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3일 (월)
(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복자 124위 열전51: 이성례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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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08 ㅣ No.1438

[복자 124위 열전] (51) 이성례 마리아


옥에서 굶주리는 아들 보며 한때 배교했으나 끝내 순교



1840년 1월 31일, 서울 만초천 하류 당고개에서 복녀 이성례(마리아, 1801∼1840)는 칼을 받는다.

그 순간 그는 누구의 얼굴을 떠올렸을까? 당고개로 끌려오기 얼마 전, 피와 고름이 엉겨붙어 썩는 포청 옥 멍석에 눕혀 있다가 젖도 물리지 못한 채 죽은 젖먹이 막내 스테파노였을까? 아니면 먼저 순교한 남편 최경환(프란치스코)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이국땅에서 신학 공부에 정진하던 맏이 최양업(토마스)이었을까? 아무튼 부모의 순교로 고아가 돼 신산스런 삶을 살아야 할 자녀들을 남겨둔 채 이성례 마리아는 망나니의 칼을 받고 흔연히 순교의 길을 걸었다.

- 복녀 이성례 마리아.


포청 옥에서 굶어 죽은 젖먹이 때문에 ‘눈물의 배교’를 해야 했던 그는 같은 날 순교한 박종원(아우구스티노)과 홍병주(베드로) 등 6위와 달리 아직 시성의 영예를 안지는 못했지만, 당고개에서 순교한 다른 순교 성인들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모성 때문에 신앙이 흔들렸지만, 신앙으로 모진 육정을 이겨내고 순교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 신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기에 이성례 마리아의 삶은 잘 알려져 있다. 충청도 홍주현 태생으로, ‘내포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의 사촌 누이인 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이었다. 어려서부터 씩씩하고 총명했던 그는 17세 때 최경환과 혼인해 홍주 다락골 새터에 살면서 21세 때 최양업을 낳았고 그 뒤로도 슬하에 다섯 자녀를 더 뒀다. 늘 지혜롭게 집안일을 꾸렸고, 일가친척들과의 불화도 없었다. 나이 어린 남편을 공경하고 순종하면서 화목하게 가정을 이끌었다.

그러다가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한양으로 이주했으며 다시 박해의 기미가 보이자 강원도 금성현(현 김화군), 경기 부평,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예술공원로 92번길 일대) 등지로 옮겨 다녀야 했다. 그동안 맏아들 최양업은 신학생으로 선발돼 마카오로 떠났다.

이처럼 ‘신앙 때문에’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낯선 타향으로 전전하며 가난과 궁핍을 이겨내야 했지만 이성례는 기쁘게 참아냈다.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에 지쳐 칭얼거릴 때면, 요셉과 마리아가 이집트로 피난하던 이야기나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에 오른 이야기를 자녀들에게 들려주며 인내의 덕을 갖추도록 권면한 외유내강의 어머니였다. 또한 수리산에 정착한 뒤로는 남편을 도와 마을을 교우촌으로 일군 ‘지혜로운 여장부’이기도 했다.

하지만 1839년 기해박해는 가난했지만 단란했던 가정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박해가 일어난 뒤 남편은 한양을 오가며 순교자들의 시신을 찾아 묻어 줬고, 그는 남편 뒷바라지를 하며 자녀들을 보살폈다. 그러던 중 포졸들이 마침내 수리산 교우촌으로 들이닥쳤다. 이에 부부는 음식을 준비해 포졸들을 대접한 뒤 어린 자녀 다섯을 데리고 교우 40여 명과 함께 한양으로 향했다. 포도청에 압송된 이성례는 젖먹이와 함께 갇혀 300대 이상의 곤장을 맞으며 ‘팔이 부러지고 살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지는’ 고통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속수무책으로 굶주리는 갓난아이를 지켜보는 고통은 그를 흔들리게 했다. 이 때문에 그는 배교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렇지만 장남이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 다시 체포돼 형조로 압송된다. 당시 함께 갇힌 교우들의 권면으로 용기를 낸 그는 배교를 취소하고 갖은 유혹을 이겨낸 뒤 젖먹이를 하느님께 바치고 순교의 화관을 쓴다.

최양업이 마카오로 떠난 뒤 사실상 장남 노릇을 하던 둘째 최의정(야고보) 등 자녀들에게 남긴 그의 마지막 유언이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교 순교자전」을 통해 전해온다.

“이제는 다들 가거라. 절대로 천주님과 성모님을 잊지 마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처음부터 굶주리는 젖먹이를 뿌리치고 순교했다면, 그는 일찌감치 성인이 됐을 뿐 아니라 ‘위대한 순교자’로 남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막내아들 때문에 흔들렸고 배교까지 할 정도로 모진 육정을 끊지 못했던 복녀 이성례 마리아는 그 모정까지 하느님께 봉헌하고 형장으로 향했다. 그랬기에 그의 열절한 순교 혼은 그 이야기를 듣는 이들의 마음을 뒤흔들고 눈물샘을 자극한다.

[평화신문, 2015년 3월 8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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