙으로 변질시키고 있다.

 

브라질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 해방신학자 성정모의 주장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일종의 종교적 형태를 드러낸다. 자본주의는 자체적으로 신앙과 전례와 영성의 요소를 지닌다. 자본주의는 시장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포함한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작동되는 시장은 인간 자유의 원천이며 지속적인 유용성을 지닌 체제다.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효용성과 경쟁력을 숭배한다. 이 자본주의 전례 안에서 인간의 삶은 이익의 숫자에 종속되며 인간의 희생은 신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자본주의는 소비주의라 불리는 그 자신의 영성을 가진다. 자본주의 경제체제 안에서 인간은 끝없는 소비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고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 소비만이 물신을 만나게 할 수 있는 덕목이다.

 

한편, 자본주의를 찬양하거나 거부하거나 하는 태도가 아닌, 자본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교회 안에 있다. 자본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이들 역시 자본주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자본주의는 죄를 향한 새로운 길을 열었고, 자본주의의 출발이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리에 대한 반동에서 시작되었다고 이들은 말한다. 이들은 인류 역사에서 자본주의의 공헌을 인정하지만, 자본주의를 넘어서려 노력한다. 곧, 자본주의의 긍정적 결과들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자본주의가 지닌 부정적 결과들을 비판한다.

 

일반적으로 가톨릭 교도권의 가르침들은 이 흐름에 속해있다. 예를 들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회칙 “백주년”에서 자본주의 경제체제 아래서 시장의 유용성과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시장은 자유방임 상태로 있어서는 안 되고 항상 국가와 시민사회의 통제와 규제 안에 놓여있어야 함을 분명히 지적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가톨릭 사회교리는, 사회주의는 항상 배척했지만 자본주의는 언제나 대화의 상대로 여겼다. 이처럼 자본주의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입장은 항상 복합적인 경향을 드러낸다.

 

 

회칙 “진리 안의 사랑”에 나타난 자본주의에 대한 입장

 

베네딕토 16세 교황 역시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교리의 전통적 입장을 계승하고 있다. 현행 자본주의(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실패했음을 천명하며 경제 구조와 운용이 윤리적으로 조직되고 관리되기 위해 강력한 규제가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구체적이고 심오한 형태의 경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일종의 “경제의 문명화”를 주장한다(38항).

 

교황이 생각하는 문명화된 경제는 아마도 경제생활 안에 상품의 등가 교환 관계를 규정하는 계약의 논리뿐만 아니라 “정치를 통한 올바른 재분배 법칙과 형태”와 “증여 정신이 깃든 활동”을 포함하는 총체적 경제체제일 것이다(37항). 결국 경제의 문명화는“무상성과 친교에 몫을 할애하는 경제활동 형태에 점진적으로 열려있는 자세가”(39항) 확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앙드레 콩트-스퐁빌의 견해와 비슷하게, 교황 역시 경제활동의 주체인 인간들의 윤리적 행위들을 통해 경제의 문명화를 촉진할 수 있음을 천명한다. 그러므로 경제체제 자체의 윤리성 확보보다는 경제 주체의 결단을 통한 윤리성 확보가 더 많은 가능성을 지님을 주장한다. “무상성의 시장은 존재하지 않으며, 무상성의 자세는 법으로 확립될 수 없다. 그러나 시장과 정치는 둘 다 상호 증여에 열려있는 개인들을 필요로 한다”(39항). 그리고 “수도자나 평신도의 활동에서 생겨난 수많은 경제 단체들이 그 구체적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37항)고 말한다.

 

 

교회 자신이 하나의 대안적 모델이 될 수 있는가?

 

교회 자신이 거시적 의미에서 하나의 대안적 경제체제를 제시할 수는 없다. 그것은 교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교회 영역 밖의 문제다. 교회는 단지 신앙의 눈으로 경제체제를 분석하고 신앙적 가치와 입장에 따라 비판하고 감독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분석은 좀 더 정교해야 하며, 실천적 대안들은 더 구체적이어야 하고, 교회 자신이 자신의 기관들 안에서 자신의 예언적 선언과 선포들을 실천하여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자본주의에 대한 교회의 당위적 비판들은 “금융과 신자유주의의 과잉을 비판하면서 도덕적 자본주의를 역설하는 사르코지 대통령의 수준을 넘지 못할 수도 있으며”(세르주 라투슈), 그저 공허한 수사적 선언에 불과할 수 있다.

 

아마도 교회가 비록 거시적 측면에서 대안을 제시할 순 없지만, 교회 자신이 미시적 측면에서 어떤 대안적 실천들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장이 될 수는 있으리라.

 

* 정희완 요한 - 안동교구 신부. 문경 모전동성당 주임이다.

 

[경향잡지, 2010년 11월호, 정희완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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